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노랑나비
“프시케! 이 기사 좀 봐요!”
무도회가 끝나고 새벽까지 뒤척이던 프시케는 결국 늦잠을 자느라 아침 식사도 걸렀다. 식사를 마치고 프시케의 방을 찾은 하르모니아가 신문을 든 손을 흔들며 야단을 떨었다.
“데본셔 공작가의 차기 안주인이 될 프시케 스튜어트, 노랑나비라는 칭호를 얻다. 자애로운 앤 스튜어트 여왕 폐하께서 주최하신 본인의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모두를 홀리는 미모로 등장. 부상으로 인해 불참한 데이모스 캐번디시 소공작 대신 사교계의 총아 에우로스와 함께 플로어를 누벼. 더비 백작부인이 샤프롱으로…….”
하르모니아가 기사를 줄줄 읽어 내리자, 클라리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프시케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잠에서 덜 깨어 그런지, 아니면 내내 불편한 심경 때문인지 몽롱해 있던 상태였다.
“새로운 사교계의 여왕의 등장에 모두가 주목. 프레이아 고든레녹스 부인의 아성 무너지나.”
하르모니아는 특히 이 부분을 힘주어 읽었다. 그제야 프시케가 푸스스 웃었다.
“정말 잘됐어요. 이렇게 성공적인 데뷔라니. 어머니도 깜짝 놀란 눈치였어요.”
언제나 무심한 데본셔 공작부인까지 놀랐을 정도였다니,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나 보다. 프시케는 그리 생각했다.
“고든레녹스 부인을 생각하면 고소하지 뭐예요. 자기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겠죠. 어찌나 교만한지! 그 머리 장식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오히려 잘 어울린다고 칭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요.”
하르모니아는 아직도 프레이아만 생각하면 눈매를 파르르 떨었다.
급해서 아무거나 주워 먹었더니 결국은 탈이 났다며 펄쩍펄쩍 뛰었던 엊그제보다는 조금 진정된 상태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가 가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프레이아가 고작 머리 장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샤프롱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하르모니아에게는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다. 알았어도 쓸데없는 오해 때문에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분개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기분이 어때요, 새로운 사교계의 여왕님?”
짓궂은 질문에 프시케는 작게 웃기만 했다.
“이제 성공적으로 데뷔를 했으니, 결혼 전까지 활발하게 사교 활동을 하는 일이 남았어요. 그건 내가 도와줄게요.”
“사교 활동이요?”
프시케가 고운 이마를 찡그렸다. 데뷔탕트만 치르면 끝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쩐지 머리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네, 이제부터가 시작이니까요. 설마 데뷔탕트 무도회가 끝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그런 줄 알았어요…….”
끙끙 기어 들어가는 대답을 들으며 하르모니아가 크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데뷔탕트는 그저 첫걸음일 뿐이죠. 이제부터 할 일이 태산이에요. 초대장이 오면 발신인을 알려 줘요. 그러면 참석 여부에 대해 제가 조언할게요. 참고로 데본셔 공작가 사람들은 아무 파티나 모임에 참석하지 않아요. 그러니 꼭 미리 물어봐 주세요.”
“그럴게요.”
“그리고, 꼭 참석해야 하는 행사가…….”
하르모니아는 손가락으로 볼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다음 주에 경마대회가 있어요. 리던의 귀족 가문 대부분이 참석해요.”
“경마요? 하지만 더비 백작부인께서…….”
프시케는 고개를 갸웃했다. 일전에 사무엘에게 들었던 말과 어제 백작부인이 엄하게 호통치며 했던 말을 떠올린 까닭이었다.
“더비 백작부인은 질색하시지만, 어쩔 수 없어요. 아버지는 경마대회의 제일 큰 후원자예요. 에우로스의 말도 출전할 거고요.”
“이클립스, 말인가요?”
“알고 있군요. 굉장한 말이에요. 작년에 경기하는 걸 봤는데 켄타우로스가 지상에 내려온 것 같았어요. 에우로스에게 한번 타 봐도 되냐고 물었는데 들은 척도 안 하길래 몰래 마구간에 간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어찌나 사나운지, 뒷다리를 차는 시늉을 해서 그대로 도망쳐 버렸어요.”
하르모니아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프시케는 이클립스가 순순히 등을 내어 주던, 그 신비로웠던 밤을 떠올렸다.
뽀얗게 안개가 피어오른 길 위에 규칙적으로 또각또각 울리던 이클립스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뒷덜미를 간질이던 평온한 숨소리와 귓바퀴를 넝쿨처럼 감아 들어온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도. 그 밤은 고요했으되 소리로 가득했다.
“아,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게 하나 더 있어요.”
하르모니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이 포크스 데이에 열리는 불꽃놀이 행사랍니다. 그날 공작저에서 가면무도회를 열어요.”
프시케도 이날은 알고 있었다.
리던 탑에서 참수당해 죽은 스코틀린 메리 여왕의 아들은 이후 잉그린트의 왕으로 즉위했다. 그 왕을 암살하고 의사당을 화약으로 폭파시키려던 음모가 발각된 것을 기념해, 잉그린트에서는 매년 반란을 계획했던 날에 화약 대신 불꽃놀이 폭죽을 터뜨렸다.
