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결단
“설명해라.”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아버지.”
공작의 음산한 표정을 보자 데이모스는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일단은 발을 빼고 봐야 했다.
데이모스는 프시케 스튜어트가 사라진 이후에야 비로소 사건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물론 심각성이라는 것은 계획이 실패했기 때문에 깨닫는 것이다. 성공했다면 심각성이 아니라 정당성으로 포장했을 텐데.
데이모스는 그가 계획한 일이 실패로 돌아갈 것이라는 가정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이 틀어졌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당연히 프레이아 고든레녹스의 위에서 땀을 흘리고 있을 줄 알았지, 아버지의 아래에서 땀을 흘리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식은땀을.
“그렇게 결혼이 하기 싫었느냐?”
데본셔 공작이 물었다. 프시케 스튜어트와 제 아들을 결혼시키는 게 싫었던 건, 여왕의 간계에 놀아나는 게 짜증 나서였고 결혼으로 얻을 게 하나도 없어서였지, 데이모스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결혼해서 알콩달콩 살라고 한 적도 없고, 결혼한 뒤에 놀지 말라고 한 적도 없다. 그러므로 데이모스가 프시케와 결혼한다고 해서 아들놈의 개차반 같은 일상이 변할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도대체 왜 이딴 일을 벌였는지 공작은 이해할 수 없었다.
“……예.”
데이모스는 조금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결혼하기 싫었던 건 맞지만, 그렇다고 굳이 이런 짓까지 할 이유는 없었다. 결혼하면 프시케 스튜어트를 데본셔 영지에 홀로 처박아 두고 자신은 리던에서 지내며 원래 살던 대로 살 작정이었다. 갤러웨이 성의 붙박이 유령을 데본셔 성의 붙박이 유령으로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사달이 벌어진 건 프레이아 고든레녹스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 얘기까지는 아버지에게 할 수 없었다.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가, 나중에 프레이아에게 생색이라도 내며 받기로 했던 대가의 반의반만이라도 줄 순 없겠느냐고 비벼 볼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공작이 낮게 신음하며 말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데이모스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그 순간 눈앞에서 불이 번쩍했다. 엄청난 타격에 데이모스는 그대로 바닥으로 내리꽂혀 버렸다.
“왜, 왜 이러세요, 아버지.”
데이모스는 공작이 한번 화나면 얼마나 무서워지는지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허리 아래가 하는 일에는 대체로 관대했으나, 머리로 하는 일에는 가차 없이 냉혹해졌다.
데본셔 공작은 입을 꽉 다물고 바닥에 쓰러져 볼을 감싸 쥔 채 벌벌 떠는 아들의 한심한 꼴을 내려다보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데이모스가 꼭 그 짝이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제 인생뿐 아니라 가문까지도 말아먹을 위인이었다.
프레이아 고든레녹스와 데이모스가 밀회한 것, 그 후 데이모스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사람을 고용한 것, 고용한 사람을 시켜 공작저에서 어떤 여자를 겁탈하도록 한 것. 이것이 에우로스가 보낸 서신에 쓰여 있던 내용이었다.
데이모스가 저지른 저 세 가지 일이 다 한심하지만, 공작을 가장 화나게 만든 것은 세 번째, ‘공작저에서’ 여자를 겁탈하도록 한 일이었다.
공작저라니, 차라리 여자를 끌고 나가 숲속이나 길가에서 그런 짓을 시켰다고 했다면 화가 덜했을 것이다.
에우로스가 황금화살 클럽을 통해 정보를 수집한다는 사실은 공작도 잘 알고 있었다. 에우로스를 통해 공작도 필요한 정보들을 얻은 적이 꽤 많았다. 그러니 그 아이가 보내온 서신의 내용에 거짓은 없을 것이다.
데이모스가 프레이아 고든레녹스에게 눈이 돌아 있다는 건 공작이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둘이 경마장에서 몰래 만났다는 건 의외였다. 데이모스가 저지른 헛짓거리에 대해서 보고하는 내용에 에우로스가 굳이 저 둘의 밀회에 대해 언급했다는 것은, 그 두 사건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공작은 프레이아와 아들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에 대해서는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에우로스가 보낸 서신의 말미에 더 충격적인 이야기가 쓰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우로스와 프시케 스튜어트의 결혼. 이번에는 에우로스가 건네준 폭탄이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
공작의 뜻 모를 말에 데이모스는 맞지 않은 반대편 뺨을 감싸 쥐었다. 왼뺨을 맞았으나 오른뺨을 내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
“너와 프시케 스튜어트가 결혼할 일은 없다는 말이다.”
“…….”
사실 공작의 대답은 데이모스에게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지금 듣고 싶은 말은 제가 저지른 일이 누구도 알 수 없게 잘 처리되었고, 그러므로 자신에 대한 처분도 스리슬쩍 넘어가 주겠다는 것이었다. 프시케 스튜어트 따위와 결혼을 하느니 마느니가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에우로스가 그 여자와 결혼하겠다는구나.”
