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41)화 (41/146)

41. 신사의 품격

“하실 말씀이 뭡니까?”

하르모니아는 한참 말이 없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느라 입을 뗄 겨를도 없었다.

여기서 목소리를 내면 한없이 떨려 나와 꼭 염소 같아 보일 것 같았다. 그건 안 될 말이었다. 지금 자신은 엄연히 신사였다.

마차는 프레데릭이 사는 이스트엔드의 다세대 주택 앞에 정차해 있었다. 마차를 세운 지도 수십 분이 흘렀다.

프레데릭은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마른침을 삼켰다. 신사복을 입고 콧수염을 어설프게 붙인 소공녀는 내내 침묵을 지켰다. 서로의 눈을 피한 채 창문만 바라보고 왔더니, 어쩐지 휙휙 지나가는 풍경에 멀미가 나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프레데릭이 그렇게 말하며 옆에 두었던 낡은 가죽 가방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하르모니아는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가 다시 거두어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다리를 꼬고 앉아 느긋한 신사인 척 흉내 내고 있었지만 영락없는 숙녀였다. 장갑을 낀 손이 무릎 위에 반듯하게 놓인 채 살짝 떨리고 있었다. 프레데릭은 웃음이 나올 것 같아 헛기침을 하며 가방을 잡았던 손을 제자리에 두었다.

“어……. 제안을 하나 하고자 합니다.”

하르모니아는 목소리를 탁하게 내리깔았다. 제발, 제발, 멋지게 울리는 남자 목소리처럼 들리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무엇입니까?”

프레데릭이 정면을 바라보자 하르모니아와 곧장 시선이 닿았다. 금방이라도 흔들릴 것 같은 눈빛을 감추려 하르모니아는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그, 클럽에서 당신의 연주를 자주 들었습니다.”

“…….”

“매우 훌륭했습니다. 진심으로요.”

프레데릭의 귀에 황금화살 클럽의 소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 서로 부딪치는 당구공 소리, 샴페인을 개봉하는 소리, 난잡하게 얽힌 소리들 속에는 아무도 귀 기울여 주지 않는 제 피아노 연주 소리도 있었다.

피아노 또한 그저 흘러가는 소리였다. 무의미한 소음이 한 겹 더해진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청자가 없어도 연주는 계속되어야 했다. 돈을 받았으니까.

그래서 연주했다. 소음을 못 들은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렇게 치다 보면 어느새 집중하고 있었다. 집중하면 제 연주 소리가 더 잘 들렸다.

어느 시점을 넘어서면 연주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적막한 고요 속에 움직이는 손가락만 보였다. 일렁거리는 촛불처럼 제 손가락도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서글프다는 생각을 했었나. 그런 생각도 사치였다. 서글픈 감정은 폴스카 어느 광장에 깃발처럼 매달아 두고 떠나왔다.

존경하여 목숨까지 바쳐도 상관없었던 사람이 새로운 왕처럼 군림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가 느낀 것은 일종의 서글픔이었다. 인생 전부를 걸어 뼈저리게 얻은 감정을, 고작 제게 집중하지 않는 신사들을 보며 재생하는 것은 낭비였다.

그럼에도, 소공녀가 한 격려와도 같은 말에 프레데릭은 멈칫했다. 왜인지 목 안쪽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가난한 주제에 건반 위로 던져진 지폐보다 그 말 한마디가 더 좋았다고 한다면, 아직 자신은 혁명의 낭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한심한 작자인 걸까.

“……감사합니다.”

하르모니아가 빙긋 웃었다.

콧수염을 붙이느라 발라 놓은 풀 때문에 웃을 때마다 입 주위 피부가 바짝 당겨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프레데릭과 같은 공간에서 이야기를 한다는 상황이 주는 흥분감 때문에 아프지도 않았다.

“그래서 후원을 하고 싶습니다.”

예상치 못한 말을 듣자, 프레데릭이 마음을 추스르느라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후원,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르모니아는 그동안 수없이 머리를 굴리며 생각했던 본론을 무작정 꺼냈다. 그러고는 겹친 양손을 조몰락거렸다.

프시케의 춤 수업이 끝나고 프레데릭은 더 이상 공작저에 오지 않았다. 하르모니아는 에우로스의 눈치를 보느라 황금화살 클럽에 당분간 출입할 수 없었다. 제가 가면 매니저가 곧바로 그에게 알릴 테고, 그럼 에우로스는 냉정하게 프레데릭을 해고할지도 몰랐다.

프시케에게 춤동작을 설명하는 척하며 그 뒤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프레데릭을 훔쳐보았다. 처음 황금화살 클럽의 어둠 속에서 느꼈던 감정이 애정을 수반한 동경이었다면, 공작저의 빛 속에서 느꼈던 것은 동경을 수반한 애정이었다.

노릇노릇한 가을의 햇살과 휘이익 불어오던 바람의 감촉과 섬세하게 울리던 피아노 소리는 큰 연회홀을 남김없이 채웠다. 그러고도 모자라, 하르모니아의 마음속을 서슴없이 파헤치며 들어왔다.

