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57)화 (57/146)

57. 세 명의 남자

하르모니아가 쓰는 소설의 여주인공, 인디아나의 주위에는 세 명의 남자가 있다.

그녀와 결혼할 돈 많고 지체 높은 델먼, 그녀의 감정을 마구 흩트리는 레이몬드, 그리고 한결같은 태도로 그녀의 곁을 지키는 레이프.

그 세 남자가 탄생한 배경에는 황금화살 클럽이 있었다. 하르모니아는 남성 전용 클럽을 몰래 드나들며 엿들었던 대화들로 세 남자의 뼈대를 세우고, 그녀만의 상상력으로 그들의 살을 빚었다.

한편, 하르모니아의 주위에도 세 명의 남자가 있다.

먼저, 하르모니아에게는 정략혼 상대자가 있었다. 완전하게 결정된 상태는 아니지만 데본셔 공작과 태번의 왕이 합당한 이해관계를 맺으면 그녀의 약혼도 곧 가시화될 예정이었다.

태번의 왕자 중 하나인 카드모스는 하르모니아에게 아직은 먼 미래의 사람이었다. 잉그린트보다 여성의 지위가 더 낮은 태번이라는 국가의 특수성을 고려했을 때, 카드모스가 어떤 사람일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았다.

하르모니아가 결혼하고 나면 그에게 예속되어 수많은 아이를 낳고 잠시 잠깐의 외출도 허락받아야 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태번의 다른 여자들이 그러하듯이.

그리고 하르모니아에게는 짝사랑하는 상대가 있었다. 그는 조지 샌드의 후원 제안을 수락함으로써 그녀와 특수한 관계가 되었다. 프레데릭은 조지가 하르모니아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하르모니아는 그가 눈치채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렇게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주는 자와 받는 자, 깨달은 자와 회피하는 자 사이의 위태위태하고 아슬아슬한 감정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하르모니아는 흠결 없는 신부가 되기 위해 프레데릭에 대한 허기와 갈증을 억누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르모니아의 주변에는 이복 오빠의 가장 친한 친구, 사무엘이 있었다. 사무엘은 스태포드 남작저보다 데본셔 공작저에 머무르는 시간이 훨씬 긴 사람이었다. 그만큼 에우로스와 절친했고, 그와 대부분의 일을 공유했다.

그런 사무엘이 유일하게 에우로스와 공유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그의 마음과 시선이 향하는 방향이었다.

사무엘은 늘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었지만, 그의 연애는 시작하기도 전에 늘 실패로 끝났다. 에우로스는 사무엘이 연애를 그르치는 이유로 눈치 없는 성격을 꼽았다.

그런 면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무엘의 호방하고 낙천적인 성격이 그 단점을 다 가려 주는 것만 봐도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하르모니아 캐번디시. 데본셔 공작가의 영애. 그녀가 이유였다.

사무엘 스태포드는 열두 살에 데본셔 공작저를 처음 방문했다. 공작의 사생아가 저와 동갑이고, 그래서 그 사생아의 동문수학할 친구로 제가 선택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가 느꼈던 감정은 거부감이었다.

데본셔 공작 가문에는 비할 수 없지만, 그도 엄연한 귀족의 자제였다. 그런 그가 사생아의 친구가 된다는 걸 한 번에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사생아가 자신의 친구가 되었으면 되었지, 그 반대가 된 상황이 너무나 짜증 났다. 그래서 그는 공작저로 가는 마차 안에서 내내 죽상이었다.

그러나 공작저에 도착한 이후 사무엘의 태도는 급변했다. 그곳에서 만난 하르모니아 캐번디시 때문이었다.

옅은 금발을 수십 갈래로 가닥가닥 나누어 하나하나 작은 리본으로 장식하고 달려 나온 말괄량이 여자아이가 그의 눈엔 너무 귀여웠다. 그 여자아이가 데리고 나온 작은 강아지도. 스태포드 남작저에 있는 제 막내 여동생도 이 정도로 귀엽진 않았다.

그래서 사무엘은 기꺼이 에우로스의 친구가 되었다. 늘 안고 다니는 흰 강아지를 닮은, 볼이 토실토실한 꼬마 여자애랑 놀아 주기 위해서. 동기는 불순했지만 에우로스는 사무엘이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았다.

그때는 사랑이 아니었다. 그때 그의 감상이란 너무 귀여운 존재를 보면 빠져드는, 단지 그런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점점 자랐다. 문제는 몸만 자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사무엘은 몸과 함께 마음까지 키웠다.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다.

계속 몰랐어야 했다. 그러나 사무엘은, 얼마 전 드디어 오랜 시간 동안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린 제 마음을 깨달아 버렸다.

“사무엘!”

어느 늦은 저녁, 사무엘이 황금화살 클럽에 막 들어서려던 참이었다. 클럽 앞에 마차 한 대가 서 있었고, 그 안에서 하르모니아의 목소리가 자신을 불렀다.

이 시간에 이런 곳에 여성이, 그것도 미혼 여성이 있다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마차에 올라탔다. 여동생을 단속하는 마음으로 단단히 훈계를 할 작정이었다.

“어…….”

그러나 사무엘의 입에서 나온 것은 훈계가 아닌 탄식이었다. 분명히 저를 부른 것은 하르모니아의 목소리였는데 제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그녀가 아니었다.

“나야, 사무엘.”

남자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아니, 남자가 아니고, 여자였다. 여자이고, 그 목소리는 하르모니아의 것이었다. 사무엘이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대체 무슨…….”

