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소리와 갈망
에우로스는 다급히 불을 껐다. 창문에 드리웠던 커튼도 꼼꼼하게 쳤다. 적요한 어둠이 퍼지고 두 사람의 기척만이 남았다.
홀로 침대 위에 앉아 있던 프시케가 조용히 에우로스를 불렀다.
“공자님…….”
암흑 속에서 흘러오는 소리를 따라 에우로스는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두 번째 소원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웃음기 어린 그의 말에 프시케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두 번째 소원이요?”
“기억하나요? 갤러웨이 성에서 소원이 두 개 있다고 한 것.”
프시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지 않아도 그 움직임은 그대로 전달되었다. 에우로스는 그녀의 머리를 살짝 끌어와 제 어깨에 괴었다.
“그때 함께 소풍을 가자고 했던 게 첫 번째 소원이었는데.”
에우로스의 말에 프시케가 낮게 웃었다.
“소풍을 다녀오면 두 번째 소원을 말씀해 주신다고 하셨지요.”
“이제 소풍을 다녀왔으니, 말해도 되겠네요.”
“그게 무엇인가요?”
프시케는 잠시 잊고 있었던 두 번째 소원의 존재를 떠올렸다. 들어줄 수만 있다면, 기꺼이 들어주리라 생각했다. 유용할 수 있는 자금이 얼마인지도 계산했었더랬다.
“내 이름을 불러 줘요, 프시케.”
“…….”
“그때도 한번 말했던 것 같은데요. 나는 공자가 아니라고. 알다시피, 나는 데본셔 공작의 혼외 아들입니다. 그러니 공자라는 호칭은 맞지 않아요.”
프시케는 리던 공작가에서의 에우로스가 얼마나 그 호칭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는지 잘 알았다. 하지만 그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사실이었다.
“그 소원은 없던 것으로 해요.”
프시케의 말에 에우로스는 제 얼굴을 그녀 가까이 갖다 댔다. 어둠이 깊어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이름을 부르는 건, 너무 당연해서, 그러니까 그건 소원이라 칭하지 마세요. 언젠가 꼭 제게 청하실 일이 있을 때, 그때…….”
입술 바로 앞에 에우로스의 숨결이 닿았다. 당황해 더듬더듬 말을 머금어 뱉던 프시케의 입 안에 순간 낮고 부드러운 숨소리가 흘러와 고였다. 미처 끝맺지 못한 말소리들이 숨에 얽혔다가 스며들었다.
말이 사라진 자리에 생경한 소리들이 자랐다. 프시케의 레이스 잠옷이 사각거리며 들어 올려졌고, 에우로스의 옷에 달린 버클이 부딪쳐 작게 챙챙거렸다.
입술과 입술이 닿는 조금은 끈적한 소리와 매끈한 살갗을 헤집을 때마다 출렁거리는 침대 매트리스의 소리, 생경한 신음과 달래는 소리. 누구도 말하지 않고 오로지 소리로만 대화하는 시간.
그 시간은 점차 향기로 채워져 에우로스를 마비시켰다. 프시케의 향기는 여전히 달콤하고, 보드랍고, 따뜻하고, 간질거렸다. 맨살에 미끄러지는 향기는 날개를 단 나비처럼 파닥였다가 날아올랐다가 한곳에 맺혀 쉬었다.
나비의 궤적을 따라 그는 정신없이 입술을 비볐다. 혀로도 향기를 느낄 수 있다는 걸, 그는 그녀의 몸에 파묻히고 나서야 알았다.
향기가 피워 올린 열망에 프시케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나신이 부끄러워 그녀는 자꾸 고개를 돌렸다.
