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44)화 (44/146)

44. 사건의 서막

경마대회 이후 공작저의 모든 사람들은 바짝 기합이 들어간 상태였다. 며칠 뒤에 있을 가면무도회 때문이었다.

리던 사교계에는 사철이 없다지만, 그럼에도 본격적인 시즌은 가을이었다. 금년 프시케가 데뷔탕트를 치렀던 왕궁무도회를 시작으로, 경마대회와 연극제, 음악회, 자잘한 티 파티가 줄줄이 열렸다.

약 한 달간 정신없이 모임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지쳐 갈 때쯤, 가이 포크스 데이에 여는 데본셔 공작저의 가면무도회와 불꽃놀이가 시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 관례였다.

‘여왕 위에 캐번디시가 있다.’는 말은 과언이 아니었다. 공작저의 무도회는 규모와 예산에서 모든 연회를 압도했다.

여왕이 들으면 드러누워 있다가도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지를 만큼 화가 날 이야기지만, 사교계 인사들은 고리타분한 왕궁무도회보다는 가면을 쓰고 화끈하게 노는 데본셔 공작저의 가면무도회를 더 선호했다.

무도회 준비로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공작저의 사용인들만큼 분주한 것이 최근 데이모스의 정신 상태였다. 경마대회에서 프레이아 고든레녹스와 은밀하게 만남을 가진 후로, 그는 반쯤 혼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프시케 스튜어트를 치워 버린다면, 프레이아 고든레녹스는 데이모스가 원하는 그 어떤 것을 주겠다고 했다. 부끄러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무엇을 줄 거냐고 몇 번을 물었지만, 프레이아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데이모스도 프레이아도 더 이상 어린아이들이 아니었다. 리던에서 프레이아를 향한 데이모스의 집착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중 그의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지긋지긋해하는 사람이 프레이아였다.

프레이아가 약속한 대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데이모스는 그녀의 말을 쉬이 믿기 어려웠다. 머리가 나쁘긴 해도 바보는 아니었다. 도도하게 굴던 여자가 단숨에 태도를 바꾸어 그런 제안을 한다는 건 아무리 대가리를 굴려 봐도 풀기 어려운 난제였다.

프시케 스튜어트를 치우는 일도 그랬다. 죽여 버리는 것이 가장 깔끔한 처리겠지만, 이곳은 문명화된 리던이었다.

몇백 년 전과 같이 야만적으로 칼을 휘두르거나 독살해 버렸다가는 아무리 자신이 소공작이라도 벌을 면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여왕의 머나먼 친척이라는 프시케의 신분 때문에, 함부로 행동한다면 괘씸죄가 추가되어 실형을 살 수도 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여자 스스로 살던 곳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시케는 거머리처럼 공작저에 딱 붙어서 지내고 있지 않은가.

차라리 머저리 같은 놈과 눈이라도 맞아 버린다면 파혼의 이유로 삼을 텐데, 프시케 스튜어트는 샤프롱인 더비 백작부인과 하르모니아에게 둘러싸인 채 수녀처럼 굴었다. 꼭 필요한 자리가 아니라면 참석하지도 않고 저택에 머물면서 이리저리 참견하고 다니는 꼴이라니.

“그녀를 치워 주면 그대가 원하는 걸 줄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깃했다. 데이모스가 남자로서의 자각이 들었을 때부터 그의 일편단심은 프레이아 스펜서, 프레이아 고든레녹스에게 향해 있었다.

몸이야 의미 없이 섞을 수 있다 해도, 마음은 꾸준히 프레이아의 것이었다. 누구를 안든, 누가 제 아래에 깔려 발버둥 치든 그 얼굴에 프레이아를 대입했다.

비올레타를 아꼈던 것은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프레이아를 그려 넣지 않아도 되는 여자. 게다가 꽤 똑똑하기도 해서, 주제에 넘치는 비싼 드레스와 장신구를 몸에 걸치고 나타나 프레이아를 흉내 냈다.

그래서 돈을 물 쓰듯 쓰며 그 갸륵한 매춘부를 치장해 주었다. 그 노력이 가상하고 기특해서, 그리고 치장할수록 프레이아와 더 비슷해져서.

그런데 이제, 전혀 닮지 않은 여자의 얼굴에 프레이아를 덧그릴 필요도, 프레이아를 꼭 닮은 여자에게 돈을 쥐여 줄 필요도 없게 된 것이다. 프레이아 본인이 스스로 제가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말이다.

그 느낌은 어떨까. 존재한다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나 실제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경전 속 여신과 같은 그녀의 육체를 가지는 느낌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프레이아가 불을 붙이자 가슴속에서만 들끓던 욕망은 폭탄이 되었다. 폭탄이 메다 꽂힌 심장이 출력한 뜨거운 피가 이리저리 분출되어 전신으로 흘러나갔다.

주겠다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아니, 애초에 거부할 선택권이 자신에게 있었을까.

