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밀회
“와 줘서 고마워요.”
프레이아가 수줍어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밀실 안으로 들어온 데이모스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잠시 주춤했다. 만개하기 직전의 붉은 양귀비꽃처럼 화려한 듯, 청초한 듯, 그녀가 웃고 있었다.
데이모스에게 프레이아가 그런 얼굴을 내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이 상황이 믿기 어려워 얼이 다 빠져 버린 데이모스가 가까스로 물었다.
“그 편지를 보낸 사람이 정말 그대였어, 프레이아?”
데이모스는 화이트채플에서의 사고 이후 공작저를 벗어날 수 없었다. 공작의 엄중한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우로스가 미리 손을 쓴 덕분에 대충 수습되기는 했지만, 나가서 또 헛짓거리를 하다가 기껏 막아 둔 소문이 퍼지면 낭패였다.
어깨와 팔을 다친 것이지, 아랫도리를 다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데이모스는 그간 여러 번 외출 시도를 해 왔다. 그러나 번번이 가로막혔다. 공작이 데려다 놓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 돌아가며 그를 감시하고 있었고, 그 눈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다행스럽게도 서신의 수발신을 제한해 놓은 것은 아니어서 데이모스는 경마대회 바로 이틀 전, 눈을 번쩍 뜨이게 할 편지를 받게 되었다. 고든레녹스가의 인장이 찍힌, 프레이아 고든레녹스 부인이 보낸 편지였다.
평생 프레이아가 제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던가. 데이모스가 기억하기로는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데이모스는 그녀가 쓴 편지를 한참 노려보다가, 쓰다듬었다가, 품에 안았다가, 별별 짓을 다 한 후, 나이프로 봉투를 열었다. 톡 쏘는 향기를 짙게 내뿜는 편지지에는 안부를 묻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쾌유를 빈다는 말도 함께였다.
그 상황이 꽤나 비현실적이어서, 데이모스는 그 편지지를 한참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편지지가 보통의 것보다 두꺼웠다. 마치 두 장의 종이를 겹쳐놓은 것처럼. 그는 그 종이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생각대로 편지지는 두 장이었다. 모서리가 정교하게 붙어 있어 얼핏 보면 한 장처럼 느껴지는 두 장이었다. 귀퉁이를 조심스레 떼어 내니 그 안에 다시 프레이아의 글씨가 있었다.
안부를 묻는 내용보다 더 믿을 수 없는 내용이 프레이아의 귀족적인 필체로 쓰여져 있었다. 데이모스가 눈을 끔뻑였다.
[할 말이 있어요. 내일 경마대회에서 만나요. 시간과 장소는 경마장에서 내 하녀가 전달할 거예요.]
프레이아 고든레녹스가 데이모스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잠깐의 고민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곧바로 경마대회에 입고 갈 의상부터 머리에 떠올렸다.
비올레타의 죽음은 이미 데이모스에게 아무 의미도 없어진 지 오래였다. 그가 비올레타를 안았던 것은 프레이아의 대체품으로서였다. 그 정도로 닮은 여자를 어디서 또 구할 수 있을까, 정도가 비올레타에게 가진 미련의 전부였다.
이제 진짜 프레이아를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런 생각조차 필요 없게 되었다. 데이모스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인 데본셔 공작은 데이모스가 경마대회에 참석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가 막고자 했던 것은 아들놈의 주색잡기였지, 사교 활동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프시케 스튜어트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패였다.
그는 아무런 기대 없이 프시케를 리던으로 데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의외로 새로운 사교계의 여왕 타이틀을 거머쥐며 괜찮은 성과를 내어 주었다.
그녀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가 데이모스에 대한 소문을 잠재우는 데 한몫 거들었으니 그것도 긍정적이었다. 그래서 공작은 데이모스에게 프시케와 동행하는 조건으로 외출을 허가했다.
결국 데이모스는 부상을 입고 저택에 감금된 지 열흘 만에 죽은 듯이 살던 병상 생활에서 벗어나 경마장의 밀실에 무사히 입성했다. 그 밀실 안에서 데이모스의 여신, 프레이아 고든레녹스가 후광을 뿜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 지냈나요, 데이모스?”
프레이아는 멍청하게 선 데이모스를 눈으로 죽 훑으며 물었다. 성격이 더럽고 잔인하며 온갖 음란한 짓은 다 하고 다닌다는 인간이지만, 데이모스는 프레이아에게만큼은 더없는 순정남이었다.
그 순정의 정도가 지나쳐서 문제이긴 하지만. 중구난방으로 날뛰는 순정을 제어하지 못해 자신을 닮은 매춘부와 나뒹굴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찌나 불쾌하던지.
“왜, 무슨 일로, 나를 부른 거야?”
데이모스가 물었다. 그러자 프레이아는 눈을 살짝 흘기며 그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데이모스는 펄쩍 뛰어오를 기세였으나 이내 아버지의 손을 잡은 돌아온 탕아처럼 순순히 끌려왔다.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그저, 오랜만에 차나 한잔하자고 불렀어요.”
