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64)화 (64/146)

64. 레이프가 좋아

“그렇게 한심한 눈으로 볼 필요는 없잖아.”

하르모니아가 눈을 내리깔며 에우로스에게 말했다. 살이 내려 움푹 들어간 양 뺨의 피부가 거칠하게 일어나 있었다. 눈물을 하도 흘린 탓이었다.

“내가 없는 틈을 타서 또 일을 저질렀던데.”

에우로스는 비난하듯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푹 꺼진 여동생의 얼굴을 신경 쓰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 오빠가 채스웍 하우스로 가고 나서 조지 샌드의 이름으로 프레데릭을 후원했어. 어차피 알고 있었잖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공작저에 프레데릭을 반주자로 고용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에우로스는 토마스에게 하르모니아의 이후 행동에 대해 보고하도록 명령했다.

신분을 속여 가면서까지 가난한 음악가를 후원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는 기가 찼지만, 당시에는 하르모니아의 날뛰는 행동을 마땅히 제지할 방법이 없었다. 곧바로 프시케의 일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하르모니아가 적당히 부모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왔다는 것을 안다. 예측 가능했던 그녀의 삶이 예측 불가한 방향과 속도로 전진하기 시작한 데는 에우로스의 책임도 있었다.

책상을 선물하고, 소설 쓰는 것을 응원했으며, 신사복을 입혀 황금화살 클럽에 들락거리게 만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에우로스 자신이었다.

후원이니 뭐니 하는 보고를 들었을 때는 제가 하르모니아를 부추겼다는 생각 때문에 조금은 자책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프레데릭이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했고, 더 이상 자신이 개입할 여지도 사라졌다. 그렇게 그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막상 여동생의 부은 눈을 마주하자 에우로스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직 다 정리를 못 했나 보군. 무슨 대단한 사연이 있었길래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인 건지.

그래서 에우로스는 여동생이 느끼기에 최악일 법한 행동을 하고 말았다. 바로 오빠의 잔소리였다.

“그 사람은 떠났어. 네 후원이 필요하지 않았나 보지. 네가 준 건 후원이 아니라 부담이야. 전에도 내가 말하지 않았어? 프레데릭은 그 부담을 애초부터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 양발을 똥통에 처박고 사는 사람이 무얼 감당할 수 있겠냐고. 스스로 살아 내기에도 힘든데.”

하르모니아는 귀를 막고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듣기 싫었지만, 에우로스의 잔소리가 지독한 진실인 건 맞았다.

토마스로부터 프레데릭이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다급히 마차를 달려 제가 마련해 주었던 주택에 가 보았지만 이미 그곳에는 사람의 온기가 없었다.

황금화살 클럽에, 그가 연주하던 다른 술집에 토마스를 보내 그의 자취를 쫓았으나 그 어디에도 프레데릭은 없었다. 프레데릭이 원래 살았던 이스트엔드의 다락방은 다른 사람이 쓰고 있었다. 말 그대로 프레데릭 혼자 증발해 버린 것이다.

그때 하르모니아는 뼈저리게 인정해야 했다. 켄싱턴과 이스트엔드의 그 긴 거리를, 반대쪽으로 머리를 둔 방향을 그들은, 아니, 프레데릭은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애초에 극복하고자 하는 생각조차 없었는지도 모른다. 잠시 잠깐 마주쳤던 순간을 영원이라 착각한 사람은 하르모니아 하나였다.

열정이 사라진 곳에 포기가 자리하자 공허가 샘솟았다.

프레데릭을 만난 후, 열여덟의 하르모니아에게는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첫 감정들이 밀려왔다. 남자에 대한 갈증, 설렘, 그리움, 상실.

짧은 시간 동안 빠르게 연주되었던 음악은 어떠한 여운도 남기지 않고 그대로 종료되었다. 그리고 연주자는 급히 무대를 벗어났다. 허무는 관객 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었다.

“새해가 되면, 공작님께서 태번으로 가실 거라더군.”

에우로스는 그 말을 하며 한숨을 뱉었다.

공작은 제 일로도 바빠 자식들에게 별 관심이 없었고, 공작부인은 조금 다른 의미로 자식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하르모니아가 웃는지 우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공작 내외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하르모니아의 성공적인 결혼이지, 그녀의 행복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오히려 그들의 무관심이 더 나은 것인지도 모른다. 에우로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소공녀가 근본도 모르는 폴스카 출신 피아노 연주자에게 빠져 정신을 못 차린다는 걸 알면 그녀는 그대로 감금당할 수도 있었다. 귀하고 값진 보석은 고급 케이스 안에 잘 보관되어야 한다는 것이 공작 내외의 뚜렷한 주관이었다.

“그래.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잖아.”

에우로스의 한숨을 받아치듯, 하르모니아도 체념하며 대답했다.

몰랐던 일도 아니었다. 별다른 문제가 없는 한 그녀는 내년에 약혼을 하고, 내후년 스무 살이 되면 태번으로 결혼식을 올리러 떠날 예정이었다.

인디아나에게 델먼이 있듯, 하르모니아에게는 태번의 카드모스 왕자가 있었다. 그는 머지않아 그녀의 육체를 거머쥘 사내였다.

“소설은, 잘 쓰고 있어?”

에우로스는 화제를 돌렸다. 눈이 시뻘건 와중에도 하르모니아의 책상 위는 원고로 가득했다.

헛바람을 들게 한 것은 후회되지만, 그래도 책상을 선물했던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무엇이든 지탱할 것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이지러진 화초의 줄기가 책상을 지지대 삼아 넝쿨을 뻗는다면 그건 꽤 괜찮은 결과였다.

