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56)화 (56/146)

56. 믿을 수 없는 일

황금화살 클럽의 문이 열렸다. 그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바람을 함께 몰고 왔다. 그 바람을 맞아, 가운데 매달린 황금화살 장식이 쩔그렁거렸다. 대낮인데도 실내는 어둑했고, 신사들이 피워 올린 시가 연기와 초가 흘려보낸 연기가 뒤섞여 안개처럼 맴돌았다.

에우로스가 거침없이 클럽의 중앙, 붉은 벨벳 의자가 놓인 곳으로 향했다.

“오랜만입니다, 고든레녹스 부인.”

등 뒤에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리자 프레이아는 비스듬했던 자세를 바로 세웠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포도주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잔을 살짝 물어 입매를 살짝 끌어 올린 후 제 뒤에 선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곱게 눈웃음을 보냈다.

“이게 얼마 만인가요, 에우로스.”

에우로스가 환히 웃었다. 떠돌아다니던 시가와 양초 연기가 그 웃음에 모두 쓸려 나가고, 오로지 그 아름다운 얼굴만이 번쩍였다.

프레이아는 에우로스가 프시케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데이모스를 꼬드겨 그로 하여금 촌스럽고 주제넘은 프시케 스튜어트를 치워 버리도록 종용했다. 역겨운 대가까지 운운하면서.

그러나 그녀는 일이 성공했는지 여부도 아직 듣지 못했다. 아레스 캐번디시 데본셔 공작은 매우 철두철미한 성격이었고, 프시케 스튜어트가 사라진 직후 공작저 사용인들의 출입을 금하고 입을 막았다. 데이모스를 포함해 가족들의 서신 수발도 전부 가로막혔다.

그리하여 가면무도회가 있은 지 일주일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프레이아는 모든 경우의 수를 가정하며 향후 대처를 고민했다. 데이모스가 실패한 뒤 허튼소리를 한다면 자신은 전혀 몰랐던 일이라며 발뺌할 작정이었다.

어차피 밀실에서 만났고, 그 안에서 무슨 소리가 오갔는지 아는 사람은 그녀와 데이모스 단둘뿐이니까.

성공하면 좋지만, 실패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쪽이든 프레이아가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실패한다면 프시케 스튜어트와 데이모스 캐번디시는 예정대로 결혼하게 되고, 에우로스가 아무리 그녀에게 호감이 있다고 해도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을 것이었다. 에우로스는 의외로 그런 일에 결벽적인 성격이므로 부러 문제를 만들지 않을 것임을 프레이아는 알았다.

사람들은 금방 끓고 금방 식었다. 프시케가 두문불출하자 새로이 탄생한 사교계의 여왕이라며 호들갑을 떨던 분위기도 쉬이 꺼졌다. 그리고 찬사의 대상은 다시 프레이아가 되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러므로 아무도 모르는 일로 조용히 묻으면 그뿐이었다. 그리고 여태껏 살아오던 대로 계속 살면 될 일이었다. 여전히 건재한 사교계의 여왕으로.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그가 신사모를 벗어 왼손에 든 채, 황금빛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다정한 말투로 물었다. 여전히 예쁜 웃음이 입가에 매달려 있었다. 그런 에우로스의 모습을 보자 프레이아는 초조해졌다.

저 웃음은 가짜다. 모든 것을 녹일 듯 따스하게 웃고 있지만, 프레이아는 그 뒤에 숨긴 무정함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에우로스는 프레이아가 손톱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모습을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모습은 에우로스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천하의 프레이아 고든레녹스가 어린아이처럼 손톱을 물고 있는 꼴을 보니 뒤틀렸던 심사가 조금은 가라앉았다.

“나야 언제나 똑같지요. 채스웍 하우스로 갔다더니, 언제 다시 돌아온 건가요?”

프레이아는 말하다 말고 제풀에 놀라 입에서 손가락을 뗐다. 엄지손톱의 끝이 다시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오늘 아침 일찍 왔습니다.”

“이번에는 리던에 오래 머물 건가요?”

“며칠 뒤 다시 가 보아야 합니다.”

에우로스의 대답에 프레이아는 실망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것이 오래전부터 그들 사이의 불문율이었다. 친구처럼, 투자자처럼.

그러니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에우로스가 그랬듯 프레이아도 늘 가면을 쓰고 그를 대해 왔다.

“사업을 생각하면, 리던에 있는 편이 더 낫지 않나요?”

하지만, 그래도 한 번은 붙잡고 싶었다. 사업을 핑계로 대어, 그렇게라도 에우로스가 가까이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사업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더 중요한 일이요?”

에우로스의 인생에 사업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다. 그는 맹렬하게 일에 몰두해 왔고, 그 외의 것들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프레이아는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곳에 제 아내가 있습니다.”

“……그게 무슨?”

프레이아가 들고 있던 포도주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카펫 위로 떨어진 잔의 입구에서 진한 핏빛 액체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두꺼운 카펫이 미처 머금지 못한 술이 프레이아의 고급 실크 실내화를 적셨다.

에우로스는 손을 들어 매니저를 불렀다. 매니저가 다급히 다가와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프레이아의 신발을 벗기고 다른 실내화를 내어 주었다. 카펫에 고인 술도 말끔하게 닦아 냈다.