“차를? 나랑?”
“나는 그대 부인이 될 여자의 샤프롱이 되길 거부했으니 공작저에 방문하긴 어렵고, 그대는 외출할 수 없으니 이런 식으로 만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왜, 어째서 나를 만나?”
데이모스는 제 앞에서 꼭 철부지 어린애처럼 발발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프레이아는 들리지 않게 혀를 쯧, 찼다.
“사실, 요즘 만날 사람이 없거든요.”
그러나 프레이아는 마뜩잖은 감정을 요령껏 숨겼다. 그리고 처량하고 처연한 표정으로 데이모스에게 하소연했다.
“그대가?”
데이모스는 그녀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프레이아는 리던 사교계의 정점이었다. 그런 여자가 만날 사람이 없다고 저를 보자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그대의 부인이 될 프시케 스튜어트 영애의 샤프롱을 원래 내가 하기로 했었어요.”
“그건 들었어.”
“그런데 사정이 생겨 못 하겠다고 했더니, 그때부터 날 오해하는 것 같더라고요.”
“오해? 누가?”
“프시케 스튜어트, 하르모니아 캐번디시, 그리고 세레스 더비 백작부인도요. 데이모스도 알고는 있잖아요. 하르모니아와 백작부인의 영향력이 꽤 크다는 것을요. 게다가 이번에 스튜어트 영애가 새로운 사교계의 여왕이 되었다고…….”
“사교계의 여왕? 누가 그따위 소리를 해?”
데이모스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를 꽥 질렀다.
그에게 사교계의 여왕은 오로지 프레이아 하나였다. 영원히 그래야만 했다. 스코틀린에서 온 천것에게 내어 줄 자리가 아니었다. 아름답고 고귀한 프레이아만이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지배해야 했다.
프레이아는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데이모스의 손을 잡고 그를 다시 앉게 했다. 보드라운 손이 살짝 그의 팔뚝을 스치자 데이모스는 흥분했던 것도 잊고 다시 뺨을 붉혔다.
“그래서, 난 이제 더 이상 예전의 프레이아가 아니에요, 데이모스.”
“무슨 소리야. 그대, 그대는 여전히 아름, 답고…….”
데이모스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프레이아가 제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대밖에 없네요, 데이모스. 여전히 날 좋게 보아주는 사람은.”
프레이아의 보랏빛 눈동자 위로 눈물이 쓸쓸하게 맺혀 올랐다.
데이모스는 그 눈물을 보자 깜짝 놀라 허둥지둥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프레이아는 어렸을 적에도 우는 법이 없었다. 소리를 빽빽 지르며 나동그라지는 한이 있어도, 절대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데이모스는 급하게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내밀었다. 손수건을 받아 들며 프레이아의 손가락이 또다시 데이모스의 손바닥을 살짝 긁었다 떨어져 나갔다.
“고마워요, 데이모스.”
펼쳐 든 손수건 뒤에서 프레이아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촉촉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내가 도울 방법이 있을까?”
안절부절못하며 데이모스가 물었다. 프레이아는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말해 줘, 내가 무얼 하면 되는지. 프시케 스튜어트는 나와 곧 결혼할…… 사람이고, 하르모니아는 내 여동생이야. 그렇다면 나만큼 잘 도울 수 있는 사람도 없겠지.”
“…….”
프레이아는 눈에서 손수건을 떼고 데이모스를 보았다. 데이모스는 진심이었다. 아무 여자나 후리고 다니는 남자에게도 진심이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그 진심의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이 여태껏 유쾌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달가웠다. 데이모스 캐번디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프시케 스튜어트를 치워 줘요, 데이모스.”
프레이아의 말에 데이모스의 눈이 커졌다.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예요. 그 여자를 내 눈앞에서 치워 주세요.”
“나라고 그 여자가 좋아서 결혼하겠다는 건 아니야. 여왕과 아버지 때문이지. 결혼해서도 프시케 스튜어트를 진정한 아내로 여기지 않으며 살 거고. 그러다 보면 이혼해 달라고 조를 수도 있고. 알잖아, 내가 결혼하고 싶었던 사람은…….”
프레이아는 살짝 손짓하며 그의 말을 막았다. 그의 신파에 동조할 마음은 없었다.
“그녀를 치워 주면,”
자수정을 닮은 눈동자에 눈물 대신 유혹이 들어찼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끔찍하게 아름다운 눈빛이었다.
“그대가 원하는 걸 줄게요.”
데이모스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불안한 듯 눈을 굴리다 프레이아를 다시 한번 보았다.
“그대가 언제나 내게 바랐던 것 말이에요.”
벌어질 듯 말 듯 살랑거리고 있던 양귀비의 꽃잎이 활짝 벌어졌다. 데이모스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환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