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작은 불안
에우로스는 여태껏 그냥 에우로스였다. 데본셔 공작의 아들이었지만 그의 이름 뒤에는 캐번디시라는 성이 붙지 않았다.
그는 그 성을 바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차피 후계자도 되지 못하는 마당에 가문의 일원이 되면 의무와 책임만 뒤집어쓰게 되기 때문이었다.
리던에서 돌아온 에우로스는 이제 에우로스 캐번디시가 되었다. 의무와 책임을 뒤집어썼지만 여왕의 형벌은 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프시케 스튜어트와 결혼했다. 그것으로 캐번디시가 될 이유는 충분했다.
데본셔 공작은 에우로스와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그동안 준비했던 입적 서류를 들고 법원으로 향했다. 대귀족인 그가 입김을 불어넣자 에우로스의 입적 절차는 날치기를 방불케 할 만큼 재빨리 처리되었다.
이에 에우로스는 서류를 넣은 지 하루 만에 캐번디시의 성을 받았다. 여왕의 방해를 사전 차단하기 위해 긴급하게 일을 진행시킨 결과였다.
그리하여 데본셔 공작의 장자, 에우로스 캐번디시는 프시케 스튜어트와 결혼시키기 위해 여왕이 내건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었다. 실로 모두가 만족한 결말이었다. 여왕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앤 여왕은 약 냄새가 희미하게 떠도는 그녀의 침실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당장이라도 일어나 노발대발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이미 스틱스 강을 오가는 뱃사공의 손을 잡은 상태였다. 얼마 후면 완전히 배 위에 올라탈 것이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야 했다.
그래도 어깃장은 한번 놓고 싶었기에, 여왕은 신의 가호도 없이 그레트나 그린에서 대장장이의 주재로 결혼한 에우로스와 프시케의 혼인이 유효하지 않다며 쌕쌕거리는 숨과 함께 이의를 제기했다.
그 이의는 제법 합당했다. 하지만 늦었다. 그녀가 데본셔 공작을 불러올리려던 그때에, 에우로스와 프시케는 신의 가호 아래 있었다. 이번에는 여왕의 참패였다.
“혼인 미사를 집전해 주십시오.”
에우로스는 채스웍 하우스에 돌아오자마자 더비셔 교구의 신부를 찾았다. 신부는 에우로스와 그의 아내가 그레트나 그린에서 결혼했다는 말을 듣자 티 나게 불쾌해했다.
신의 뜻으로 성스럽게 치러야 할 결혼을 그런 식으로 해결했다는 걸 잉그린트 국교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었다.
그래서 에우로스는 혼인을 집전하지 않겠다며 버티는 고고한 신부에게 엄청난 액수의 교구 헌납금을 내밀었다. 그것이야말로 잉그린트 국교회에게 그가 보이는 가장 신실한 믿음이었다.
그 신실함을 알아본 신부는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으로써 드디어 ‘신의 가호 아래 결혼’이라는, 여왕이 내건 마지막 조건이 완전하게 충족되었다.
이번에도 클라리사가 원하던 리던 대성당의 돔과 멀리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결혼식에 없었다. 그렇지만 클라리사는 모든 걸 이룬 기분이었다. 프시케의 남편이 더 이상 성이 없는 사생아가 아니라 공작의 어엿한 진짜배기 아들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프시케 캐번디시라니. 아무리 스코틀린 시골에 살았어도, 캐번디시라는 성을 모르지 않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잉그린트, 아니, 브라이튼에서 제일가는 귀족이 데본셔의 캐번디시였다. 그래서 여왕의 전령이 왔을 때 머리끝까지 화가 나기도 했지만 내심 솔깃해하기도 했다.
프시케가 후계자인 데이모스 캐번디시와 예정대로 결혼했으면 공작부인까지 되었을 테지만, 그에 대한 질 나쁜 소문들 때문에 늘 조마조마하던 차였다. 공작저의 하녀들이 떠드는 소문만 들어도 얼마나 속이 터지던지.
클라리사가 보기에 에우로스는 잘생긴 데다 여성 편력도 없고 돈도 많으니 좋은 신랑감이라 할 만했다. 어쨌거나 데이모스보다는 나았다.
게다가 프시케를 대하는 태도도 마음에 들었다. 마치 진짜 좋아하기라도 하는 듯 굴고 있었으니까.
단지 하나 아쉬웠던 것은 신분이었는데 이제 그 신분도 해결되었다. 먼 길을 돌아왔지만 어쨌든 프시케는 대귀족 가문의 일원이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모든 게 다 좋았다. 완벽했다.
클라리사가 손등으로 눈물을 찍어 내고 있는 동안 에우로스와 프시케는 또다시 부부가 되었다. 이번에는 잉그린트 법이 인정한 부부였다.
잉그린트와 스코틀린 양쪽에서, 신과 속세의 인정을 동시에 받은 두 사람이 채스웍 하우스의 가족 예배당을 나섰다. 손을 꼭 맞잡은 채였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더비 백작부인이 중얼거렸다. 그 옆에 선 사무엘이 힐끔거리며 물었다.
“무엇을요?”
“자네는 내내 에우로스 옆에 있으면서 몰랐단 말이야?”
“그러니까 뭘요?”
“저 둘이 결혼할 거라는 것.”