턱을 잡아 입술을 겹치는 에우로스의 얼굴을 조심스레 감쌌다. 보이지 않았지만 그도 떨고 있었다. 그 떨림은 뜨겁고 묵직했다. 아픔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마침내 터져 나온 말소리가 다정해 프시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슬프지도, 화가 나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자꾸 울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에우로스가 젖은 눈가를 섬세하게 핥았다. 지금 커튼을 걷고 이 눈을 보면, 밤공기가 맺은 이슬 같을까. 언젠가 프시케의 새카만 눈동자가 흘리던 투명한 눈물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 눈물이 떨어져 제 상처를 어루만졌을 때, 그때부터 그들의 미래는 준비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때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던 미래였다.
“아프지 않아요?”
에우로스는 아주 신중하고 조심스레 움직였다. 끊임없이 보듬고 쓸어 주는 손길이 아픔도 함께 매만졌다. 아픔이 풀리자 모르던 감각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파도처럼 순서대로 밀려오던 자극들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단번에 둘을 덮쳤다. 소리가, 향기가, 감촉이 두서없이 마구 솟아올라 그들을 향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거센 물살이 의식과 이성을 파괴하고 파묻혀 있던 무의식과 본능을 터뜨렸다. 불규칙한 물살의 흐름에 떠밀린 에우로스와 프시케는 서로를 꼭 안아 붙들었다.
에우로스는 지쳐 잠든 프시케를 오래도록 쓰다듬었다. 그의 어깨에 기댄 아내의 눈가에는 아직 떨어지지 못한 눈물 한 방울이 매달려 빛을 냈다. 별처럼 반짝이는, 이슬처럼 투명한 눈물이었다.
그리고 에우로스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별들 가운데 가장 곱고 가장 반짝거리는 귀한 별 하나가 그에게로 와서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잠을 자는 것이라고, 어릴 적 카듀 강변에서 했던 그 생각 그대로.
사무엘은 애초에 예언한 대로 3일 밤낮을 자고서야 방에서 기어 나왔다. 식당에서부터 달큰하고 고소한 음식 냄새가 풍겼다.
* * *
입맛을 다시며 식당으로 발을 들인 사무엘은 눈을 끔벅였다. 달큰하고 고소한 냄새가 나는 것이 음식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큰 소리를 내며 제 자리를 찾아가는 사무엘을 발견하자 프시케는 얼른 잡혀 있던 손가락을 뺐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푹 숙인 프시케를 보며 에우로스는 싱긋 웃었다.
하녀가 따라 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던 사무엘이 프시케를 향해 짓는 에우로스의 환한 웃음을 보며 잠시 멍해졌다. 원하는 것도 없고, 밀어내는 것도 아닌 웃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웃음은 가장 친한 친구인 그조차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에우로스는 단정하게 앉아 빵 한쪽에 버터를 바르며 짐짓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오늘 저와 사무엘은 리던으로 가 봐야 합니다.”
그 말을 듣자 프시케보다 사무엘이 더 놀랐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우리는 오늘 리던으로 떠날 거야.”
“왜?”
“해결 방법이 있냐고 닦달하던 걸 잊은 거야, 사무엘?”
닦달하긴 했다. 금방이라도 자신들을 처단하러 추격대가 올 것 같아 첫날에는 자다 말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깬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 겨우 피로를 풀었는데 다시 또 먼 길을 떠나야 한다니.
“그건 그렇지만, 난 지금 너무 피곤한데.”
에우로스는 숙면으로 반들거리는 사무엘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엄살 부리지 마.”
“아니, 엄살이 아니고, 나 지금 사흘 만에 먹는 제대로 된 첫 끼니라고.”
“그러니 밥 먹을 시간은 주는 거잖아. 신의 아들도 죽은 지 사흘 만에 깨어나 하늘에 올랐어. 사무엘 자네는 리던으로 가는 마차에 오르면 되겠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프시케가 눈치를 보며 끼어들었다.
“에우로스, 리던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건가요?”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프시케는 확인받고 싶었다. 꿈결 같던 3일이 지나고 눈을 뜨자 그들 앞에는 넘어야 할 산봉우리들이 여럿 쌓여 있었다.
“공작저에 들러 일을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인.”
