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45)화 (45/146)

45. 후원

“지난번 무례는 사과하겠습니다.”

“…….”

하르모니아와 프레데릭은 오늘도 이스트엔드의 다세대주택 건물 앞에 정차한 마차에 타고 있었다. 마차 안의 냉랭한 분위기에 이제 제법 쌀쌀해진 밤공기가 더해져, 하르모니아는 담뱃불이라도 쬐고 싶은 심정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하르모니아를 프레데릭은 말없이 쳐다보았다. 지난번의 만남 이후로 다시는 볼 일 없을 줄 알았던 사람이 며칠 전부터 다시 한밤중에 황금화살 클럽 앞으로 찾아오고 있었다.

모른 척하고 몇 번 바람을 맞히었으나, 오늘은 덩치 큰 남자가 제 앞을 막아서더니 보기와는 달리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청을 하는 바람에 결국 또 마차를 탔다.

도무지 이 여자가 왜 남장을 하고 자신을 후원하겠다고 쫓아다니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냥 소공녀로서 후원을 하겠다고 한다면 덜 이상할 것 같았다.

귀부인이 예술가를 후원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신사복을 입은 채로 조우하는 게 더 수상했다.

“저는 조지 샌드 씨의 후원을 받을 생각이 없습니다.”

무언가 사정이 있겠지. 프레데릭은 적당히 그녀의 장단에 맞추어 주기로 했다.

그녀가 남자든 여자든 자신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남자인 편이 나았다. 드레스를 부풀리며 춤을 추는 여자인 것보다는.

“맹세코, 모욕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어, 아니었습니다.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했던 건데, 당신의 입장에서는 불쾌할 수도 있을 것 같더군요.”

하르모니아는 지난번 그런 식으로 대화가 끝나고 나서, 다시는 프레데릭을 찾아가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거절한다면, 도와주지 않으면 그뿐인 것을.

그러나 그 의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꺾이고, 그를 만나고 싶은 마음만 점점 커졌다. 그래서 하르모니아는 마지막으로 만나 직접 사과를 하겠다는, 매우 자기중심적인 합리화를 하며 그를 찾아가 기다렸다.

“제가, 정말 당신의 연주를 좋아합니다. 처음 황금화살 클럽에서 당신이 피아노 치는 것을 들었을 때, 저는 그 음악의 뒤에 얼마나 대단한 노력이 숨어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었어요. 당신은 망설이고, 조바심을 내고, 실망하면서도 꾸준히 곡을 쓰고 절박하게 연주를 하는 사람이겠지요. 그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돕고 싶었던 겁니다. 존경하니까요.”

1)

“…….”

“그냥 그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사과도 하고 싶었고요. 이제 다시는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들어가 보셔도 됩니다.”

그 고백에 프레데릭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여전히 그는, 쥐가 끓는 다락방에 살면서도, 술 취한 사람들 앞에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연주를 하면서도, 건반 위에 던져진 거액의 지폐보다는 제 음악을 알아주는 다정한 말이 더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혁명에 투신하고, 또 배신당했지. 프레데릭은 자조했다. 하지만 하르모니아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음악에 필사적인 사람이었다.

곡 하나를 쓰자고 며칠 밤을 새우고, 깃펜을 몇 개씩 부러트리고, 방 안을 서성이고, 울어 버리는 이가 프레데릭이었다. 그렇게 해서 작곡을 하고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악보를 찢고 그 짓거리를 반복했다.

그 쉽지 않은 과정을, 제 연주만 듣고도 알아봐 주는 이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프레데릭이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는지, 사랑하다 못해 증오하는지, 그러면서도 다시 사랑하여 결국 타국까지 와서 다시 피아노를 치고 작곡을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지금껏 그 자신이 유일했다. 그리고 신사복을 입은 이상한 여자가 두 번째가 되었다.

프레데릭은 입술을 달싹였다. 이 말을 하면, 어쩌면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프레데릭은 어쩔 수 없는 낭만주의자가 맞았다.

“아무 대가 없이 받는 후원은 싫습니다.”

“네?”

프레데릭의 말을 듣고 하르모니아는 몇 번 눈을 깜박거렸다.

“보잘것없는 실력입니다만, 후원해 주신다면 작곡을 해 드리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직접 연주도 하겠습니다.”

“네에?”

하르모니아의 눈이 깜박임을 멈추었다. 미동도 없이 정지했던 눈꺼풀이 서서히 크게 벌어졌다.

“그럼 제 후원을 받아 주시는 거예, 겁니까?”

프레데릭은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드디어 제 마음을 알아주시는군요!”

하르모니아가 감격한 듯 말했다.

보통은 후원받는 자가 감격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하르모니아는 이 우스운 상황이 무척 비정상적이라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제 진심이 통했다는 것에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가 감사드립니다, 조지 샌드 씨.”