프레이아는 알고 있다. 자신이 그녀의 제안을 절대로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 믿음에 데이모스는 확실히 보답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프레이아 고든레녹스를 차지해, 다시는 에우로스 그 사생아 새끼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면 되는 것이다.

결정을 내렸으니 실행만이 남았다. 프시케 스튜어트를 치워 버리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아예 불가능하지도 않았다.

죽이는 방법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육체가 아니라 정신을 죽여 버리는 방법도 있다. 그편이 뒤탈 없고 깨끗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자의 정신을 죽이는 일은 쉽고 간단하다.

“그대가 언제나 내게 바랐던 것 말이에요.”

침이 고인 입안에서 화이트채플에서 늘 빨던 아편의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환각에 취한 것처럼 데이모스는 혼자 앉아 톡 쏘는 편지지의 향기를 들이마시며 킬킬 웃었다.

* * *

사무엘은 경마대회에 참석했다가 곧바로 채스웍 하우스로 마차를 달렸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에우로스는 멀쩡히 리던에서 무도회까지 참석해 놓고 새벽에 말도 없이 더비셔로 떠났다.

공작저에 갔다가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황당했던지. 친구인 저에게라도 미리 언질을 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

“축하해, 이번에도 이클립스가 우승했어.”

화나는 것은 화나는 것이고, 사무엘은 지금 에우로스의 동업자로서 이곳에 온 참이었다. 경마대회의 수익금이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그렇겠지.”

시가를 피워 물며 에우로스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렇겠지, 라니. 이번에는 위험할 수도 있었어. 이클립스가 경기 시작 전까지 맥도 못 추고 병든 것처럼 있는 바람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어디 아픈가, 하고 사람을 불러 진찰까지 시켜 봤는데 아무 이상은 없고.”

드디어 이클립스의 은퇴식을 거행할 때가 되었나 싶어 어찌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아무 이유도 없이 짜증이란 짜증은 다 내고, 비실비실거리는 말의 비위까지 맞추고 살아야 하나, 자괴감마저 들었었다.

“사무엘, 이클립스는 영악한 말이야. 경기 전에 눈을 속인 거지.”

“무슨 그런 말이 있어. 말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그리고 그랬다 해도 눈을 속일 이유는 뭐야?”

에우로스의 말에 사무엘은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이클립스가 똑똑한 말이라는 사실은 잉그린트에서 말 좀 타 봤다 하는 사람들은 다 알았지만, 그 정도로 비약해 말의 의도까지 상상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냥 컨디션이 안 좋았던 거지, 속이긴 뭘.

“이클립스가 자네보다 낫군, 사무엘.”

에우로스가 피식 웃었다.

이클립스는 종종 시합 전 아픈 척하고 다른 말들을 안심시켜 기합을 빼놓기도 했다. 말들도 그들 중 누가 가장 잘 뛰는지 알았다.

가장 잘 뛰는 이클립스의 상태가 좋지 않으면 다른 말들은 안도한다. 그러고는 막상 경기에서 질주하는 이클립스를 보고는 그대로 사기가 떨어져 달리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클립스가 자네보다 낫겠지, 에우로스.”

에우로스의 말에 잠시 짜증이 났던 사무엘은, 되돌려 줄 말을 생각해 내자 기분이 좋아졌다. 어쩐지 놀려 주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

“여기까지 도망쳐 온 이유가 뭐야?”

그래서 사무엘은 짐짓 모른 척 물었다.

“도망이라니, 여긴 내 집이야.”

에우로스가 미세하게 짜증 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갑자기 나에게도 말하지 않고 이곳으로 온 게 도망이 아니면 뭐지?”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나가.”

에우로스는 채스웍 하우스에 온 이래로 쭉 저기압이었다.

척척한 날씨 때문인지, 싸늘한 기온 때문인지, 만사 신경질이 났지만 참고 있던 중이었다. 그 와중에 능글거리며 제 속을 떠보는 사무엘에게 제일 신경질이 났다.

“이클립스도 축 처져 있다가 쏜살같이 달리던데, 그 주인 되는 자는 영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들었어.”

“누가 그래?”

“그건 알 것 없고.”

사무엘의 귀에 잔소리하는 더비 백작부인의 칼칼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잠시 채스웍 하우스에 다녀왔더니 에우로스가 영 예전 같지 않다는 둥, 친구가 되어서 관심도 없냐는 둥 하면서 저를 붙잡고 끝없는 잔소리를 해 대는 통에 어찌나 곤란했던지. 경마대회에 더비 부인이 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미처 피해 다닐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그나저나, 황금화살 클럽에서 연락이 왔어.”

사무엘이 주머니에서 꼼꼼히 봉인된 작은 서신을 꺼냈다. 흰 봉투 위에 금박을 입혀 만든 화살 문양이 번쩍하고 빛을 뿜었다.

“데이모스 캐번디시와 관련된 일이라고 하더군.”

에우로스는 인상을 썼다. 클럽에서 저런 식으로 밀봉해 전달하는 서신은 중요도 극상을 뜻했다.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야, 한심한 데이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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