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쥐덫
랑글로우에 주둔한 잉그린트 제13보병연대의 고문실은 며칠 전부터 다시 살인귀의 놀이터가 되었다.
놀라울 것도 없이 살인귀는 그 유명한 데이모스 캐번디시 소공작이었다. 한동안 반군 대신 여자들을 괴롭히고 노느라 잠잠한가 했더니, 스코틀린의 블랙워치 소속 부대원을 생포한 후로 그는 사냥한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굴고 있었다.
“차라리 날 죽여!”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채로 남자가 울부짖었다. 처음 잡혀 왔을 때 호리호리하고 날카로운 인상이었던 남자는 고문실에 처넣어진 뒤 사람의 형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온몸이 부어 있었다. 너무 많이 맞은 탓이었다.
데이모스는 피를 싫어했다. 피를 보면 제 앞에서 목이 따여 죽은 비올레타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남자가 피를 흘리면 즉각 물속으로 집어넣어 친절히 씻어 주었다. 피가 씻겨 나갈 정도로 오래오래 물고문을 하고 나면 남자는 정신을 잃었고, 끄집어내진 뒤 곧장 다시 흠씬 두들겨 맞아 정신을 차렸다.
“죽이는 건 너무 쉽지. 그건 반군에게 너무 관대한 처사야.”
데이모스는 빙글빙글 웃었다.
나이젤 로스. 애초에 쉽게 넘어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당초 예상보다 더 쉽지 않은 자였다.
그는 며칠째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진 고문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걸 보고 있자니 데이모스의 호승심이 점점 더 치솟았다.
데이모스에게 스코틀린 반군이란 참 요상하고도 웃긴 존재들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저런 짓거리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버러지 같은 평민 놈들이야 그렇다 쳐도, 멀쩡한 귀족 가문의 자식들이 안락한 삶을 등지고 블랙워치 활동을 할 이유가 뭐냔 말이다. 덜떨어진 신념과 무책임한 광기로 똘똘 뭉친 사이비 종교를 보는 느낌이었다.
절대로 협조하지 않겠다며 버티는 놈을 벌써 며칠째 봐주고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이별한 연인과의 극적인 재회는 하게 해 주어야 하니까.
“이런다고 내가 잉그린트의 개가 될 것 같아? 죽어도 그럴 일은 없어. 차라리 죽여.”
나이젤이 헉헉 숨을 몰아쉬며 겨우겨우 말을 뱉었다. 그럼에도 그의 눈빛은 야멸차게 번득였다.
이 정도의 혹독한 고문에도 이지를 잃지 않은, 어떤 면에서는 대단한 인간이긴 했다. 데이모스는 혀를 쯧 찼다.
“죽어도 그럴 일은 없다고 했나? 죽어도?”
데이모스는 자못 심각하게 물었다.
“그래, 이 잉그린트 개새끼야. 죽어도, 죽어도 나는 내 조국을 배반하지 않아.”
나이젤은 곧바로 대답했다. 한 치의 주저함도 없는 답변이었다.
그는 블랙워치에 입대한 뒤 부모와 가문을 버리고, 사랑하는 여자를 잃었다. 자신을 구성하던 그 모든 것을 척지고 남은 것은 단 하나였다.
스코틀린의 독립. 그 어마어마한 대의. 그것을 이룰 수만 있다면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나이젤은 작전 중에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는 바람에 생포되었다. 잉그린트 내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부대를 막 떠나 국경 근처에 진입했을 때, 제 얼굴을 알아본 스코틀린 귀족의 신고로 그 자리에서 총구에 둘러싸였던 것이다.
곧바로 자결을 시도했으나 잉그린트 군대의 행동이 더 빨랐다. 자결하려는 반군들을 하도 많이 겪어 보았기 때문이었다.
작전 수행 중에, 혹은 전투 중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나이젤이 꿈꾸던 최선의 최후였다. 하지만 눈을 떠 보니 이미 그는 마취된 상태로 잉그린트 군대에 끌려온 뒤였다.
