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즉흥극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결혼식을 올린 에우로스와 프시케, 그리고 그 결혼의 증인 사무엘과 클라리사는 지체 없이 다시 마차에 올랐다. 여관에서 하루만 묵어가자고 사정하는 사무엘의 의견 따위는 가뿐히 묵살한 처사였다.
“돌아가면 사흘 밤낮은 눈을 뜨지 못할 거야.”
사무엘이 벌겋게 충혈된 눈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도합 일주일 동안 길 위에서 보낸 시간과 그 시간 동안 일어난 엄청난 일들을 떠올리니 수명이 몇 년쯤 줄어 버린 느낌이었다.
“그렇게 해.”
에우로스 역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피곤한 건 사실이었다. 프시케의 상태를 고려하면 여관에서 하루쯤 묵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곧바로 채스웍 하우스로 가는 편이 안전하다는 것이 에우로스가 내린 결론이었다.
여왕, 혹은 공작이 추격대를 보내는 경우의 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관이나 길 위에 있다가 잡히면 손쓸 새도 없이 그대로 리던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 사유지인 채스웍 하우스에서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누구라도 함부로 저택에 침입할 수 없으니 적어도 프시케를 안전하게 빠져나가게 할 시간은 벌게 될 것이다.
요 며칠은 에우로스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시간이었다. 돌이켜 보면 대본 없이 오로지 즉흥적으로 흘러가는 극이었다.
공작에게 거두어진 이후, 에우로스는 늘 빡빡한 대본을 썼고 그 대본대로 살았다. 대본의 대사는 대부분 독백, 혹은 방백이었다.
그러나 갤러웨이 성에서 프시케 스튜어트와 재회한 이후, 독백과 방백이 있던 자리에 대화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회상 장면이 많아지고, 지문의 내용도 풍부해졌으며, 빼곡하던 대본에 군데군데 여백이 생겼다.
모른 척했다. 모른 척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황금화살 클럽에서 보내온 서신을 보는 순간 에우로스의 대본은 백지장이 되었다. 모든 대사와 지문이 지워졌다. 결국 텅 빈 대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즉흥극밖에 없었다.
“그런데 에우로스, 이거 해결할 방법은 있는 거지?”
사무엘이 감았던 눈을 슬쩍 떴다. 극심하게 피로했음에도, 지난 며칠간의 일들이 자꾸 떠올라 그는 잠을 잘 수도 없었다.
“글쎄.”
에우로스는 피식 웃었다. 즉흥극에 해결 방법이 어디 있나. 일단 저지른 거지.
“그럼 해결할 방법이 있을 예정이긴 한 거지?”
“그것도 글쎄.”
그 대답에 사무엘은 눈을 꽉 감아 버렸다. 정신없이 휘몰아치기에 휩쓸렸다가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프시케 스튜어트가 누구인가, 여왕과 하나도 친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여왕의 친척이다.
에우로스는 누구인가, 잘나긴 했지만 어쨌든 공작의 사생아다. 여왕이 이 결혼을 두 팔 벌려 환영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물려받을 작위도, 재산도 없는 스태포드 남작가의 무려 삼남이다. 이제는 공작의 사생아와 엮여 리던 탑에 갇힐 일만 남은 사무엘 스태포드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이라도 해 볼걸 그랬다. 아니, 청혼이라도 해 볼걸 그랬다.
에우로스와 밤을 보낸다는 치욕스러운 소문을 듣고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여자에게 청혼했다가 장렬하게 차인 이후로는 무서워서 연애도 제대로 못 해 봤다.
결혼이라도 했다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을 텐데. 남의 결혼시키자고 제 결혼을, 아니, 인생을 날려 버린 멍청이가 나다. 사무엘 스태포드.
“걱정하지 마, 사무엘.”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씩씩대다가 눈을 번쩍 뜬 사무엘을 향해 에우로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해! 나는 결혼도 못 해 봤는데!”
