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잡아요
그런 날이 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다시 피로가 몰려오고, 창밖의 날씨는 꾸물거리는 데다 기분마저 저조하며, 친구가 찾아와 시답잖은 말을 해 대다 달갑지 않은 소식을 전하는 날.
에우로스에게는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프시케 스튜어트의 데뷔탕트 무도회가 끝난 직후, 에우로스는 급히 리던에서 채스웍 매너로 돌아왔다. 사무엘이 놀리듯 도망쳤냐고 한 말은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나비의 날갯짓이 몰고 온 돌풍이 헤집어 놓은 제 속내를 간파한 순간, 말 그대로 그는 도주했다.
꼭 들어맞는 뚜껑을 단단히 돌려 닫고, 아주 깊숙한 곳에 감추어 완벽하게 밀봉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기억이 아주 작은 실금 사이로 퍼져 나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퍼져 나온 과거의 기억이 현재를 덮어씌우고 제 눈마저 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에우로스는 곧바로 공작저를 빠져나왔다.
그러면 될 줄 알았다. 시간이 지나면 현재는 다시 과거가 될 테고, 그러면 밀봉하기란 더 쉬워진다.
그렇게 프시케 스튜어트와 다시 남남처럼 살아가고, 그녀를 만나기 전의 그 산뜻했던 삶으로 돌아가 지내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카듀 강의 금광을 모른 척하는 것은 좀 어렵긴 하겠지만, 괜한 풍파에 휘말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일들은, 특히 감정과 결부된 일들은, 한번 일어나기 시작하면 돌이키는 것이 쉽지 않다.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다면 편했을 테지만, 에우로스에게 최근 일어났던 일들은 비가역의 범주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랬던 것이다. 감정은 되돌릴 수 없고, 때때로 그 모든 합리와 논리에 앞선다. 지금이 바로 에우로스의 인생을 통틀어 감정이 치고 나선 몇 없는 순간이었다.
확실하고 명료한 이성적인 판단은 240야드 뒤로 밀려났다. 서신이 쏘아 올린 출발 신호탄에 앞뒤 재지 않고 화살처럼 날아 결승선을 빠른 속도로 돌파한 것은 바로 프시케 스튜어트에 대한 걱정과 데이모스 캐번디시에 대한 분노, 두 개의 감정이었다.
지금 당장 외면해 버리면, 자신이 리던을 떠나오면서 마음먹었던 대로 프시케 스튜어트와 완전히 타인처럼 지낼 수 있었다. 당연히 일이 벌어진 뒤 소식을 듣게 된다면 신경이 쓰이고 화는 날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 모든 과정을 버리고 결과론적으로만 보자면, 에우로스에게는 그 어떤 문제도 생기지 않고 완벽하게 다시 예전의 삶으로 되돌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반군과 하지도 않은 키스 때문에도 남의 눈치를 보았던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겁탈을 당하는 수모를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폐인이 되어 버리겠지.
그것은 절대로 괜찮은 일이 아니었다. 에우로스는 괜찮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다.
데이모스는 개새끼였다. 황금화살 클럽에서 보내온 서신을 뜯어보는 순간 에우로스는 바로 알았다. 그 새끼가 꾸미는 짓이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를.
비밀리에 건달 하나를 고용해 여자 하나를 더럽혀 놓으라고 주문했다지. 서신에는 쓰여 있지 않았지만, 그 짓거리는 분명히 프시케 스튜어트를 겨냥한 것이었다.
데이모스는 개새끼였지만, 단순히 결혼하기 싫다고 해서 이런 일을 저지를 만한 간 큰 놈은 아니었다.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에우로스는 서신의 다음 장을 넘겨 보고서야 사건의 흐름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경마대회에서 프레이아와 데이모스의 밀회 정황을 보고하는 내용이었다.
정리하자면, 프레이아와 데이모스의 만남이 먼저였고, 그 후에 데이모스는 깡패 하나를 준비해 놓았다가, 무려 공작저의 가면무도회를 이용해 그를 몰래 데리고 들어온 다음, 프시케 스튜어트에게 몹쓸 짓을 하도록 한다는 총 4막짜리 극본이었다.
최종 막이 내리면 프레이아와 데이모스의 사이에서 모종의 일들이 더 벌어지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데이모스가 사람을 몰래 섭외해 놓은 2막의 끝이었다.
3막의 시작은 며칠 뒤에 있을 가면무도회에 맞추어 공연될 예정이었다. 죽도록 말을 달리면 더비셔의 채스웍 하우스에서 리던의 공작저까지 무대의 커튼이 올라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에우로스는 서신을 읽자마자 그것을 앞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마구간으로 달렸다. 뒤따르는 사무엘의 고함소리는 무시한 채로.
* * *
프시케는 입이 틀어 막힌 채 그대로 바닥으로 자빠트려졌다. 그녀의 그림자를 덮어 버렸던 남자는, 이제 프시케의 몸을 덮고 있었다.
