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53)화 (53/146)

53. 어른이 되다

프시케는 만찬이 끝나자마자 클라리사의 재촉에 못 이겨 방으로 들어왔다. 어제는 예전에 묵었던 손님방으로 안내되었는데, 식사를 마치고 클라리사가 데려온 곳은 다른 방이었다.

“여기는…….”

프시케가 의아한 듯 실내를 둘러보았다. 클라리사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하는 중이었다.

“안주인의 방이랍니다. 아까 집사 양반이 아가씨 짐을 이쪽으로 옮기도록 했어요. 뭐, 짐도 별로 없어서 금세 뚝딱 가지고 왔지요.”

“안주인의 방?”

“네에. 이제 아가씨가 이 저택의 안주인이시잖아요.”

“…….”

클라리사의 대답을 들은 프시케는 또 얼굴을 붉혔다. 오늘따라 자꾸 뺨에 열이 올랐다.

“이제는 아가씨가 아니고 마님인데, 자꾸 제가 실수하네요.”

클라리사가 짓궂게 말을 이어 가자 프시케의 얼굴이 조금 더 빨개졌다.

“에우로스 님은 바로 옆방에서 지내신답니다.”

“그렇구나…….”

“여기 이 문, 보이시지요? 마님 방과 주인님의 방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이따가 이 문으로 들어오실 거예요.”

“누가?”

클라리사가 비죽비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자꾸 흘려 댔다. 그러고는 마치 딸을 시집보내는 비장한 어머니의 표정을 하고 프시케의 손을 잡아 침대에 앉혔다.

“당연히 에우로스 님, 아니, 주인 나리가 들어오시지요.”

프시케의 얼굴은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만큼 달아올랐다.

“마님,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저 죽은 듯이 계셔야 해요.”

프시케의 붉은 얼굴만큼이나 열정적인 얼굴의 클라리사가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차피 첫날밤에 여인이 할 일은 별로 없어요. 그저 가만히 계시다가, 주인 나리가 하시는 대로 잘…….”

“클라리사, 제발 그만해.”

안주인의 방, 클라리사의 당부, 부끄럽지만 기대되기도 하는 밤의 일들까지, 프시케는 이제야 제 결혼이 현실이었음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클라리사는 수줍어하는 프시케를 좀 더 놀려 주고 싶었지만, 더 했다가는 울어 버릴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대신 에우로스에 대한 칭찬으로 그녀의 마음을 풀어 주기로 했다.

“참, 그리고 오늘 드레스 몇 벌이 왔어요.”

“드레스?”

“주인 나리께서 낮에 나가서 준비해 오셨대요. 당장 입을 것들은 기성품으로 사 오셨고요, 내일 재봉사가 저택에 온다네요.”

클라리사는 매우 뿌듯한 얼굴이었다.

“당장 갖춰 입을 옷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하녀들이 옷 상자를 들고 줄줄이 들어오는 걸 보니 어찌나 안심이 되던지요. 생각보다 주인 나리는 괜찮은 분인 것 같아요. 이렇게 세심하게 신경 써 주시고.”

프시케는 갤러웨이 성에서 처음 에우로스를 본 클라리사가 기생오라비 같다며 투덜거렸던 걸 떠올리며 빙긋 웃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첫날밤 맞이 준비를 해 볼까요?

그리고 클라리사의 의욕적인 말에 프시케의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졌다. 붉게 물들었던 뺨이 희게 질리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 * *

프시케는 클라리사가 혼신의 힘을 다해 꾸며 준 제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았다. 레이스가 치렁치렁한 흰 잠옷에 연지를 발라 발그스름한 볼, 한쪽으로 느슨하게 땋아 내린 머리카락, 털을 세운 새끼 고양이 같은 표정.

그러나 밤이 늦도록 에우로스는 그녀의 방을 찾지 않았다. 그대로 잠들어 버렸어야 했나 조금 고민하다가, 프시케는 협탁 서랍에 넣어 두었던 열쇠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집사 제롬이 주었던 저택 열쇠였다.

온기가 가득한 방을 나서자 싸늘한 밤공기가 목덜미의 솜털을 일으켰다. 도톰한 숄을 한 번 더 고쳐 두른 뒤, 프시케는 조용조용 3층으로 향했다.

푸른 수염의 방. 채스웍 하우스에 며칠 머물렀던 기억 중에서 가장 좋았고 두근거렸던 때를 꼽자면, 에우로스와 함께 밤하늘을 보았던 그 시간이었다.

천체망원경의 렌즈처럼 볼록하게 굴절되어 눈앞에서, 그리고 귓가에서 확대되던 에우로스의 얼굴과 목소리. 무수한 별자리들 중 작지만 확실하게 빛나던 화살자리의 존재.

에우로스는 천체망원경 덕분에 세상의 주요한 관념들이 뒤바뀌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밤, 천체망원경이 뒤바꾼 것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프시케 스튜어트는 데이모스 캐번디시와 결혼한다.’는 관념이었다. 프시케는 그날 처음으로 여왕이 부여한 그 대전제에 대해 묘한 거부감을 느꼈다.

프시케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문 앞에 섰다. 열쇠가 찰칵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푸른 수염의 방은 예전 모습과 같았다. 큰 창문과 흰 천을 씌운 거대한 천체망원경. 어쩐지 반가운 마음이 들어 그녀는 망원경 가까이 다가가 천을 벗겨 냈다.

한쪽 눈을 감고 반대편 눈을 살그머니 렌즈에 대어 보았다. 배율이 맞지 않아 초점이 흐릿했다. 조작법을 모르니 밤하늘을 보는 것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아쉬워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

“여기 계셨군요.”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프시케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가물거리는 촛불 너머 에우로스가 서 있었다.