“결혼할 사람은 있고?”
에우로스의 비아냥에 사무엘의 얼굴이 빨개졌다. 에우로스는 눈매를 좁히고, 사무엘의 붉어진 얼굴을 다시 한번 찬찬히 살폈다.
“……뭐야?”
“뭐, 뭐가.”
“연애해, 사무엘?”
“연애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하긴, 연애할 시간도 없었지. 아니, 시간이 없어도 하는 게 연애 아닌가.”
“그런 거 아니야, 에우로스.”
사무엘은 제 이야기를 떠벌리면 떠벌렸지 숨기는 이가 아니었다. 그런 인간이 입을 딱 다물면 스스로 열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에우로스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에우로스가 사무엘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무엘은 뚫어지게 자신을 직시하는 그 새파란 눈동자를 보자 찔끔했다. 누군가의 눈동자가 떠오른 탓이었다.
당돌하고, 깜찍하고, 그리고 너무나도 멋진.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있어도 제 눈에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
그리고, 제 처지에 절대로 욕심낼 수 없는 여자.
사무엘이 다시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실눈조차 뜨지 않았다. 에우로스는 그런 그를 한참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 * *
프시케는 오랜만에 푹 잤다.
어젯밤 늦게 채스웍 매너에 도착해 사용인들의 인사를 제대로 받을 겨를도 없이 방으로 안내되었다. 에우로스의 배려였다. 며칠 동안 엉망이 된 몸을 씻고 그대로 침대에 뛰어들어 오후가 될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일어났을 때 클라리사는 방에 없었다. 클라리사는 보통 프시케가 기상하기도 전에 세숫물이며 입을 옷을 미리 준비하는데, 바지런한 클라리사에게도 이번 여행은 대단히 고단했던 것임이 분명했다. 나이를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바닥으로 내려섰다. 피곤에 전 몸이 아우성을 쳤다. 배가 고픈 것도 같아 프시케는 최소한의 치장만 하고 방을 나섰다. 저택의 내부는 조용했다.
1층으로 내려가자 집사가 빠르게 다가왔다. 지난번 방문 때 얼굴을 익힌 이였다. 자신을 제롬이라고 소개한 집사는 눈치껏 프시케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아침 식사를 방으로 올려 드리려 했지만 많이 피곤하실 것 같아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마님.”
‘마님’이라는 호칭에 프시케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녀가 불편하지 않게 미리 에우로스가 귀띔한 모양이었다.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설레기도 했다.
“사무엘 님은 아직 주무시고, 주인님은 일찍 출타하셨습니다.”
“공자님께서?”
프시케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제 이곳으로 온 네 사람 중, 가장 피로할 사람을 꼽자면 단연 에우로스였다. 그는 리던으로 말을 달리고, 자신을 구하고, 마차를 수배해 그레트나 그린으로 가서 결혼을 하고, 다시 채스웍 하우스까지 여행을 준비했다.
그 모든 일들을 에우로스는 마치 준비된 음식을 내오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해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중간중간 리던의 공작저를 비롯하여 여러 곳으로 연락도 취했을 것이다.
“예. 급한 볼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녁 전까지는 돌아오겠다고 하셨으니 그때 만찬을 준비하겠습니다.”
“알겠네.”
집사가 식당에 서 있던 하녀 둘에게 눈짓하고는 공손히 인사한 뒤 사라졌다. 프시케는 하녀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을 조금 먹다가 곧 포크를 내려놓고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흰 벽을 아낌없이 금칠한 식당은 알맞게 사치스러웠다.
처음 채스웍 하우스에 왔을 때가 생각났다. 피곤한 것도 잊고 에우로스를 따라 저택 이곳저곳을 구경했었다. 모든 것들이 화려하고 눈부셨다. 하지만 감탄이 불어나자 어깨가 짓눌렸다.