사무엘은 입을 비죽 내민 채 백작부인을 보았다. 무슨 예언가도 아니고, 그걸 제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꼭 일이 다 끝난 다음에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 그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에우로스와 프시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더비 백작부인은 채스웍 하우스에서의 티타임을 떠올렸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간중간, 아이들이 하는 실뜨기 놀이처럼 이리저리 얽혀 들던 두 사람의 시선을.
나이를 먹을수록 눈은 어두워지지만 눈치는 밝아진다. 그녀는 사무엘과 더불어 에우로스를 꽤 아꼈다. 그래서 그 복잡한 시선이 가리키는 방향이 달갑지 않았다.
세상에 별의별 일이 다 있다지만, 그래도 이복형제와 결혼할 여자를, 남편의 이복형제를 좋아하는 일들은 용인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여왕의 명령을 어기는 행위이기도 했다.
사실, 에우로스가 다 늙은 그녀에게 프시케 스튜어트의 샤프롱 노릇을 부탁했을 때 수락했던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프시케 스튜어트가 마음에 들기도 했고, 채스웍 하우스의 정원을 들락거리게 해 주는 에우로스에게 고마운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그 둘의 마음을 중간에서 막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알아채기라도 하면 낭패였다. 더비 백작부인은 살면서 한순간의 선택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았다.
도박에 처음 발을 들인 선택 때문에 인생을 낭비한 제 남편도 그랬고, 순진하게도 그를 사랑했던 어린 날의 자신도 그랬다.
평소 같았으면 그저 남의 일이려니 생각하고 더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 끝끝내 오지랖을 부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게 에우로스가 저에게 샤프롱을 부탁했을 때였다. 그때 그는 데이모스의 부상으로 제가 대신 프시케를 에스코트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니 자신이 나서야 했다. 프시케를 철저하게 감싸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것. 그들이 아직 완전히 스스로의 감정을 깨닫지 못했을 때 해결하는 것. 그것이 노부인이 샤프롱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한 결심이었다.
“이만 돌아가죠.”
프시케의 데뷔탕트 무도회가 있던 밤, 자정이 채 되기도 전에 에우로스는 환히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대답을 들을 마음도 없다는 듯 먼저 몸을 돌렸다.
프시케는 당황했고, 하르모니아는 황당해했지만, 백작부인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내심 안도했다.
혼란과 자각.
차라리 그게 나았다. 자각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감정을 부풀려 미래를 망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었다.
그래서 에우로스가 곧바로 채스웍 하우스로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멈추는 것도 용기이고, 회피도 때에 따라서는 최선의 방어 수단이 되기도 하니까.
그러나 에우로스가 리던의 백작저로 보낸 서신을 받고 노부인은 제 눈을 의심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가 쓰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프시케가 채스웍 하우스에 머물고 있으니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부디 방문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또, 그들이 그레트나 그린에서 결혼했다는 말이 덧붙여져 있었다. 이번에는 더비 백작부인이 혼란에 빠질 차례였다.
에우로스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노부인은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부모도 조부모도 아니었지만, 그래서 그녀에게는 어떤 자격도 없었지만, 그래도 이해해 보고자 채스웍으로 향했다.
그러나 프시케로부터 전해 들은 이 결혼의 내막이 단숨에 백작부인의 마음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이해를 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프시케는 그녀답게 추측한 내용은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사실만을 말했다.
그저 데이모스와 가면무도회에 참석했고,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여 함께 자리를 옮겼고, 그가 밖으로 나간 사이에 침입자가 있었으며, 그때 에우로스가 등장해 구출해 주었다는 간단한 이야기였다.
그 말만 들어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는지는 뻔했다. 더비 백작부인은 데이모스 캐번디시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몇몇 자리에서 본 적은 있었다. 그녀가 데이모스에게 받은 인상과 사교계에 떠돌아다니는 소문의 내용은 일치했다.
그 관록으로 이 일이 데이모스가 벌인 짓임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결혼하기는 싫고, 여왕의 말을 거역하기는 무섭고. 만만한 게 프시케 스튜어트이니 그녀를 더럽혀 결혼을 무력화하고 싶었겠지.
곧바로 경시청으로 달려가 폭로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그 사실이 알려졌을 때 가장 난처해지는 사람은 프시케 스튜어트일 거라는 생각이 퍼뜩 스치자, 그녀는 챙겨 들었던 웃옷을 내팽개쳤다.
늘 그렇지. 이런 일은 피해자만 불리하다. 여왕이 다스리는 나라인데 여자들의 인생은 달라지는 게 없었다.
데이모스의 존재는 앞으로도 이 부부가 걸어갈 길에 돌부리처럼 채일 것이다. 지금은 비록 데본셔 공작이 그 아들을 군대에 처넣었다지만, 언제든 다시 빼 온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대단한 데본셔의 소공작이니까.
그리고 속 좁은 데이모스 캐번디시는 제가 한 짓은 까마득히 잊고 에우로스에 대한 억울함과 복수심에 불타 돌아올 것이다. 그건 굳이 예상할 필요도 없는, 너무나도 뻔히 보이는 앞일이었다.
모든 장애물을 넘어 에우로스와 프시케는 신의 가호 아래 혼인 서약을 했다. 여왕의 터무니없는 명령과 둘의 마음과 프레이아와 데이모스의 협력 덕분이었다.
언젠가는 돌부리에 차여 아픔에 눈물 흘릴지언정, 지금 그들이 손을 잡고 걷는 예배당 앞 작은 오솔길은 폭신했다. 멀리 두 갈래 길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