저항하는 여자를 폭력으로 굴복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남자의 힘은 거칠고 강했다. 버둥거리던 팔다리는 손쉽게 제압당했다. 반항할수록 다치는 쪽은 프시케였다.
수차례 뺨을 후려 맞자 프시케의 고개가 뒤로 툭 넘어갔다. 일시적으로 모든 소리가 차단되듯 귓가가 웅웅 울렸다.
눈앞으로 무수히 별이 쏟아졌다. 순간 채스웍 하우스에서 천체망원경을 통해 보았던 별이 떠올랐다. 웃기는 일이었다.
“이 미친년이…….”
프시케가 쿡쿡 웃었다. 그 웃음을 보자 남자가 욕설을 내뱉으며 그녀의 위에 자리 잡았다. 드레스를 찢는 손이 성급하게 움직였다.
그 난삽한 손길이 프시케를 다시 현실로 이끌었다. 머리채를 잡히고, 손톱을 뜯기고, 얼굴을 얻어맞는 잔혹한 현실이었다.
어떤 일이 벌어지든, 끝은 죽음이었다. 육체의 죽음이든, 정신의 죽음이든, 프시케 스튜어트의 인생은 곧 종말을 맞이할 것이었다.
그녀는 서서히 턱에 힘을 주었다. 제 인생의 종말과 함께 핏물로 가득한 입안에서 곧 작은 살덩이도 함께 사라질 예정이었다.
그때, 서재의 문이 무시무시한 파열음을 내며 넘어졌다. 그 문을 밟고 들어선 자는 스스로 제 몸에 황금화살의 촉을 찔러 넣은 에우로스였다.
그가 입은 프록코트의 왼쪽 가슴 주머니에는 황금화살 문양을 찬란한 금빛으로 박아 넣은 서신이 여전히 구겨진 채 쑤셔 박혀 있었다.
* * *
프시케의 몸을 짓누르고 있던 남자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 개 같은 상황을 목격하고 나자 에우로스는 리던으로 말을 달리며 며칠 내내 곱씹었던 걱정과 분노가 모두 휘발되는 것을 느꼈다.
격정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무감이었다. 그는 색이 모두 사라진 얼굴로 남자를 거의 반죽음 상태로 만들었다.
신음하던 남자가 정신을 잃자 서재 안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내려앉은 공기 위에 떠오른 것은 서러운 울음소리였다. 프시케 스튜어트의 것이었다.
에우로스의 시선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향했다.
“괜찮아요?”
바닥에 쓰러져 있던 프시케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시야가 몽롱했다. 꿈인 듯, 꿈이 아닌 듯, 제 앞의 존재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아프지 않아요?”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자 밤빛을 닮은 새카만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 부풀어 올랐다. 맺힌 눈물이 에우로스의 상을 크게 굴절시켰다. 눈앞에 가득 맺힌 상은 더 이상 몽롱하지 않았다. 그는 명백한 실재였다.
“잡아요.”
에우로스는 프시케의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담담한 듯, 재촉하는 듯 모호하게 말하며. 언제나 그래 왔다. 그렇게 그는 여러 감정을 숨긴 채 손을 내밀곤 했다.
프시케는 그 손을 맥없이 응시했다. 익숙한 흰 가죽장갑이 피로 얼룩져 있었다. 검붉은 핏자국을 보자 갑자기 몸이 떨려 왔다.
“잡아요.”
에우로스가 힘을 주어 다시 말했다. 아니, 이번에는 달랐다. 그의 손은 아무것도 숨기고 있지 않았다. 에우로스가 몸을 굽혔다. 그리고 먼저 프시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안아 일으켰다.
“그레트나 그린으로 갈 거예요.”
에우로스가 말했다. 그의 말투는 차분하고 다정했다. 그러나 에우로스가 내뱉은 말의 위력에 프시케는 설핏 몸을 굳혔다.
“그곳에서 나는, 그대와 결혼할 겁니다.”
프시케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새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던 에우로스가 천천히 피 묻은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프시케의 헐벗은 어깨를 감싸 주었다.
“원하지 않는다면,”
그의 따뜻한 맨손이 프시케의 뺨을 빈틈없이 감쌌다. 프시케와 에우로스의 눈이 서로를 애틋하게 담았다.
새파란 눈동자에 까만 눈동자가 포개졌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일식은 더 이상 불길하지 않았다. 모호하지도 않았다.
“지금 거절해도 좋아요.”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프시케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려 에우로스의 손가락을 적셨다. ‘프시케 스튜어트는 데이모스 캐번디시와 결혼한다.’는, 불변의 진리와 같던 그 문장이 눈물에 젖어 형태를 뭉갰다.
창문 너머로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폭죽 소리에 맞추어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 밤은 소리로 가득했으되, 서로에게 집중한 에우로스와 프시케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더없이 고요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