“방에 계시지 않아 걱정했습니다.”

에우로스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온화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에우로스는 당황한 프시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녀의 어깨를 느슨하게 감싼 숄을 단단히 여며 주었다. 안개 속 정원에서의 일이 떠올라 프시케는 다시 얼굴을 붉혔다. 어두운 밤이라 다행이었다.

“제가 너무 늦었습니다. 처리할 일이 많아서. 미안합니다.”

에우로스는 사과했다. 그러나 그의 변명은 거짓말이었다. 처리할 일이 아니라 처리할 마음 때문에 집무실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프시케의 앞에서 그는 여전히 극단에서 매 맞는 비천한 아이였다. 그건 쉽게 꺼내 처리하기 어려운 과거였다.

모든 관념이 뒤바뀌어 이제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세상이 되었는데도 그랬다. 오늘, 에우로스의 밤은 자꾸만 태양이 제 주위를 도는 것만 같았다.

태양과 지구의 관계가 역전되었듯, 에우로스와 프시케의 관계도 역전되었다. 괜찮냐며, 아프지 않냐며 묻던 새파란 드레스의 꼬마 소녀는, 이제 제 손을 잡고 주저앉았던 몸을 일으킨다. 오물 속에서 울던 남루한 꼬마 소년은, 이제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주저앉았던 몸을 끌어 올린다.

그럼에도 불안했다. 제 과거를 펼쳐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모른 척, 그렇게 구원자 흉내를 내고 싶었다. 처음부터 여유로운 어른이었던 것처럼,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비쩍 마른 몸으로 저보다 더 어린 소녀에게 안겨 울었던 그 과거는 없는 것처럼.

“밤하늘이 보고 싶으십니까?”

에우로스는 애써 표정을 수습하고 물었다. 어두운 밤이라 다행이었다.

“네.”

프시케가 작게 대답했다. 에우로스는 씩 웃고는 망원경의 렌즈에 한쪽 눈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오른쪽 나사를 조금씩 돌리며 배율을 조절했다.

“이리 와요.”

에우로스가 프시케의 어깨를 잡았다. 아주 살짝, 그러나 조심스러웠던 이전과는 달리, 힘이 들어간 손길이었다.

“별자리는, 날씨가 추워질수록 더 잘 보입니다. 오늘은 지난번보다 아마 더 선명하게 하늘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프시케는 렌즈에서 한참 눈을 떼지 않았다. 별똥별이 쉴 새 없이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멀리 은하수가 어두운 하늘 속을 고요히 날았다.

그녀가 망원경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릴 적에, 처음 별똥별을 보았을 때가 생각나네요.”

“…….”

“강가에서 보았었는데, 그때도 지금처럼 별이 많았어요.”

“……그렇군요.”

에우로스는 태연한 척 대답했다. 새파란 눈동자의 떨림은 검은 대기 속에 잘 감춰 둔 채였다.

“별도 아름다웠지만, 그때 제 옆에 있었던 친구 덕분에 그 밤이 더 아름다웠어요.”

“…….”

프시케가 굽혔던 허리를 서서히 바로 세웠다. 그녀의 어깨를 쥐었던 에우로스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때 정말 고마웠어요, 공자님.”

에우로스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눈동자 속 잔잔했던 떨림이 급격한 파동이 되어 거세게 휘몰아쳤다. 더 이상 어둠도 그것을 숨겨 주지 못했다.

프시케는 그의 눈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동안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 이상할 만큼, 그의 눈동자는 어릴 적 그 소년의 것과 똑같은 색깔이었다. 데본셔 공작과 하르모니아의 눈동자도 푸른색이지만, 에우로스의 눈동자가 품은 푸른색은 달랐다.

카듀 강으로 떨어진 별을 품은 눈. 물빛 호수에 햇살이 내려앉아 빛나는 눈. 수레국화가 가득 핀 들판에 이슬이 피어나 반짝이는 눈. 그게 에우로스의, 에우로스만이 가질 수 있는 눈이었다.

진흙과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깨끗하게 닿아 오던 그 눈동자를 어째서 지금껏 몰라봤던 걸까. 키가, 나이가, 머리 색이 달라도 그 선명하던 푸른빛은 그대로인데.

언제부터 의심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그저 과거의 아이와 현재의 에우로스가 어느 순간부터 뒤섞였다.

그 아이에 대한 기억은 불분명했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고, 정보가 아닌 감각으로 남아 있는 기억들이었다.

비눗방울처럼 툭툭 터지던 울음소리, 어쩐지 욱신거리던 마음, 콕콕 떨어지던 별의 반짝임,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거친 피부, 따뜻한 체온.

그 감각들은 시간이 지나며 무의식의 수면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래서 곧 녹아 사라진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하늘에서 떨어지는 수많은 별들을 다시 보게 된 이 시간, 가라앉았던 감각 위로 은하수가 흐르고 별이 스쳐 지났다.

그리고 그 빛은 가장 아래에 숨어 있던 감각 하나를 또렷하게 비추었다. 눈물이 가득 맺혔던, 그 아이의 눈동자 색이었다.

사랑의 신은 원래 어린아이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제 화살에 찔려 어느 여인에게 사랑을 느꼈을 때도 여전히 그는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그 여인과 첫 밤을 보내고 난 뒤, 어린아이는 사내가 되었다.

과거의 초라한 남자아이는 이제야 조금 자란 어른이 되어 프시케의 앞에 섰다. 아내의 말에 에우로스는 드디어 두려움을 씻어 내고 용기를 냈다. 그래서 말할 수 있었다.

“방으로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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