프레데릭은 발긋해진 뺨을 두 손으로 감싼 하르모니아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저러면서 남자 흉내를 내다니. 그래서 일부러 ‘조지 샌드’라는 그녀의 가짜 이름을 부르며 티 나지 않게 주의를 주었다.

다행히 그의 말에 하르모니아는 정신을 차리고 손을 수습해 제자리에 두었다. 무척 가지런하게, 두 손을 포갠 채로.

“후원 액수나 방식에 대해서는 제 비서인, 토마스가 조만간 찾아가 이야기할 겁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생각해 두었다가, 토마스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하르모니아는 마차 밖에 서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프레데릭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드러운 연주 같은 웃음을 보며 하르모니아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가 웃으니 쨍하고 현기증이 오는 것 같았다. 연회홀에서 느꼈던 그 갈망이 다시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토마스! 문을 열게.”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 같아 헛기침을 크게 했다. 큰 소리로 토마스를 향해 지시를 내린 하르모니아가 프레데릭을 향해 저도 모르게 방긋 웃었다.

프레데릭은 대책 없는 그 웃음을 보자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분에 넘치는 후원 제의를 받아 그런 거라고, 그는 애써 마음을 추슬렀다.

이번에는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프레데릭은 마차가 길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하르모니아는 프레데릭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창밖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웨스트엔드와 이스트엔드를 잇는 대로의 길이가 처음보다 조금 더 짧아진 것 같았다. 방향은 반대였지만, 상관없었다. 몸을 돌려 마주 바라보면 되니까.

* * *

그날 밤, 하르모니아는 입고 있던 신사복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깃펜을 들었다.

그녀는 소설을 쓰는 중이었다. 출간은커녕,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못할 수도 있는 내용의 소설이었다.

억눌리고 억압된 열정을 품은 나약한 여인이, 사회가 만들어 낸 장애물을 향해 맹목적으로 스스로를 부딪친 뒤 종래에는 사랑을 이루어 낸다는 것이 그 소설의 내용이었다.

하르모니아는 황금화살 클럽에서 본 신사들의 모습을 그대로 소설에 옮겨 담았다. 그녀가 그리고자 하던 ‘진짜 남자’들의 모습이 클럽에 있었다.

무도회에서 정중하게 손을 내밀어 춤을 청하고, 여자들에게 헌신하는 것처럼 보이던 신사들의 이면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어린 아내를 손에 넣고 전전긍긍하며 감시하는 남자, 불같은 사랑을 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싸늘하게 마음을 식혀 버린 남자, 다른 남자의 여인을 순수하게 연모하며 지켜보는 남자.

정형화되지 않은 날것의 수컷들을 관찰하는 일은 꽤 재미있었다. 하르모니아가 유심히 살폈던 그 사내들은 약간의 변형을 거쳐 소설 속에 등장했다.

신사복을 입게 해 달라고 에우로스를 조른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 옷을 입고 하르모니아는 황금화살 클럽에 드나들었고, 그곳에서 프레데릭을 만났다.

소설에 쓸 ‘진짜 남자’들을 발견한 것보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더 위대한 발견이었다. 장담컨대 프레데릭은 역사에 길이 남을 예술가가 될 것이다.

2)

그의 음악은 언어였다. 모든 정서가 그 언어에 담겨 있었다.

하르모니아는 그 언어를 가장 잘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를 가장 먼저 깨우쳤다. 그 깨우침은 희열을 주었고, 환희를 주었다. 하르모니아의 인생에서 최초로 느낀 폭발적인 감정이었다.

하르모니아는 아버지가 가끔 입에 올리던 태번의 왕족을 떠올렸다. 이름이 카드모스였던가. 공식적으로 정혼한 사이는 아니지만, 아마 내년쯤 아버지는 그녀의 혼담을 본격적으로 진행시키기 위해 제 초상화를 들고 바다를 건널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결혼으로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을 것인지에 대해 완벽하게 흥정할 것이다. 이미 물밑 작업은 거의 끝낸 상태였다.

아버지의 일을 그르치지 않기 위해서는 티끌만큼의 결점도 없는 신부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하르모니아는 처음으로 그에 반하는 선택을 했다.

후원을 빙자해 프레데릭을 만나는 것이 그 시작이었다. 춤 수업에서 느꼈던 굶주림과 같은 갈망이 조금씩 심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과감히 신사복을 입고 그에게 다가섰다.

덤불 속에 가시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꽃을 더듬는 손을 거두지 않을 것이다. 덤불 속의 모든 꽃이 아름답지는 않겠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꽃의 향기조차 맡을 수 없다.

3)

하르모니아는 그녀가 쓰는 소설 속 여주인공이 보석처럼 팔려 가 원치 않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아니, 그 여주인공만이라도.

1) 쇼팽에 대한 조르주 상드의 언급 중 일부 수정 인용.

2) 쇼팽에 대한 프란츠 리스트의 언급 중 일부 수정 인용.

3) 조르주 상드의 시 「상처」 일부 수정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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