“그냥, 그래.”

하르모니아는 뾰로통하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그녀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소설 덕분에 지금 이 시간을 견딜 수 있는 건 사실이었다.

자기만의 방이 있는 것은 하르모니아에게 정말이지 큰 위안이 되었다. 책상이 없었다면 그녀는 지금쯤 세크리테어에 놓인 알록달록한 도자기 인형들을 전부 쓸어 버렸을 수도 있었다.

“레이몬드는 완전히 인디아나를 떠난 거야?”

에우로스가 잉크가 번진 원고를 들어 천천히 훑고는 물었다.

그 질문에 하르모니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을 쓰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다 쓰고 난 뒤에 보니 종이 전체가 물에 담갔다 뺀 것처럼 푹 젖어 있었다. 그러나 그 종이를 밀어 두고, 그다음 장을 계속 쓰면서 눈물의 양과 잉크 얼룩의 개수는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 후에 인디아나는 어떻게 되는데?”

“잘 모르겠어. 델먼과 계속 살아야겠지.”

“인디아나 주변을 맴도는 남자 말이야. 혼자 여주인공을 짝사랑하는 사람이었지?”

“레이프를 말하는 거라면, 맞아.”

“그 사람은 그저 조연인가? 짝사랑만 하는?”

“응, 아마도.”

“왜?”

“애초에 내가 그렇게 설정했으니까. 레이프의 마음은 인디아나가 몰라. 레이프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고. 그는 평생 인디아나를 욕심내지 못해. 그러니까 레이프는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거야.”

연극에도 즉흥극이 있다. 소설이라고 전부 초기 설정대로 흘러가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에우로스가 다시 물었다.

“설정을 바꿔 볼 생각은 없어?”

“지금으로서는 없는데. 그건 왜 묻는 거야, 에우로스?”

“나는 레이프가 마음에 들거든.”

“뭐?”

에우로스의 말에 하르모니아는 의아해져 눈매를 살짝 좁혔다.

에우로스는, 레이프가 아니라 레이몬드와 더 비슷한 사람 아닌가? 불같은 사랑에 빠져 이복동생의 아내 될 여자를 위험에서 구출해 야반도주 후 그레트나 그린에서 결혼식을 올린 세기의 사랑꾼이 그녀의 오빠, 에우로스였다.

솔직히,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귀를 씻어 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만큼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는 말이다.

에우로스와 프시케라니. 신분이며, 상황이며, 전부 다 제쳐 두고서라도, 에우로스는 남의 마음에 관심이 없는 남자였고, 프시케는 제 마음을 누르는 여자였다. 그런 사람들이 결혼을 했다는 게 사실일까?

아버지에게 재차 확인했으나 대답은 같았다. 옆에서 함께 마음 졸이고 있던 어머니는 데이모스가 더 이상 프시케 스튜어트와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성호를 긋고 감사기도를 올렸다.

그 후에 데이모스의 입대가 결정되고는 주일에 교회에 갈 의지마저 상실해 버렸지만. 그리고 지금까지도 공작부인은 아들의 부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에우로스는 레이몬드를 더 좋아할 줄 알았는데.”

하르모니아가 중얼거리자 에우로스는 픽 웃었다. 그러고는 한마디 더 덧붙이고는 방을 나갔다.

“나는 인디아나가 레이프의 마음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어.”

에우로스가 사라지자 하르모니아는 골똘히 생각했다.

에우로스의 조언대로 해 볼까? 처음에 계획했던 설정이 뒤바뀌는 건 반갑지 않은 일이었지만, 인디아나를 각별한 마음으로 지켜봐 온 레이프라면 그녀의 짓밟힌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바꾸어 볼까?

“하르모니아! 에우로스 부부와 승마하러 갈 건데 함께 갈래?”

그때 사무엘이 바깥에서 문을 두드렸다. 진지하게 고민 중이었는데, 하르모니아는 문 건너편의 사무엘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들어와, 사무엘.”

사무엘은 망설였다. 지난번 하르모니아의 기지개에 얼굴을 붉힌 후로, 그는 함부로 그녀의 방에 출입하지 않았다. 사무엘이 머뭇거리다 문을 슬쩍 밀고 얼굴을 빼꼼 들이밀었다.

“소설 쓰는 것도 좋지만, 가끔 바람을 쐬도록 해.”

에우로스에게 대강은 들었다. 하르모니아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안쓰러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왕족에게 시집가야 할 그녀가 사랑에 빠져 빈민굴에 처박히게 된다면 두고 보지 못할 것 같았다.

데본셔 공작은 딸이라 해도 그런 행동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가문에서 내쳐져 평생 남자의 쥐꼬리만 한 벌이로 허덕이며 사는 하르모니아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옷을 갈아입을 테니 응접실에서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전해 줘.”

하르모니아는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약 일곱 시간 만에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자 허리에서 두둑 소리가 났다.

상체를 휘휘 돌리는 그녀를 멍하니 보던 사무엘의 볼과 귓불에 삽시간에 열이 올랐다. 그러자 그가 제 얼굴을 가리려 곧바로 문을 닫았다.

“잠시만, 사무엘!”

하르모니아의 부름에 사무엘이 몸을 슬그머니 되돌렸다. 여전히 그의 얼굴에는 홍조가 올라 있었다.

“왜?”

“사무엘도 레이프가 좋아?”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마치 준비된 사람처럼 곧바로 대답했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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