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66)화 (66/146)

66. 어둠 속에 가려진 것

프시케는 오늘도 늦잠을 잤다.

결혼한 이후부터 프시케는 종종 늦은 아침에 눈을 뜨곤 했다. 커튼으로 꽁꽁 싸맨 창문 때문에 시간을 가늠할 수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날이 밝았어도 그녀와 에우로스가 머무는 자리는 언제나 어둠에 휘감겨 있었다.

에우로스의 품에 안겨 몇 번이고 몸을 떨던 지난밤을 떠올리며 프시케는 얼굴을 붉혔다. 클라리사가 더 이상 자신을 깨우러 오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에우로스와 첫 밤을 보내고 난 다음 날, 클라리사도 지금의 프시케처럼 얼굴을 붉혔었다.

“세상에, 마님…….”

클라리사가 말을 잊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언제나 종알종알 타박이 섞인 잔소리들을 늘어놓던 그녀는 목욕을 하러 들어선 프시케의 몸을 보고는 탄식과 함께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러면서도 프시케의 흰 피부에 피어 있는 얼룩들을 곁눈질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목욕 시중이 끝나자 클라리사는 엄숙히 선포했다.

“이제부터는 아침에 깨우러 오지 않을게요, 마님. 일어나면 줄을 당겨 저를 부르세요.”

“왜?”

“왜냐니요! 이 정도면, 이건…….”

“…….”

“밤새 아주…….”

“클라리사, 왜 그래?”

프시케는 갑자기 달라진 클라리사의 태도에 당황했다. 늘 거침없이 말을 쏟아 내던 하녀는 그날따라 몸을 이리저리 배배 꼬며 말을 아꼈다.

“하여튼! 아침에 많이 피곤하실 것 같으니 당분간은 느지막이 일어나도록 하세요. 마님이 안주인인데 누가 뭐랄 사람도 없고, 하녀들만 신나겠네요.”

“하녀들이 왜 신난단 말이야?”

“그거야, 저들끼리는 얼마나 할 말이 많겠어요. 지금 마님 상태만 봐도 일주일치 수다거리일 텐데.”

이제는 클라리사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고 있다.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커튼을 열고 빛 속에 서면 그녀의 몸 곳곳 흔적들이 드러난다.

얼마나 사랑했고 사랑받았는지를 보여 주는 지표 같은, 에우로스의 입술이 걷는 길마다 폭폭 파이는 발자국 같은 그런 흔적이었다.

잔뜩 가라앉은 듯한 찬 어둠 속에 한참 동안 누워 있던 프시케가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팔이 붙들렸다. 그녀는 깜짝 놀라 몸을 돌려 더듬더듬 옆자리를 짚었다.

“에우로스?”

아침에 일어나면 그는 옆에 없었다. 늘 바쁜 탓이었다. 밤을 함께 새지만, 아침은 함께하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웬일이에요?”

반갑고, 기뻤다. 시커먼 어둠 속에서 홀로 눈을 뜨지 않아서. 바로 옆에 에우로스가 누워 있어서.

에우로스는 낮고 부드럽게 웃었다. 보이지는 않아도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입술과 눈매에는 변함이 없는, 새파란 눈동자에만 들어찬 웃음. 그 웃음은 프시케에게만 보여 주는 웃음이었다.

붉어진 얼굴에 손바닥이 닿아 왔다. 손의 뜨거운 체온이 화닥거리던 뺨의 온도를 조금 더 높였다.

“오늘 하루 일정은 비웠어요, 프시케.”

에우로스가 말했다. 볼을 쓸던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입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작은 혀가 착실히 그 손짓에 대꾸했다. 입안에 물기가 고이고, 숨결이 보글보글 맺혔다.

“그러니까, 시간은 넉넉해요.”

뜨겁게 젖은 손가락이 입안을 빠져나와 느긋하게 움직였다. 동그랗게 갈라진 얇은 귓바퀴가 끈적한 손가락과 마찰하자 낯선 소리가 귀 안으로 속속들이 파고들었다. 적나라하게 문질러지는 소리에 프시케의 목덜미가 팽팽하게 긴장했다.

손가락이 목을 쓰다듬었다. 빠듯하게 조여진 하프 현을 쓸 듯이, 에우로스는 가볍게 손을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프시케는 하프가 우는 것처럼 예쁜 소리로 울었다. 그러면 그는 웃었다.

높낮이가 다른 울음과 웃음이 섞이기 시작하자, 그때부터 에우로스는 더 이상 여유를 부리지 못했다. 분명히 오늘 시간은 넉넉한데도.

천천히, 가벼이 움직이던 손가락에 속도와 무게가 더해졌다. 빠르고 묵직하게 오르내리는 손의 리듬을 따라 프시케의 몸이 흔들리고 소리가 더해졌다. 절정 전의 얕은 쾌락이 들숨과 날숨을 타고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꼭 이어 붙였던 몸의 구석구석이 벌어졌다. 벌린 간격 사이로 둥근 털실 뭉치에 단단히 묶여 있던 실이 어느 순간부터 풀려나왔다. 멈추지 않고 돌돌 굴러다니는 동그란 공의 궤적을 따라 실은 흐르고 가끔 매듭짓기를 반복했다.

