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46)화 (46/146)

46. 실패한 카드 게임

리던 사교 시즌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가면무도회가 데본셔 공작저에서 열리는 날이었다. 저택 정문에는 손님들이 타고 온 마차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분수대를 반 바퀴 돌아 마차가 정지했다. 그곳에서 다채로운 모양의 가면을 착용한 사람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뛰어내리다시피 해 연회홀로 들어섰다.

그 연회홀에 프시케 또한 데이모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입장했다. 하르모니아가 선물한 노랑나비 모양의 가면을 쓴 채였다.

최근 데이모스의 눈빛에는 처음과 같은 적의가 없었다. 공작이 근신을 해제했음에도 그는 꽤 오랜 기간 동안 화이트채플에 발걸음하지 않았다. 가끔 외출하여 누군가를 만나긴 했지만, 만찬 전까지는 반드시 저택으로 돌아와 식사를 함께했다.

모든 것이 다 제자리를 찾았다. 프시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에우로스는 이제 없고, 프시케와 결혼할 데이모스는 정신을 차렸다.

데본셔 공작은 데이모스와 프시케의 결혼 일자를 신문을 통해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가면무도회가 끝나면 공작저는 본격적으로 결혼식 준비에 돌입할 예정이었고, 그들은 새해 하루 전날 부부가 될 터였다.

공작부인과 하르모니아는 달라진 데이모스를 보며 마음을 놓는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평안은 위태로워 보였다. 그 종잡을 수 없는 태도에 프시케는 안도가 아닌 불안을 느꼈다.

마치 폭풍우가 오기 전 느껴지는 꾸물꾸물하고 찝찝한 분위기가 데이모스에게서 느껴졌던 것이다. 그녀를 쳐다볼 때마다 데이모스가 짓는 뜻 모를 미소에, 프시케는 가끔 그의 시선이 닿은 제 얼굴을 털어 내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스튜어트 영애.”

프시케의 팔을 받치고 섰던 데이모스가 그녀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하고 속삭였다. 프시케가 화들짝 놀라 그를 바라보자, 데이모스가 피식 미소 지었다.

“긴히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단둘만 있는 자리에서.”

프시케의 이마가 살짝 찡그려졌다.

“지금, 말씀이세요?”

올려다본 데이모스의 표정이 잘 읽히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그의 표정이 묘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기쁜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하세요.”

프시케의 허락이 떨어지자, 데이모스는 그녀를 거의 끌다시피 해 연회홀을 벗어났다. 복도를 따라 걷자 음악 소리와 웃음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가 프시케를 데리고 들어간 곳은 제 서재였다. 주인이 1년에 몇 번 들어와 보지도 않는 데이모스의 서재에는 책장에 꽂힌 책보다 장식장에 있는 술병이 더 많은 것 같았다.

“한잔하시겠습니까?”

데이모스가 술병을 꺼내 들었다. 두꺼운 크리스털 잔에 콸콸 부어진 액체의 색깔이 짙었다.

“괜찮아요.”

프시케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지만, 데이모스는 개의치 않고 그녀의 앞에도 술잔 하나를 놓아주었다. 부주의하게 내려놓은 술잔에서 붉은 빛을 띤 술이 철렁거리며 밖으로 넘쳐흘렀다.

“잠시만 이곳에 계십시오. 먹을 것을 챙겨 오겠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데이모스의 말에 프시케가 튕기듯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거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듯했다. 데이모스는 한쪽 눈매와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마치 비웃음과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대답조차 듣지 않고 데이모스는 서재를 나가 버렸다. 육중한 문이 철컥하고 닫혔다. 프시케는 자리에 다시 앉지 않고, 창문 쪽으로 다가섰다.

창문을 열자 바람이 밀려들어 왔다. 이제 더 이상 온기가 남아 있지 않은, 늦가을의 바람이었다. 바람이 불자 실내를 밝히던 촛불 몇 개가 거세게 일렁거렸다. 그 일렁임을 따라 벽에 진 그림자도 출렁거렸다.

프시케는 저도 모르게 그림자의 움직임을 따라 벽을 훑었다. 책장과 책상, 티 테이블, 창문을 장식한 격자무늬 창틀까지 크고 검은 그림자가 되어 춤을 추었다. 그 춤과 함께 연회홀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도 흔들거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벽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위아래로 길게 늘어난 기형적인 모양의 그림자는 때때로 키를 높였다가 낮추기를 반복했다. 프시케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지만 그림자는 촛불의 움직임을 따라 쉼 없이 움직였다.

공작저에서의 그녀의 삶은 언제나 일정했고 변함없었다. 그러나 규칙적인 생활 속에서도 제 마음만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그림자처럼 커지고 작아졌다. 빛이 들어오는 방향과 세기에 따라 그림자는 시시각각 변한다. 그녀의 마음도 그랬다.

깊은 생각에 잠겼던 프시케는 어느 순간부터 제 그림자가 움직이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니, 움직이지 않는 것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그림자를 덮은 거대한 다른 그림자였다. 반사적으로 돌아본 곳에 가면을 쓴 정체 모를 남자가 서 있었다.

“누구, 신가요?”

프시케는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 내어 물었다. 순간 남자의 손이 그녀의 입을 무자비하게 덮었다.

