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사건의 해결
에우로스가 데본셔 공작의 집무실로 성큼성큼 발을 내디뎠다.
“기다렸다.”
용서를 구하는 애타는 표정도 아닌, 설명을 하려는 절실한 표정도 아닌, 무심한 얼굴로 들어서는 아들을 보고 공작이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셨습니까.”
에우로스의 말투는 딱딱했지만 태연하기도 했다. 공작은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사죄해야 하는 것 아니냐.”
“무엇에 대한 사죄입니까?”
공작이 헛,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이놈은 이렇지. 일을 쳐 놓고는 수습할 능력도 없어서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제 앞에서 달달 떠는 데이모스와는 질적으로 다른 인간이 에우로스였다.
“갑자기 프시케 스튜어트와 결혼이라니 어떻게 된 일이냐?”
그래서 공작은 일단 여왕과의 일은 미뤄 두고 제일 궁금한 것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데이모스에게서 프시케 스튜어트를 구출한 것까지는 어떻게든 납득했다. 그러나 구출 후 작전이 그레트나 그린에서의 결혼이었다는 것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이해되지 않았다.
“일전에 도움받은 적이 있어서 갚았을 뿐입니다.”
“결혼으로?”
“예.”
에우로스는 굳이 공작에게 제 마음을 고백할 생각 따위 하지 않았다. 적당한 말로 대꾸하고 이후의 질문을 차단하면 그뿐이었다.
한편, 그의 대답을 들은 공작은 더 의아해졌다.
도움에 대한 보답을 결혼으로 한다는 것이 애초에 말이 되는 것인가? 에우로스는 받은 만큼 착실히 돌려주는 사람이었다. 돈이든, 해코지든 그가 받았다면 고스란히 준 사람에게 몇 배 불려서 되돌려 주었다.
그렇다면 도움은? 도움을 받았을 때는 다른가? 어느 정도의 도움을 받으면 결혼으로 답례를 하는 거지?
데본셔 공작은 말도 안 되는 답변에 미간을 구겼다. 애초에 자신에게 결혼의 사유 따위는 말해 줄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공작은 노련하게 다른 방식으로 질문했다.
“그래서, 행복하냐?
이건 에우로스가 리던으로 오는 내내 작성했던 대본에는 전혀 없는 대사였다. 에우로스는 그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자 공작은 슬그머니 웃었다. 내색하지 않았어도 대충 돌아가는 상황이 보이는 것 같았다.
에우로스가, 저 미끈한 얼굴이 아깝게도 여자 한 번 안지 않았던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데이모스의 사생활에 대해 공작은 별말 하지 않았지만 그게 썩 마음에 들었던 건 아니었다. 그래서 에우로스가 더 돋보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행복하면 계속 더비셔에서 지낼 것이지. 여기 온 이유는?”
어쨌든 에우로스는 리던에 왔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에우로스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왔다는 건 공작도 알았다.
여왕은 자존심이 하늘 끝에 매달려 있고 자존감은 바닥으로 처박혀 있는 여자였다. 그렇기에 쉽게 이 사태를 종결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에우로스의 기지가 필요한 것이다.
공작은 에우로스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어쩐지 조금 기대가 되었다. 잘난 제 아들은 어떤 해답지를 들이밀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 봐야 돈이든, 정보든 무언가를 싸 짊어지고 여왕을 알현한 뒤 물물교환식으로 이 일을 해결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겠지만.
“가문에 입적시켜 주십시오.”
에우로스의 말에 공작은 어리둥절해졌다. 그건 제가 기대한 답변이 아니었다. 도둑 결혼에 대한 여왕의 선처에 대한 말이 나왔어야 했다.
“이제 와서?”
“그렇습니다.”
“내가 말할 때는 듣지도 않더니, 왜 갑자기? 그럴듯한 성이 없는 것이 프시케 스튜어트에게 부끄럽더냐?”
사실, 데본셔 공작은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
에우로스가 제발 저에게 캐번디시의 성을 달라고 달려드는 것. 물론 에우로스는 지금 매우 꼿꼿한 태도이긴 하지만, 그가 이제라도 자랑스러운 캐번디시의 일원이 되고 싶어 한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 상황에 그런 부탁을 하느냔 말이다. 다른 이유도 아닌, 프시케 스튜어트에게 잘 보이려고 그런 거라면, 공작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어째서지?”
“이번 일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욕심은 없습니다.”
프시케 스튜어트는 에우로스가 사생아라는 것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싫어하지도, 동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캐번디시라는 성을 주지 못해도 그녀는 상관없어할 것이다. 게다가 에우로스 자신도 캐번디시라는 성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프시케와의 결혼으로 갤러웨이 백작위는 저에게 수여될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에우로스 스튜어트 백작과 프시케 스튜어트 백작부인으로 살아가면 그뿐이었다. 작위를 세습하기 위해서는 앤 여왕의 승계 허락이 있어야 하겠지만, 급한 것이 아니니 여왕의 사후에 해결하면 될 일이었다.
“이번 일을 해결하는 것과 입적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냐?”
“제가 입적하면 데본셔 공작가의 장자가 됩니다. 후계자는 데이모스지만, 장자는 분명히 저입니다.”