하나, 둘, 셋 박자를 맞추며 몸을 빙글빙글 돌리면 찰나의 순간에 프레데릭이 휙 지나쳤다. 그래서 몇 번이고 돌았다. 360도 중 어느 한 각도에는 반드시 그가 있었으니까.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프레데릭은 습관적으로 씩 웃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프레데릭은 반주를 하면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내내 자신의 손만 바라보며 연주했다. 그래서 눈을 마주칠 수도, 웃음을 볼 수도 없었다.

그러니 춤을 추면서도 즐겁지 않았다. 뱅그르르 돌면서도 설레지 않았다.

알고 있다. 제 시선이 부담이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또 알고 있다. 자신도 그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정식으로 소개하지요. 저는 조지 샌드라고 합니다. 작위가 없으니 이름을 부르면 됩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후원이었다. 제 이름으로 후원하면 남들 입에 오르내릴 수 있으므로 가명을 사용해 프레데릭을 도울 생각이었다.

신사복을 입고 다른 사람인 척 행동하면 가끔이나마 프레데릭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을 남성 후원자로 안다면 프레데릭은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더없이 완벽한 계획이었다.

“……그렇습니까.”

프레데릭은 하르모니아의 소개에 실소가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본인은 지금 자신이 얼마나 신사답지 못한 모습인지 알고 있을까. 몸에 꼭 맞춘 최고급 원단의 신사복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콧수염의 문제도 아니었다.

고이 포갠 두 손, 긴장하면서 높아진 미성, 가느다랗고 긴 목, 보송보송한 솜털이 돋은 흰 뺨, 당황해 깜박일 때마다 오르내리는 우아한 속눈썹. 절대 남자의 것일 수 없었다.

어두운 클럽 안에서는 어찌저찌 숨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마차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 정도의 밝기에서도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은 훤히 보였다.

그리고 푸른 눈, 귀족적인 그 눈매는 데본셔 공작저의 연회홀에서 제가 수없이 외면했던 것이었다. 소공녀가 춤을 추며 빙글빙글 돌 때마다 풍성한 드레스 자락은 위로 봉긋 솟았다가 천천히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치마가 솟아오르는 것처럼 마음이 조금 들뜨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가라앉을 때도 마음은 함께 추락했다. 들뜬 것보다 더 많이 가라앉았다.

그래서 피했다. 제게 닿는 시선을 모른 척하고 프레데릭은 내내 피아노에만 골몰한 척했다.

“제게 무엇을 바라고 후원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바라는 것은 없어요. 아니, 없습니다.”

기가 찼다. 후원을 하면서 원하는 대가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적어도 후원자를 위해 곡을 만들거나, 후원자가 여는 행사에서 연주를 한다거나, 혹은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인사하고 얼굴이라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 후원을 받는 자의 도리였다. 소공녀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면 무엇을 제게 후원해 주시려는 겁니까?”

“일단, 연주실이 있는 집과 매달 생활비, 품위 유지비를 제공할 생각입니다.”

프레데릭은 어이가 없었다. 데본셔 공작가가 대단한 갑부라더니 그게 사실이긴 한가 보다. 하긴, 켄싱턴의 그 저택만 하더라도 대단히 사치스러웠지.

“그렇다면 저는 거절하겠습니다.”

“네?”

의외의 대답에 하르모니아는 놀랐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후원이 왜 싫은 걸까.

간혹 귀부인들이 촉망받는 예술가들을 후원하며 이것저것 요구한다고 들었다. 심하면 정부로 두기도 한다고 했다. 그런 것도 아닌데, 이건 정말 좋은 기회 아닌가.

“조지 샌드 씨께서는 지금 저를 모욕하시려는 겁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후원은 거래입니다. 지금 제게 제안하신 것은 적선입니다.”

“…….”

“동정은 싫습니다.”

하르모니아는 말을 잃었다. 적선이라니, 그런 의도는 추호도 없었다.

가엾게 생각한 적은 있었다. 밤늦게까지 피아노를 쳐야 하는 고된 삶, 밀린 월세 때문에 악다구니를 들어야 하는 삶, 찢어진 가방을 수선하지도 못하는 삶. 그런 것들이 안타까웠다.

동정일 수도 있었다. 그녀에게 동정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어떠한가. 동정이 꼭 나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든 상대방을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면, 상대가 가진 약점을 동정하고 품어 주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몰리는 어미에게 버려진 강아지였고, 하르모니아는 그 강아지를 동정했다. 그래서 거두어 사랑을 주었다. 그리고 지금 몰리는 행복하다.

어째서 프레데릭은 제 감정을 왜곡하는 거지? 하르모니아는 어쩐지 분하면서도 지극히 서운해졌다.

제가 바라는 것은 대단치 않은 것이었다. 자신이 발견한 훌륭한 음악가가 완벽하게 음악에만 몰두해 성과를 내는 것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저를 바라봐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연인이 되어 달라고 조른 것도 아니었다.

“더 하실 말씀이 없다면 저는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제안은 감사합니다, 조지 샌드 씨.”

마차의 문이 세차게 닫혔다. 건물 안으로 재빨리 들어가 버린 프레데릭의 뒷모습이 어쩐지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했다. 다락방의 창문으로 희미한 촛불의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하르모니아는 그 어쩐지 공작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 자리에 오래 머물렀다. 눈물이 날 것 같아 그녀는 콧수염을 잡아 뜯었다. 그러자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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