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앤 여왕의 폐위와 죽음
여왕의 장례는 그녀가 죽은 지 일주일 뒤 리던 대성당에서 치러졌다. 상복을 입은 귀족들이 떼 지어 찾아와 성당 안을 메웠다.
애도의 종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댔고, 그 종들의 울림 속에 참석자들은 저마다의 소리를 숨겼다. 남몰래 짓는 웃음도, 남을 의식한 울음도 모두 뎅그렁거리는 큰 소리에 묻혀 자취를 감추었다.
그때 에우로스와 프시케가 대성당에 나타났다. 순식간에 장례식의 주인공은 여왕에서 그들로 바뀌었다. 여왕 위에 캐번디시가 있다는 말은, 그녀 사후에도 그대로였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부패하기 직전, 악취를 풍기는 여왕의 시신 따위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리던 사교계를 들썩이게 만든 낭만과 부도덕의 화신 두 명을 힐끔거리느라 정신없는 까닭이었다.
프시케는 새카만 베일을 썼다. 에우로스가 직접 준비해 준 것이었다.
“아무래도,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일 테니까요.”
그의 말은 맞았다. 촘촘한 검은 베일 너머로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반대로 말하면 그녀의 얼굴도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뒤덮인 시야는 갑갑하기도, 편안하기도 했다.
“웃어요, 프시케.”
에우로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러나 다정한 어조로 속삭였다.
“네에? 장례식에서요?”
프시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인기 없는 여왕이었다 한들, 캐번디시의 성을 달고 이곳에서 웃으면 안 된다는 것쯤은 그도 모르지 않을 텐데.
“어차피 베일 때문에 그대의 얼굴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 뭐 어떻습니까.”
“그래도…….”
“여왕이 그대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웃어 주어도 됩니다. 게다가 여기 모인 사람들이 우리를 품종박람회에 출품된 돼지 보듯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마음껏 비웃어 주고 싶지만 저는 베일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내 몫까지 웃어 줘요.”
그의 말에 프시케는 오랜만에 살며시 웃음을 흘렸다. 여왕의 장례식을 위해 리던으로 온 후부터 프시케는 거의 웃지 못했다.
데본셔 공작은 늘 그랬듯 식사 도중 잠시 그녀와 겉도는 대화를 했고, 공작부인은 데이모스의 입대 이유를 그들 부부에게서 찾았기 때문에 절대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하르모니아는 제 일로도 충분히 괴로워 누군가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에우로스는 리던에서 할 일이 많으니 대부분의 시간 동안 공작저를 비웠다. 저택이 텅 빈 것같이 느껴지는 순간, 프시케는 또다시 흰 벽면에 비치는 제 그림자를 보며 숨을 죽였다.
방문을 열면 데이모스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때로는, 덩치 큰 사내가 뒤에서 저를 덮치러 달려들 것만 같았다.
그런 그녀를 조금이나마 웃게 만드는 사람이 에우로스였다. 지금처럼, 검은 베일을 씌워 남몰래 웃음 짓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가 차단해 준 세상은 채스웍 하우스처럼 고적하고 밤의 침실처럼 어둑했다. 누구의 시선을 받을 필요도, 누구에게 시선을 줄 필요도 없는 공간.
그 안에서 프시케는 작게 웃을 수 있었다. 호기심을 버리고 그 베일을 들쳐 볼 생각을 하지만 않는다면.
“오랜만이군요, 프시케, 그리고 에우로스.”
낯설지 않은, 높은 피치의 목소리가 그들과 가까워졌다.
“여기서 보는군요. 고든레녹스 총리 각하, 그리고 부인.”
에우로스는 반가운 척 태연하고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프레이아에게서 시선을 돌린 에우로스가 총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결혼 소식은 들었습니다. 미처 축하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고든레녹스 총리가 에우로스의 손을 맞잡았다. 역시 반가운 척 태연하고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그는 어리고 예쁜 제 아내가 눈앞의 남자에게 빠져 수년간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걸 잘 알았다. 그러나 그 사실이 총리에게 크게 대수로운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고든레녹스 총리는 프레이아와 처음부터 계약 결혼 비슷한 것을 했다. 서로의 사생활은 충분히 존중해 주기로. 대신 이렇게 대외적인 자리는 반드시 동반 참석하여 과시하기로.
“제 아내, 프시케 캐번디시입니다.”
에우로스가 프시케를 총리에게 소개했다. 아내라는 말에 프레이아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자연스럽게 다시 접히며 웃음을 만들었다.
“캐번디시 부인, 반갑습니다.”
고든레녹스 총리의 인사에 프시케가 몸을 살짝 굽혔다.
총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검은 베일 속 여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그는 왕궁에서 열렸던 그녀의 데뷔탕트 무도회에 참석했었으므로 프시케의 얼굴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제 아내, 프레이아 고든레녹스를 제치고 새로 즉위한 사교계의 여왕이라고 했던가. 총리의 입꼬리 한쪽이 슬쩍 들려 올라갔다.