그 말을 듣자 공작은 갑자기 우중충했던 세상이 확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며칠간 더부룩하던 속이 뻥 뚫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급하게 서랍 안에서 여왕의 전령이 전해 주었던 혼인명령서를 꺼내어 들었다.
[데본셔의 캐번디시 공작가와 갤러웨이의 스튜어트 백작가의 혼인을 명한다.
두 가문의 장자와 장녀는 금년 내 신의 가호 아래 결혼함으로써 충성을 증명하라.]
‘두 가문의 장자와 장녀’, 어디에도 ‘적자’나 ‘후계자’라는 말이 없었다.
“입적했으니 캐번디시의 성을 가지고 있고, 장자가 되며, 금년 내에 결혼했으므로 조건은 모두 충족하게 됩니다. 그레트나 그린에서 결혼한 것이 걸리지만, 필요하면 채스웍 하우스에 신부님을 불러다 약식으로 식을 한 번 더 치르면 되니 그것도 별문제는 되지 않을 겁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돈으로 여왕을 구슬릴 필요도, 정보로 여왕을 회유할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바라 마지않던 에우로스의 입적까지 한 번에 다 해결했다.
데본셔 공작의 얼굴에 진한 웃음이 퍼졌다. 이렇게 간단하고 손쉽게, 작은 손해도 보지 않고 여왕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니, 이건 에우로스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에우로스는 장사꾼의 머리를 타고나 귀족적으로 문제를 정리해 버렸다. 정말이지 기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여쭈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뭐지?”
“데이모스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기특한 아들의 말에 내려올 것 같지 않던 공작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추락했다.
에우로스는 여태까지 데이모스에게 꽤 많이 당해 주었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때는 맞아 주기도 했고, 지금은 폭언이나 비난을 묵묵히 들어 넘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인 자신에게 데이모스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그런 에우로스가 이 질문을 했다는 것은, 이번에야말로 데이모스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일종의 경고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이제 가문의 적법한 일원이 될 테니, 에우로스의 처분은 형으로서 아우에게 하는 훈육으로 용인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데본셔 공작은 자신이 일찌감치 내렸던 결단이 얼마나 타당했는지에 대해 속으로 자찬했다. 데이모스가 죽일 놈이긴 하지만 진짜 죽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에우로스는 마음먹으면 정말 데이모스를 죽일 수도 있었다.
꼭 육체를 죽여야만 죽이는 것은 아니다. 정신을 죽이는 것도 엄연한 죽음이다. 정신을 죽이는 방법은 세상에 많고, 남자도 얼마든지 그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을 아는 것이 공작과 데이모스의 차이점이었다.
“……데이모스는, 곧 군대에 갈 거다.”
공작의 말에 에우로스는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물었다.
“어디로 갑니까?”
“육군이다.”
그 대답에 에우로스는 씨익 웃었다.
잉그린트의 육군. 그곳은 지옥도를 방불케 하는 곳이었다.
브라이튼은 섬이고, 그 이유로 해군에는 모든 것이 너그러웠다. 풍족한 예산과 복지, 그리고 드높은 명예를 다 가진, 그에 상응해 무수한 공훈을 자랑하는, 세계 최강의 전투 실력을 가진 군대가 잉그린트의 해군이었다.
반면 육군은, 웬만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니었다. 귀족들이라면 더더욱 기피했다.
열악하기 짝이 없는 시설에 싸구려 음식이 나오고, 박봉을 받는 군대였다. 그래서 잉그린트의 육군은 지원자가 거의 없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억지로 가는 소수의 병사들로 채워진 곳이었다.
해군이 국위선양을 하는 곳이라면, 육군은 국내의 잡다한 치안을 주로 담당했다. 최근 잉그린트 육군이 하는 일은 스코틀린의 반군을 색출하고, 가끔 벌어지는 교전에 출정하여 총알받이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데이모스의 신분상 장교로 입대할 테니 총알받이까지는 할 필요가 없었다. 데본셔 공작도 그것을 알기에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긴 했다.
평생 대귀족의 후계자로 살아온 데이모스 캐번디시가 그러한 삶을 산다는 것은 나락으로 떨어져 뒹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가 끓는 더러운 침상에서 개죽 같은 음식을 받아먹는 데이모스의 모습을 상상하자 에우로스는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그나마도 육군 부대 내에는 군인들의 턱없이 적은 월급이라도 노리는 매춘부들이 있다고 하니, 그건 데이모스에게 좋은 일인가. 그 새끼는 어디에서든 치마 두른 사람들만 보면 눈이 돌아가는 인간이니까.
“그렇군요.”
에우로스의 웃음에 공작은 착잡해졌다. 홧김에 육군지원서를 제출해 놓긴 했는데, 요즘 마음이 약해지고 있던 차였다.
슬그머니 거두어 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으나 에우로스에게 말한 이상 다시 되돌릴 수는 없었다. 데이모스가 아무리 부족한 자식이라 해도, 에우로스의 복수에 희생되느니 군대에 처박혀 있는 편이 백배 나았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디를?”
“처리해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에우로스는 산뜻하게 걸음을 옮겼다.
공작은 처리해야 할 사람이 누군지 묻지 않았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이 소동의 기획자는 데이모스 말고도 한 명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