며칠간 생사를 넘나드는 고문을 겪었지만, 자신이 입을 열지 않는다면 블랙워치는 무사할 것이다. 그러면 된다. 나이젤은 침침해지는 눈을 애써 뜨려 노력했다.
“그래, 그렇겠지. 너는 죽어도 네 한심한 조국을 배반하지 않겠지.”
“알면 죽여. 이따위 고문에 내가 넘어갈 일은 없을 테니.”
“말했잖아. 쉽게 죽이지 않는다고.”
“그럼 계속 고문해.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죽겠지.”
데이모스는 나이젤과의 이 쳇바퀴 도는 대화가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그토록 죽겠다고 절규하면서 죽을 자리에 굳이 뿌리를 내려 싹을 틔우는 이유는 뭔지. 촉촉한 밭에 뿌리를 내리고 편히 살면 될 것이지, 하필 바위틈에 뿌리를 내려 살겠다고 아등바등하면서 또 죽겠다고 큰소리 치는 모순이라니.
뭐 어찌 되었든 상관없는 일이긴 하다. 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최대한 긴 시간 동안 고통스럽게 만들어 죽이면 될 일이고, 받아들이면 세작으로 실컷 써먹고 죽이면 된다. 나이젤 로스의 효용 가치는 그 스스로 결정하게 될 것이다.
물론 데이모스가 원하는 것은 후자, 세작으로 실컷 써먹고 죽이는 것이었다. 이 지리멸렬한 고문의 목적은 분명했다.
에우로스와 프시케를 나락으로 빠트리기 위해서는 그래야 하니까. 그러므로 조금 귀찮은 일을 감수하고서라도 나이젤 로스의 전 연인을 데려올 필요가 있었다.
마침 고문실 밖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이 문을 두드렸다. 기다리던 사람이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지겹게 반복된 고문 패턴도 이제 끝이다.
“내가 새로운 고문 기구를 하나 들여왔는데 말이지.”
데이모스의 말에 나이젤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래, 더 심하게 고문해라. 그리고 죽여 주면 더 좋고. 나이젤의 눈에는 살기가, 데이모스의 눈에는 흥미가 어렸다.
“한번 볼래? 미리 각오해 둘 겸.”
“마음대로.”
나이젤이 대꾸하며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문 기구를 옮긴다면 육중한 소리가 날 터인데, 밖에서는 작게 흐느끼는 여자의 울음소리만 들렸다. 어디서 여성 동지가 잡혀 온 모양이었다.
“들여와!”
데이모스가 문밖으로 소리쳤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고문 기구가 아니라 오락 기구를 선물로 받은 것처럼 느껴질 만큼 그의 목소리는 격앙된 상태였다.
끼이익. 수많은 사람들의 피에 절여져 심하게 녹슬어 버린 철문이 뭉툭한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동시에 여자 하나가 굴러 들어왔다.
원래는 잠옷이었을 흰 드레스가 걸레짝처럼 뜯겨 나가 있었다. 옷 아래 여자의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보자 나이젤은 시선을 휙 돌려 버렸다.
“나이젤 로스.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인사도 해 주지 않을 셈이야? 그렇게 안 봤는데 참으로 비정한 사내군.”
“그게 무슨?”
데이모스의 빈정거림에 나이젤은 의아해졌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라니. 설마 아는 사람인가? 나이젤이 그 여자를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그때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거꾸로 매달려 있는 사내 쪽을 보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몇 번 눈을 깜박였다. 눈꺼풀이 내려앉을 때마다 눈물방울이 끊어지듯 뚝뚝 떨어졌다.
마침내 나이젤과 여자의 눈이 피비린내 나는 고문실 한가운데에서 마주쳤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아비게일. 이게, 이게 어떻게…….”
모진 고문으로는 절대 흐려지지 않았던 나이젤의 눈이 혼란으로 부예졌다. 고문을 하도 당하다 보니 헛것을 보는 것일 테다.
그는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뜨거운 눈물이 이마를 타고 고문실 바닥으로 줄줄 흘렀다. 그러자 바닥에 눌어붙어 있던 핏자국들이 게걸스럽게 그 눈물을 받아먹었다.
“나이젤…….”