당시 그 기사를 읽은 프레이아는 세상 모든 근심과 불안을 등에 업은 것처럼 보였다. 딱히 위로를 해 줄 필요는 없었지만, 예쁘장한 얼굴에 주름이 질까 그는 마음에도 없는 듣기 좋은 소리를 해 주었다.
여왕이 죽은 지 일주일이 흘렀다. 정국은 혼란했다. 여왕의 서거 후 바로 즉위했어야 할 프로센의 국왕은 아직도 제 나라를 떠나지 않았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 가서 왕 노릇을 하기가 귀찮다는 이유였다.
왕은 중요하다. 지극히 총리 개인의 견해로는,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군림하기 위해서 중요하다.
국민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 국민들의 지탄이 흐르는 곳. 그 한 곳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잉그린트의, 브라이튼 섬의 군주였다.
병의 악화로 여왕이 정사를 돌보지 못한 지도 꽤 되었다. 그동안 고든레녹스 총리는 연임에 성공해 내며 여왕 대리 직무를 해내고 있었다. 즉, 군림하는 왕 뒤에 숨은 실질적인 지배자는 총리인 것이다.
고든레녹스 총리가 걱정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안위였다. 프로센의 국왕이 오면 그의 권력은 지금과 변함없이 보장될 터였다.
잉그린트어 한 마디 내뱉지 못하는 허수아비 왕의 뒤에서 총리의 권한은 더욱 막강해질 것이다. 그러다 보면 몇 년 뒤 그는 또다시 총리직을 수락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 와중에 프시케 스튜어트, 아니, 프시케 캐번디시의 존재가 변수로 등장했다. 죽은 여왕도 그녀의 존재를 두고 불안해했듯, 총리도 마찬가지였다.
스코틀린에서 활동하는 반군들은 번식하는 짐승들처럼 나날이 수가 많아졌다. 왕좌가 빈 작금의 상황을 이용해 그들이 독립을 외친다면 꽤나 골치 아픈 상황을 초래할 것이다.
그때 프시케 캐번디시는 반군이 삼을 좋은 명분이 될 수도 있었다. 그것이 최근 고든레녹스 총리의 가장 큰 근심이었다.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에우로스가 프시케를 샅샅이 살피는 총리의 시선을 막아서며 말했다. 오묘한 긴장감이 네 사람을 둘러쌌다.
“채스웍 하우스에는 언제 초청해 줄 건가요, 프시케?”
긴장을 깨고 프레이아가 카랑카랑하게 물었다. 프시케는 저도 모르게 에우로스 쪽을 보았다. 결정은 그의 몫이었다.
“설마, 저택에 손님을 초대하는 것도 일일이 에우로스의 허락을 구해야 하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본 프레이아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
프시케 캐번디시는 아직 제대로 된 안주인 노릇도 못 하고 사는 것이 분명했다. 스코틀린 출신의 얼뜨기를 데려다 놓았으니 무엇인들 제대로 할 리가 있나. 이쯤 되면 에우로스도 그 말도 안 되는 결혼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직 신혼이라서요. 제가 아내와 둘만 있는 시간을 즐깁니다.”
에우로스가 프레이아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환하게 웃지는 못했으나, 그는 눈치 빠른 프레이아라면 무조건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의 그럴듯한 웃음을 만들어 냈다. 밀어내는 웃음. 그녀는 발끈해 손톱을 입에 가져다 댈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그가 프시케와의 결혼을 알렸던 날, 황금화살 클럽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에우로스의 뒷모습을 좇으며 프레이아는 다시 오래전 데본셔 공작저의 장미 정원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수줍게 서서 데뷔탕트 무도회에 동행을 청하던 소녀를 지켜보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바로 그때, 에우로스가 지금처럼 대단해지지 않았을 때, 고작 사생아였을 뿐이었을 때 가졌어야 했다. 받아 주지 않는다면 망가트렸어야 했다. 그녀가 가질 수 없는 것은 누구도 가질 수 없도록. 그랬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 미래였다.
이미 늦었지만 프레이아는 이대로 멈출 수 없었다. 멈추는 것도 용기라면, 그런 의미에서 프레이아는 겁쟁이였다. 그녀는 제동하는 법을 몰랐다. 그것은 프레이아와 데이모스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언제가 되었든, 그녀는 장미 정원에서의 그 일을 되돌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장미 가시에 찔려 피 흘릴 사람은 프시케가 될 것이다.
“내가 원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져요.”
소녀는 에우로스에게 이렇듯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녀가 원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그래, 프레이아는 그런 여자였다. 데이모스 캐번디시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그녀 스스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여자.
프레이아는 남편인 고든레녹스 총리의 팔짱을 살갑게 끼며 프시케 캐번디시 쪽으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웃음의 진짜 의미를, 검은 베일 뒤편, 캄캄한 시야 속의 프시케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