그 모든 일들이 비현실적이었다. 프레이아는 굳어 버린 소금인형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놀라셨군요.”

에우로스의 말에 그녀가 화들짝 놀라 눈을 깜박였다. 그 깜박임을 따라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눈물의 흔적을 따라 단단했던 소금의 표면이 녹아내렸다. 친구의 모습으로 위장한 가면이 벗겨지고 그 안에 잘 숨겨 두었던 여자가 나타났다. 프레이아는 황급히 눈 아래를 쓸었다.

“아내라면, 결혼을 했다는 건가요? 에우로스 당신이?”

“그렇습니다.”

에우로스는 자신 때문에 눈물을 흘린 여자 앞에서도 담담했다. 그 담담함 때문에 프레이아의 마음은 더욱 요동쳤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러자 정지되었다가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 사고 회로를 타고 여러 감정들이 내달렸다.

“왜죠? 결혼할 생각 따위 없다고 했잖아요.”

“보통은,”

에우로스가 쏟아지는 프레이아의 질문을 저지했다.

“축하를 먼저 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

그 말에 프레이아는 입을 다물었다. 제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 그러면서도 축하를 바라다니, 에우로스는 정말이지 잔인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누구와 결혼을 했는지 묻는 것이 두 번째 아니겠습니까?”

프레이아의 희고 투명한 피부에 열이 확 올랐다.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았다. 누구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걸 물어보면 정말로 제 추측이 현실이 될 것 같아 질문하고 싶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아요.”

“아니, 들으셔야 합니다.”

“……프시케, 스튜어트, 인가요?”

프레이아의 새빨간 입술이 프시케의 이름을 끊어진 숨처럼 뱉어 냈다. 그러자 에우로스가 눈부시게 웃었다.

저 표정을 알고 있다. 차가운 겨울날, 꽝꽝 언 나무에 피어난 얼음 결정 같은 웃음. 싱그럽고 아름다워 손을 대면 한기에 살갗이 들러붙고 종래에는 피부가 찢어져 나가게 하는 그 매력적인 웃음.

“잘 알고 계시는군요.”

“어떻게, 어째서…….”

“모두 그대의 덕입니다, 프레이아.”

“그게 무슨 말이죠?”

“그대가 데이모스와 벌인 재미있는 일 덕분에 제 마음을 깨달았거든요.”

에우로스의 말에 프레이아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에우로스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과 데이모스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고 있는 걸까. 사실은 제대로 아는 게 없는데 짐작으로 빙빙 돌리며 저를 떠보는 것은 아닐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재미있는 일이라니요?”

하지만 제 입으로 인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프레이아는 안색을 바꾸었다. 그녀의 얼굴에 다시 자연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속눈썹을 느리게 깜박이자 자색 눈동자에 여유가 찼다.

“어쨌든, 이제는 상관없습니다. 오랜 친구에게 결혼 소식을 전하러 온 것이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처리할 일도 있고, 곧 다시 긴 여행을 해야 하니까요.”

에우로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역시 프레이아 고든레녹스는 강적이었다. 그러나 무적은 아니었다. 그녀를 적으로 돌릴 이유가 없어 그간 봐주고 넘겼을 뿐, 자신을 적으로 돌리면 천하의 프레이아 고든레녹스도 앞으로 저따위 여유를 부릴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모른 척하겠다니 일단 자신 또한 모른 척해 줄 셈이었다. 당장 그녀에게 달려들어 보복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데본셔 공작 가문에 입적함으로써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되었다. 데이모스 캐번디시는 당분간 리던에 발도 붙이지 못하고 오물 위를 구를 예정이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언젠가 필요할 때 프레이아를 죌 목줄로 삼는 것이 유리했다. 이미 에우로스는 프레이아에게 더 이상 가혹할 수 없는 형벌을 주었다. 그의 결혼 소식은 당분간 프레이아의 열 손가락 끝에 상처를 낼 것이고, 그 상처는 곱게 아물지 못할 거다.

사무엘은 가끔 제가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논다고 비난하곤 했다. 그러나 에우로스는 마음을 함부로 주고, 그 마음에 책임지지 못하는 쪽의 잘못이지, 제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그 생각은 프레이아 고든레녹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에우로스, 잠깐만요.”

프레이아는 벌떡 일어났다. 품위를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클럽 안에 있던 몇몇 신사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무슨 일입니까?”

등을 돌려 나가려던 에우로스가 제 소매를 쥔 프레이아의 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그가 다시 웃었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힘이 스르르 풀렸다.

“아니, 아니에요.”

그러자 에우로스는 더 말하지 않고 곧바로 황금화살 클럽을 나섰다. 문이 세게 열렸다가 쾅 닫혔다. 동시에 프레이아의 시공간도 그 문을 통해 옮겨졌다.

진한 장미 향기가 주위에 뻗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의 소매를 움켜쥐었던 손가락이 장미 가시에 찔린 듯 욱신거렸다. 프레이아는 데뷔탕트 무도회를 앞두고 그에게 마음을 내보였던 데본셔 공작저의 장미 정원에 다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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