그 말에 사무엘은 마시던 커피를 뿜어낼 뻔했다. 부인이라니. 맞는 말이긴 한데, 제가 죽은 듯 잠들어 있던 사흘 동안 저 두 사람은 아주 열렬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것 같다.
“제가, 여왕 폐하께 드릴 서신이라도 쓸까요?”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 사이긴 했지만, 어쨌든 여왕은 프시케의 먼 친척이었다. 당시의 일을 상세하게 적어 용서를 구하면 이 결혼을 허락해 주시지 않을까.
프시케의 순진한 제안에 에우로스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젓는 것은 사무엘도 마찬가지였다.
여왕은 그리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고, 한번 고집을 부리면 누구도 그녀를 이길 수 없었다. 그런 사람에게는 용서를 구할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꾸며 들이미는 것이 효과적이다.
즉흥극에도 어쨌든 결말은 있기 마련이다. 그 결말을 완성도 있게 만드는 것은 결국 배우의 역량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에우로스는 꽤 훌륭한 역량을 가진 배우였다. 그동안 써 온 수많은 대본들이, 막힘없이 욀 수 있던 빼곡한 대사들이 바로 그의 역량이었다.
“공작저에 가서 무얼 하게?”
사무엘이 조금은 풀어진 목소리로 물었다.
리던으로 다시 갈 생각을 하니 끔찍했지만, 그래도 해결하러 간다고 하니 악몽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이었다.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이제 구원을 받을 차례였다.
“공작님을 만나야지.”
“만나서 공작님께 용서를 빌면 용서해 주실까?”
에우로스가 다시 픽 웃으며 되물었다.
“내가? 용서를 빈다고?”
“그렇잖아. 일단……은, 프시케 스튜어트 영애, 아니, 음, 자네 부인은 원래 데이모스 캐번디시와 결혼했어야 했는데 지금 일이 다 어그러진 거니까.”
사무엘이 프시케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제 부인될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은 인간과 결혼시키지 않은 건, 어그러진 게 아니고 잘된 거라고 하는 거야.”
에우로스가 그의 입을 막았다.
아마 데본셔 공작도 일이 어그러졌다고 생각은 할 것이다. 그러니 수습하려고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제가 아는 아버지는 이 일에서 프시케 스튜어트의 감정 따위는 고려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므로 공작과는 오로지 여왕과 관련된 문제 해결에 대해서만 논의하면 되었다. 데이모스 캐번디시에 대한 처분은 천천히 고민해 볼 예정이었다.
“그건 그렇지만, 공작님도 그렇게 생각하실까?”
“아마 아니겠지.”
에우로스의 순순한 수긍에 프시케는 움찔 어깨를 수그렸다. 결국 그녀는 에우로스와 사무엘, 그리고 데본셔 공작에게까지 짐이 된 것이다.
짐이 되지 않으려 갤러웨이 성에서 그토록 고생하며 살았는데, 어째서 에우로스를 만난 뒤부터는 자꾸 넘어질까. 그녀는 우울한 얼굴로 손가락을 오므렸다가 폈다가를 반복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 낼 수 없는 마음이 손가락 끝에 점점이 맺혔다. 그 마음을 다시 꼭 다잡아 준 것은 이번에도 에우로스였다. 따스한 맨손이 프시케의 손가락을 꼭 잡아 힘을 주었다.
“내가 없는 동안, 더비 백작부인이 저택에 와 계실 거예요.”
에우로스가 상냥하게 말했다.
“백작부인께서요?”
프시케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그 얼굴을 보며 에우로스는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혼자 있으면 외로울 것 같아 부탁드렸으니, 부디 잘 지내고 있길 바라요.”
그러자 프시케 대신 사무엘이 대답했다.
“적어도 외롭지는 않을 겁니다. 부인의 잔소리를 듣다 보면 한나절이 뚝딱 가니까요. 너무 지루하면 디저트 접시에 그려진 장미 꽃잎 개수를 세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