* * *

프시케 스튜어트는 대귀족인 데이모스 캐번디시와의 결혼을 앞둔 숙녀이고, 최근 리던 사교계에서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이었으며, 여왕의 먼 친척이었다. 웬만해서는 스스로의 평판을 깎아 먹을 행동은 하지 않는 여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평판이라는 것은, 본인이 직접 깎아 먹지 않아도 쉽게 무너진다. 타인의 입과 손을 빌려서.

여성을 죽이는 일은 쉽다. 반드시 육신을 죽이지 않아도, 정신을 파괴하면 그것은 곧 죽음과 다를 바 없다.

여성의 정신을 파괴하는 일도 간단하다. 여자들은 약하고 쉽게 제압당한다. 그리고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보다 더 심한 비난을 듣는다.

결백을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결백은 피해자의 호소이고, 정숙은 제삼자의 평가다. 한 번 따 버리면 장미는 다시는 생기를 되찾지 못하고 그대로 시들어 버린다.

1)

그래서 데이모스는 사람을 고용했다. 공작저에서 여는 가면무도회는 그의 계획을 아주 용이하게 실현시켜 줄 무대가 되었다.

평소에는 아무나 들이지 않는 저택이지만, 가면무도회는 얼굴을 가리고 입장하므로 정체를 속이기 쉬웠다. 사용인들은 무도회 일에 매달리느라 정신없을 것이고, 연회홀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에 쏟을 여력 따위도 없을 터였다.

프시케를 연회홀과 멀찌감치 떨어진 곳으로 유인하고 미리 준비해 놓은 자가 그녀를 손쉽게 더럽히고 나면, 그러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이미 다른 남자의 손을 탔다고 알려진 여자를 받아 줄 신사는 리던에 없다.

제아무리 여왕의 명령이 있었다 해도, 순결을 잃은 신부를 데려다 억지로 결혼시킬 수는 없었다. 여왕이 곧 국가라 해도 국가 위에는 신이 창조한 남녀의 구별이 있었다.

일을 끝냈다는 보고를 받으면 현장을 확인하고, 하녀 몇을 서재로 보내어 그 광경을 목격하게 한다. 프시케 스튜어트가 찢긴 옷을 부여잡고 울고 있는 장면이라거나, 헐벗은 채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장면이면 완벽하다.

그 후 하녀들은 곧 쉬쉬하며 이야기를 퍼트릴 것이고, 다음 날이면 그 소식은 리던 전체로 퍼져 나갈 것이다. 처음 하녀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보다 더 부풀려지고 더 각색된 채로.

[프시케 스튜어트는 특정할 수 없는 가면무도회의 참석자와 연회홀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은밀하게 만남을 가졌다. 그 만남의 결과 그녀는 더 이상 순결한 처녀가 아니게 되었다. 이에 데본셔 공작가에서는 비통한 마음으로 데이모스 캐번디시와 프시케 스튜어트와의 혼인을 파기하고자 한다.]

실로 완벽한 대본이었다. 모든 것이 데이모스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었다.

언제나 그를 외면하던 신이 이번만큼은 그의 편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프레이아 고든레녹스로부터 프시케 스튜어트를 치워 내는 내용의, 장엄한 연극 중 마지막 장이 신의 가호로 순탄하게 공연되는 중이었다.

그는 운명처럼 다섯 개의 카드를 하나씩 뒤집고 있었다. 불운했던 데이모스의 인생 최초로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차곡차곡 완성되는 중이었다.

비올레타의 죽음

프레이아의 서신

경마장에서의 밀회

때마침 열리는 가면무도회

에우로스의 부재

평범하지 않은 카드 무늬 같은, 평범하지 않은 일들이 삽시간에 데이모스에게 짜 맞춘 듯 일어났다. 오늘만 지나면 그는 스트레이트 플러시를 완성한다. 그리고 그는 프레이아에게 저 다섯 장의 카드를 들고 가 칩으로 바꿔 올 것이다.

그러나 데이모스는 잊고 있었다.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일어날 확률은 단 0.00139%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껏 그래 왔듯, 신은 그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30분 이내로 모든 일이 마무리될 것이라 큰소리쳤던 사람이 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가면무도회는 이미 종반으로 치닫고, 공작저의 하늘 위로 불꽃이 펑펑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꽃놀이를 구경하기 위해 연회홀에 있던 사람들이 정원으로 쏟아져 나왔다.

설마 일이 틀어진 것은 아니겠지. 데이모스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불꽃놀이마저 끝나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한 그가 급히 제 서재로 향했다.

서재의 문은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심지가 거의 다 닳아 버린 초에 남은 빛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숨을 크게 들이쉰 데이모스가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그가 마주한 장면은 상상과 전혀 달랐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프시케 스튜어트가 아니라, 그가 고용한 남자였다. 피를 흘리는 사람도 그였다.

데이모스는 급히 책장 사이사이를 살폈지만 프시케 스튜어트는 서재 안 어디에도 없었다. 데이모스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도박은 끝났고, 올인했던 모든 것은 그대로 날아갔다.

스트레이트 플러시의 마지막 카드는 데이모스를 배신했다. 마지막 카드에 쓰여 있던 내용은 ‘에우로스의 존재’였다.

1) 윌리엄 셰익스피어 《오셀로》 5막 2장 대사 일부 수정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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