“예?”
아니다. 공작의 입에서 나온 말은 중요했다. 프시케 스튜어트가 아니라 에우로스 때문에.
에우로스가 그 여자를 데리고 저택을 빠져나갔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도주가 결혼으로 이어지는 결말은 너무 황당하지 않은가.
이제껏 데이모스는 에우로스의 결혼에 대해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에우로스는 사교계 여자들을 구슬려 투자는 잘 받아 내면서도, 다른 걸 받아 낸 적은 없는 인간이었다. 투자를 포함한 다른 것들도 주겠다는 여자들의 청을 하도 거절하는 바람에 남색이라는 소문도 나지 않았던가.
사무엘 스태포드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이야기가 돌 때도 에우로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사무엘 혼자 분노해서 방방 날뛰다 아무에게나 청혼하고 대차게 거절당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에우로스는 여자와 남자, 모두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인간임이 확실했다.
그런데 결혼이라니. 그것도 자신과 결혼하기로 했던 프시케 스튜어트와.
에우로스는 상대방이 불쌍하다고 해서 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프시케 스튜어트의 꼴이 아무리 가여웠어도, 동정심으로 결혼까지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에우로스가 프시케 스튜어트와 결혼할 마음이 있었다는 것. 다시 말해, 좋아했다는 것.
그렇다면 모든 게 설명이 되었다. 어째서 채스웍 하우스에 가 버렸던 에우로스가 리던으로 돌아와 프시케 스튜어트를 구했는지, 어째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 여자를 데리고 도망갔는지, 어째서 도망에 그치지 않고 결혼까지 했는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데이모스의 눈에 갑자기 불길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프시케 스튜어트는 자신과 결혼할 여자였다. 그것도 위대하신 앤 스튜어트 여왕 폐하의 명령으로. 그런 신성한 결혼을 에우로스가 감히 훼방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건 안 됩니다, 아버지.”
그래서 데이모스는 비장하게 말했다.
“안 돼?”
“예, 안 됩니다.”
“어째서?”
“그 여자는 저와 결혼할 여자였지 않습니까. 게다가 여왕 폐하의 명령도 있었고요. 이미 다른 남자 손을 탄 것 같아서 그건 기분이 나쁘지만, 그래도 제 책임이니까 제가 데리고 살겠습니다.”
공작은 아무 말 없이 데이모스를 빤히 보았다. 저놈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지껄이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자신이 갖기는 싫고, 에우로스가 가지면 아까운 것. 언젠가부터 데이모스의 모든 말과 행동의 원인은 에우로스였다. 열등감과 질투를 똘똘 뭉쳐 인간의 형상으로 빚어낸다면, 그게 곧 데이모스일 것이다.
점점 더 비뚤어지는 데이모스를 보면서도 데본셔 공작은 여태껏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는 에우로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이모스에게 재산과 작위는 주겠지만, 기대와 희망은 에우로스에게 주었다. 캐번디시의 성을 붙여 그 기대와 희망을 조속히 구체화하려 했건만, 거절하며 속 태우는 그 여유만만한 태도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 공작에게도 에우로스의 결혼은 준비하지 않고 맞은 물벼락 같은 것이었다. 프시케 스튜어트가 해야 할 결혼은 그냥 결혼이 아니었다. 여왕이 주선하고 캔튼베리와 야크 대주교의 보증을 받은, 말하자면 국혼이었던 것이다.
그 상황에 에우로스가 난데없이 끼어들어 모든 걸 망쳐 놨다. 차라리 데이모스의 그 멍청한 계획이 차질 없이 실행되었더라면 일은 더 편했을 것이다. 명백히 제 아들과 결혼하지 못할 귀책을 프시케 스튜어트에게 뒤집어씌우고 원래 살던 곳으로 보내 버리면 끝이었다.
그런데 에우로스와 결혼이라니. 그러면 국혼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여왕은 분명히 노발대발할 것이다. 데본셔 공작가를 멸문하지는 못하겠지만, 제 명령을 어기고 엉뚱한 아들과 그것도 사생아와 프시케를 결혼시킨 데 대한 보복은 확실하게 할 것이다.
이게 다 저놈 때문이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데이모스를 보자 공작의 심경은 더 복잡해졌다. 오냐오냐해 주는 것도 이제 끝이었다.
이미 그레트나 그린에서 에우로스와 프시케가 결혼하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다. 추격도 하지 못하도록 그레트나 그린 도착일과 서신 발신일을 교묘하게 조절해 놨기 때문이었다. 역시 에우로스는 에우로스였다.
이 일로 인한 여파는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작은 에우로스가 그만한 각오도 없이 이런 일을 저지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일의 근원 데이모스는 이제 데본셔 공작의 처리 가능한 한계선을 넘었다.
그리하여 공작은 데본셔 공작가의 적장자, 잉그린트에서 최고로 고귀하며 부유한 그의 아들 데이모스 캐번디시에게 말했다.
“입대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