프시케는 저도 모르게 시트를 꼭 쥐었던 손을 폈다. 그러고는 에우로스의 매끄러운 가슴과 남자답게 쭉 뻗은 쇄골과 땀이 송송 올라온 목의 뒤편을 따라 손가락을 미끄러트렸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어깨를 넘어 등으로 향하던 그녀의 손이 한순간에 떨어졌다. 에우로스는 그녀의 손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마디마디 움켜쥐었다.

손이 꼭 붙자 두 사람의 몸도 동시에 엉켜들었다. 아침의 에우로스는 여전히 어둡고, 안개에 싸여 희미했다.

또렷한 것은 어둠을 헤친 푸른 눈동자의 색깔이었다. 아무것도 구분할 수 없는 밤 저편에서 파란 불빛을 내뿜는 별. 프시케를 인도하고 이끌어 주는, 그래서 막막함을 지워 주는 별의 방향.

일정하게 같은 속도로 달리던 움직임이 불규칙해졌다. 빠르게, 더 빠르게, 240야드 거리를 벌릴 만큼 속력을 내어 마지막 선을 나란히 통과한 둘은 경주를 마쳤음에도 여전히 더웠고, 더웠음에도 서로를 놓지 않았다.

급하게 올린 체온은 아주 느리게 가라앉았다.

* * *

“오늘 외출하는 건 어때요?”

늦은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냅킨을 가지런히 접으며 에우로스가 물었다.

“외출이요?”

식당 한쪽에 서 있던 클라리사가 싱글벙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프시케는 그 표정을 모른 척했다. 다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데, 채스웍 하우스로 돌아가기 전에 리던 시내를 구경시켜 주고 싶어요.”

그 말을 들은 프시케의 눈이 반짝 빛났다. 오랜만에 느끼는 호기심이었다.

“이맘때의 리던은 꽤 활기찬 편이에요. 곳곳에서 크리스마스 시장이 열리기도 하고, 공연도 많이 열리지요.”

“연극 공연도 있나요?”

“……아마, 그럴 겁니다.”

프시케의 질문에 에우로스는 잠깐 멈칫했다.

프시케는 아직도 자신의 과거에 대해 모르고 있다. 그가 그 끔찍한 날들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프시케는 제가 극단을 떠올리는 그 어떤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모른다.

알아보려면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르모니아든, 누구든 제 과거를 말해 줄 사람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프시케는 그러지 않았다.

누군가의 성격을, 혹은 과거를 남의 입으로 듣지 않는 것.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그녀 스스로 판단하는 것.

그것이 갤러웨이에서 들은 프시케의 가치관이었다. 그리고 에우로스는 그녀의 그 훌륭한 가치관 덕분에 하고 싶지 않은 말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럼 연극을 보러 가는 건 어때요, 에우로스?”

대답 대신 에우로스는 웃었다. 그녀는 자신의 제안에 환한 웃음을 짓는 그의 얼굴을 보자 당혹감을 느꼈다. 그건 밀어내는 웃음이었기 때문이다.

“글쎄요.”

에우로스의 웃음에 프시케는 그만 초조해졌다. 어째서 저렇게 웃는 걸까. 저 웃음은 가짜인데.

“싫은가요?”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나는 연극을 별로 즐기지 않아요. 그러니 다른 유희거리를 찾아보는 게 어때요?”

다정한 권유였으나 완곡한 거절이기도 했다.

프시케는 낮 시간의 밝음 속에서 다시 깨달았다. 에우로스는 뒤편을 보여 주지 않는 거울과 같은 사람이라는 걸. 갤러웨이 성에서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결혼한 후로는 밤의 어둠에 가려 잊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어둠은 모든 것을 숨긴다. 검은 베일과 두꺼운 커튼 속에서 거울은 그저 보이지 않는 사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베일을 벗고, 커튼을 걷고 난 후 빛이 드리워지면, 그것은 더 이상 사물 중 하나가 아닌 거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프시케는 웃는 에우로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지면, 거울에서 주석과 수은을 벗겨 내면, 그때는 뒤쪽에 숨긴 것들이 비쳐 보일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렇게 해요.”

프시케의 대답에 에우로스는 다시 웃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진심으로 웃는 거였다.

초조했던 마음이 그 웃음에 녹아내렸다. 프시케는 가끔 사무엘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 에우로스의 웃음에 반해 버렸다던 리던 사교계 여자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당신이 연극을 그렇게 싫어하는 줄은 몰랐어요. 그럼 오늘은 테임 강변으로 산책을 갈까요?”

프시케가 제안했다. 그러자 에우로스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레국화로 가득한 들판이 웃음에 살살 흔들리며 프시케의 마음을 간질였다.

에우로스에게서 웃음을 분리해 내는 것은 아마 영영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거울에 비치는 것은 홀로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 하는 프시케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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