아비게일은 울음을 멈추었다. 사랑했던 사람이 벌거벗겨진 채 허공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그녀가 오들오들 떨며 숨을 죽였다.
“야 이 개새끼야! 저 여자는 스코틀린 총독의 딸이야! 독립군과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라고!
나이젤이 헐떡이며 소리쳤다. 매달린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독립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데이모스가 피식 웃으며 아비게일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챈 뒤 나이젤을 향해 말했다.
“이제부터 이 여자가 네 고문 기구야. 네가 쓸데없이 반항할 때마다 내가 이 여자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잘 지켜봐. 이 정도면 꽤 괜찮은 고문 방법 아닌가?”
“아비게일을 놔줘! 이 개 같은 놈아!”
나이젤이 울부짖었다. 그러자 데이모스가 즉각 여자의 옷을 잡아챘다.
이곳까지 끌려오며 넝마처럼 변해 버렸던 잠옷은 이제 완전히 형태를 잃었다. 아비게일은 파들거리며 찢어진 천을 그러모아 몸을 가렸다.
“차라리 나에게 해. 저 여자는 죄가 없어. 나를, 나를…….”
나이젤은 차마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반항적으로 굴었다가는 제 눈앞에서 아비게일이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데이모스는 냉소했다. 나이젤의 행태가 퍽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사람이란 참으로 이상한 존재들이다. 자신은 죽어도 상관없다면서 어째서 자기 자신도 아닌 타인 때문에 약한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여태껏 그렇게 기세등등하더니 여자 하나 때문에 갑자기 수그리는 나이젤을 보자니 어이가 없어졌다.
이럴 줄은 알았지만, 그래서 여자를 납치해 와 눈앞에 들이밀긴 했지만, 너무 쉬웠다. 그리고 너무 빨랐다.
나이젤 로스는 로맨티시스트임이 분명했다. 연인이 약점인 사내. 데이모스의 예상은 아주 잘 들어맞았다.
“나이젤, 나는 괜찮아.”
그때 아비게일의 침착한 말이 고문실을 울렸다. 그 울림이 가쁘고 거친 숨소리를 뚫고 차분하게 나이젤의 지친 귀를 위로했다.
“그때, 네 편을 들어주지 못했던 걸 내내 후회했어. 겁내지 말걸, 네 손을 잡을걸, 그게 널 보낸 뒤 항상 했던 생각이야.”
“아비게일…….”
“지금 네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마. 나도, 비록, 지금 이런 모습이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을게.”
아비게일의 끝말이 형편없이 떨려 나왔다. 그녀는 천 자락을 모아 쥔 손에 다시 한번 힘을 주었다.
“내 아버지는 스코틀린의 총독이야. 여왕이 직접 임명한 사람이지. 그런 자의 딸을 함부로 할 수는 없을 거야. 그러니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네 뜻대로 해.”
아비게일의 말이 마치 울음 대신 쏟아지는 것 같았다. 나이젤은 입술을 마구 짓씹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설마 총독의 딸에게 나쁜 짓을 할 만큼 간 큰 잉그린트 군인이 있을 리가 없다. 적어도 아비게일은 무사할 것이다.
“웃기는 소리.”
그때 데이모스가 눈을 굴리며 끼어들었다.
나쁘지 않은 신파였다. 그러나 헛된 꿈과 희망을 심어 주고 싶지 않았다. 꼴같잖은 반군의 사랑 노래를 짓이기고 싶은 가학심이 피어올랐다.
데이모스가 보란 듯이 아비게일의 목을 핥기 시작했다. 여자의 몸부림이라 해 봐야 닭을 잡을 때 날개를 퍼덕이는 수준이지.
암탉의 날개 두 쪽을 단단히 잡은 데이모스가 가늘고 여윈 목을 잘근잘근 씹어 댔다. 그러고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뻣뻣해서 맛이 없어.”
나이젤은 충격으로 말을 잃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그저 입술만 달싹일 뿐이었다.
입을 뻐끔거리는 모양을 보아하니 너도 아직 맛본 적이 없나 보지. 데이모스가 바닥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오늘 밤 야들야들하게 만들면 좀 더 맛있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