당황한 사무엘의 눈앞에서 하르모니아가 콧수염을 잡아뗐다. 독한 접착제 때문에 코 아래의 피부가 발긋발긋했다.

“깜박 속았지?”

그녀가 크게 웃었다. 천방지축인 것은 알았지만 이런 행동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사무엘은 괜스레 화가 났다.

“왜 남자 옷을 입고 있는 거야, 하르모니아?”

그의 물음에 하르모니아는 즐거워하며 대답했다.

“그렇게 몰아붙이지 마. 에우로스의 허락을 받고 온 거니까.”

“에우로스가 허락했다고?”

사무엘도 이번만큼은 에우로스를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제 여동생을 남장시켜 남자들만 드나드는 사교 클럽에 들여보내는 오라비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에우로스는 틀에 박힌 것처럼 살다가도 가끔 이렇게 정신 나간 짓거리를 할 때가 있었다.

“내가 부탁했어.”

“왜? 뭘?”

“이건 아직 에우로스밖에 모르는 거긴 한데, 어차피 에우로스가 알면 사무엘도 언젠가는 알게 될 테니까 내 입으로 말하는 거야.”

하르모니아가 목소리를 낮추고 거의 속삭이듯 빠른 속도로 말했다. 사무엘은 귀신에 홀린 듯이 귀를 가까이 대고 뒷말을 기다렸다.

“나, 소설을 쓰고 있어. 클럽에는 소재를 찾으러 온 거야.”

“소설?”

그녀의 고백에 사무엘은 다시 한번 놀라야 했다.

남장에 이어 소설이라니. 잉그린트 제일가는 가문의 영애가 소설을 쓴다고 하면 모두가 한 번씩 입을 놀릴 것이다.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

“비밀이니까, 꼭 지켜 줘야 해. 지금은 에우로스만 알아. 여기 오면 난 바로 위층 특별실로 올라가서 다른 사람들과 마주칠 일도 없어.”

“대체 소설은 왜 쓰는 건데?”

“그냥.”

“그냥이라고?”

“그럼 안 돼?”

하르모니아는 그 말을 하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때 사무엘은 유쾌함에 가려진 다른 감정을 읽었다.

그건 열기였다. 그녀가 온갖 대단한 사교 활동을 하면서도 보여 주지 않던 뜨겁고 내밀한 진심.

사무엘은 붉어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신사복에 가려진 여자. 유쾌함에 가려진 열기. 갑자기 그의 가슴이 박동하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한동안 그는 고민했다. 자신의 취향이 유별난가. 에우로스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불쾌했던 걸 보면 그건 아닌데, 왜 신사복을 입은 하르모니아를 보며 가슴이 뛰었을까.

그리고 또 고민했다. 사무엘은 전형적인 잉그린트의 사내였다. 셰익스피어의 연극 중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좋아하며, 유순하고 순종적인 여성을 아내로 맞고 싶어 하는 그런 남자 말이다. 그런데 왜 그 열기에 얼굴이 화끈거렸을까.

시간이 지나자 그는 결론을 내렸다. 그건 신사복 때문도, 열기 때문도 아니었다. 하르모니아를 향한 제 마음 때문이었다.

여태껏 깨닫지 못했지만, 이제야 깨달아 버린 마음. 아주 어릴 적에 보았지만 사라졌던, 그러나 지금 다시 터트린 그 밝은 웃음이 만든 각성이었다.

“소설은 잘 쓰고 있어?”

사무엘이 물었다. 그의 앞에서 하르모니아가 커다란 책상에 코를 박을 기세로 글쓰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응, 나쁘지 않아.”

그녀는 웃으며 깃펜을 거치대에 정리했다. 오늘따라 글이 술술 써지는 느낌이었다. 벌써 종이 수십 장이 글자로 빼곡했다.

“인디아나는 어떻게 됐어?”

“뭐가?”

“그 여주인공 말이야. 연애 사업이 어떻게 되고 있냐고.”

하르모니아는 ‘연애 사업’이라는 말에 눈을 흘겼다. 질색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사무엘은 하하 웃었다.

“음, 레이몬드에 대한 마음을 깨닫고 있는 중이야.”

“그 답 없는 낭만주의자?”

사무엘의 말에 하르모니아가 크게 웃은 뒤 대꾸했다.

“낭만주의자. 그렇긴 하지. 그래도 멋있잖아. 애수와 우수에 젖은 사내. 여자라면 모두 그런 남자와 한 번쯤 사랑을 꿈꾼다고.”

그녀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사무엘은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곤 다시 물었다.

“레이프는 언제 자기 마음을 알게 돼?”

“음, 벌써 알고 있어. 그러나 인디아나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거지.”

“왜 다가갈 수 없는데?”

“인디아나의 몸은 델먼에게 매여 있고, 마음은 레이몬드에게 흐르고 있으니까.”

하르모니아가 양팔을 위로 뻗어 쭉 기지개를 켰다. 남들이 보면 기겁할 일이었지만, 둘은 어릴 적부터 남매처럼 알고 지내던 사이였으므로 그녀의 행동은 스스럼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무엘도 기겁하게 되었다. 위로 팔을 뻗느라 자연스레 앞으로 내밀어진 가슴과 잘록한 허리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는 급히 시선을 돌리고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사무엘, 어디 아파?”

하르모니아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사무엘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인디아나는 아직 레이프의 마음을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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