가난한 프시케 스튜어트와 데본셔 공작가는 그렇게도 이질적이었다. 그리고 그때도 에우로스는 제게 손을 내밀었다.
서재에 쓰러져 있던 자신의 손을 잡고 일으킨 이가 에우로스라서, 열악했지만 가슴 뛰었던 결혼식에서 손을 잡고 있던 이가 에우로스라서, 그 모든 게 좋았다.
그래서 감탄이 불어나도 더 이상 어깨가 짓눌릴 것 같지 않았다. 그의 손을 잡고 이곳에 오게 되었으니까.
접시를 물린 프시케는 저택을 나선 뒤 정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에는 사무엘의 권유로 말을 타고 정원을 한 바퀴 돌았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찬찬히 구경해 보고 싶었다. 데본셔 공작저에 있을 때, 하르모니아로부터 들었던 이야기 때문이었다.
“에우로스가 채스웍 하우스를 구입한 건, 그 정원 때문이랬어요. 더비 백작부인이 처음에는 상대도 해 주지 않았는데, 설득하려고 심혈을 기울였다더라고요.”
겨울 초입의 정원은 무채색이었다. 색깔을 지녔던 모든 것이 땅에 떨어지고, 남은 것은 흰 안개와 회색 구름이 만들어 낸 부연 시야였다. 프시케는 그 흐릿하고 아득한 공기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정원 깊숙이 들어오자 모든 것이 불분명한 느낌이었다. 멀리서는 보이던 사물의 윤곽이 가까이에서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프시케는 갑자기 방향감각을 잃었다. 불안이 안개와 몸을 섞고 그녀를 휘감았다. 그림자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가면무도회가 있던 밤에 제 뒤를 덮치던 그림자를 떠올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에우로스에 의해 마차에 태워진 후, 며칠간은 악몽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 남자는 누구였을까. 데이모스 캐번디시는 왜 저를 그곳에 데리고 갔을까. 그리고 어째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까. 퍼즐을 하나하나 끼워 맞추던 프시케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몸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서걱서걱, 마른 낙엽이 밟히는 소리가 났다. 공포가 밀려왔다. 우악스럽게 잡아채인 팔, 이리저리 흔들리던 몸, 찢겨 나가던 드레스의 앞섶, 꼼짝할 수 없던 다리. 그중에서도 가장 무서웠던 건 그 소리였다. 도망가는 저를 단숨에 따라잡던, 쿵쿵 울리는 발소리.
“프시케.”
떨리던 몸이 순간 경직했다. 소리를, 소리를 질러야 하는데. 프시케는 목구멍이 막혀 버린 것처럼 컥컥거렸다.
“프시케.”
따스한 맨손이 귀를 덮고 있던 그녀의 차가운 손가락을 쥐어 조심히 풀어냈다. 눈을 뜨자 무채색이었던 시야에 색깔이 밀려왔다. 안개도 가릴 수 없는 따스한 황금색 머리칼, 구름도 숨길 수 없는 맑은 파란색 눈동자.
“잡아요.”
그의 손을 잡는 것. 이제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에우로스의 손에 이끌려 몸을 바로 세운 프시케가 단단한 그의 가슴에 몸을 기대었다. 곧 귓가에 아스라한 숨소리가 다가와 천천히 귓바퀴를 쓸었다.
방금 전까지 벼락처럼 꽂히던 소리들이 비눗방울처럼 몽글몽글 맺히고 맺혀 귀를 간지럽혔다. 아까와는 조금은 다른 이유로 그녀는 몸을 떨었다.
청량한 숨이 습한 안개를 머금고 프시케의 입안으로 밀려왔다. 입속을 휘젓는 안개는 더 이상 희미하지 않았다. 선명하고 또렷했다. 에우로스는 프시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단단히 안긴 몸에서 부드럽게 힘이 빠져나갔다.
프시케는 아주 오래 숨을 참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녀의 입속으로 대신 숨을 불어넣어 준 사람이 앞에 있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