불꽃놀이는 본래 국가 체제의 안녕을 기원하는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흐르자 유희의 개념으로 의미가 변질되었다. 데본셔 공작저에서 불꽃놀이 전에 가면무도회를 열어 흥을 돋우는 것이 현재 리던 사교계가 가이 포크스 데이를 즐기는 방식이었다.
“가면무도회는 데본셔 공작가의 전통이기도 해요. 미래에 공작부인이 될 테니, 이번 무도회 준비 과정을 주의 깊게 살펴보도록 해요. 원래는 어머니가 맡아 하셨는데, 작년부터 제게 물려주셨어요. 언젠가는 저도 어느 가문의 안주인이 되어 연회를 열어야 할 테니까요.”
프시케는 하르모니아의 말에서 풍기는 약간의 씁쓸함을 읽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감히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녀가 춤 수업 때 피아노 반주자를 가끔 넋 놓고 바라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춤을 가르치는 선생도 눈치챘을 것이다. 어쩌면 그 연주자도 느꼈을지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 건반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절대로 고개를 들지 않았으니까.
“저, 소공작님은 좀 괜찮으신가요?”
프시케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데이모스 캐번디시는 이 저택 안에서 프시케가 가장 어려워하는 사람이었다. 공작인 아레스 캐번디시를 대할 때보다도 더 거북했다. 실제로 마주 대한 적도 몇 번 없긴 하지만, 곧 부부가 될 사이인데 그 남자만 떠올리면 가슴이 덩어리째 뭉쳐 버리는 것 같았다.
“데이모스는 큰 부상이 아니었으니 금세 털고 일어날 거예요.”
하르모니아는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나 데이모스의 상태를 생각하면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지금 데이모스가 자리보전하고 있는 이유는 어깨와 팔의 부상 때문이 아니었다. 그깟 상처쯤 붕대로 동여매고 일어나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비올레타인지 뭔지 하는 여자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미친놈처럼 법석을 떨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눈앞에서 피 흘리며 죽었으니 충격일 수는 있다. 그러나 데이모스가 괴로워하는 이유는, 비올레타의 죽음이 아니라 프레이아 고든레녹스를 닮은 존재의 죽음 때문이었다.
“프레이아를 쏙 빼닮은 여자를 어디서 다시 구해 올 수 있겠어!”
그 말을 들은 하르모니아는 데이모스가 인간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데이모스의 분노는 엉뚱하게도 에우로스에게로 튀어, 수시로 에우로스에게 복수하겠다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에우로스는 그 말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지만, 하르모니아는 어쩐지 불안해졌다.
어릴 적, 데이모스가 눈이 돌아 에우로스를 죽도록 팬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데이모스는 꼭 악마 들린 사람 같았다.
이상하게도 데이모스는 자신이 그르친 일을 에우로스에게 덮어씌워 분노를 표출하곤 했다. 그리고 하르모니아가 보기에 그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은 무엇도 아닌 에우로스의 태도였다.
에우로스는 데이모스의 분노에 대체로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적당히 맞아 주고, 적당히 당해 줬다. 그러면 데이모스는 더 길길이 날뛰었다.
차라리 대거리를 하면 데이모스의 발광이 덜할 텐데, 에우로스는 데이모스에 관한 한 초연하게 굴었다. 하기야, 에우로스는 데이모스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그러했으니 그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유독 데이모스가 그걸 참지 못하는 거였다.
에우로스가 데이모스에게 주먹을 휘두른 적은 단 한 번이었다. 데이모스가 여동생인 자신에게까지 폭력을 행사하려는 것을 보았을 때였다. 그때를 떠올리니 데이모스가 인간 말종이라는 사실이 다시금 마음에 아로새겨졌다.
그러므로 하르모니아는 프시케만 생각하면 어쩐지 죄의식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잘 대해 주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프시케에게 당장 데이모스의 상황을 세세하게 말해 주지 못하는 것도 찔리고, 말해 주자니 그것도 내키지 않았다. 세상에 어떤 여자가 데이모스와 결혼하면서 행복해할까.
프레이아 고든레녹스, 아니, 소싯적의 프레이아 스펜서가 데이모스 캐번디시와 결혼하는 것이 모두에게 최선이었다. 둘은 분명 하늘이 내려 준 이상적인 부부가 되었을 것이다. 교만과 질투의 결합으로 지옥 바닥을 굴렀어야 했는데.
“금년 내로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고 들었어요.”
생각에 골몰해 있던 하르모니아를 보며 프시케가 내키지 않는 말을 입에 올렸다. 그것이 여왕이 보낸 전령으로부터 똑똑히 전해 들었던 결혼의 시기였다. 올해 안으로 결혼할 것.
브라이튼의 어떤 귀족도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결혼하지 않건만, 여왕은 그들에게 약혼식도 건너뛰고 곧바로 결혼하기를 명했다. 제 사후에 데본셔 공작이 다른 마음을 품을까 경계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10월도 끝나 가니 얼마 남지 않았네요. 시기는 연말이 될 거라고 들었어요.”
하르모니아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마도 결혼식은 올해 끝까지 미뤄지다가 거행될 것이다.
아레스 캐번디시는 여왕의 명령을 재깍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버티다가 금년 내로 여왕이 죽으면 혼사를 틀어 버릴 작정이었다. 죽지 않는다면 할 수 있는 만큼 여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 위해 12월 31일에 예식을 치를 예정이었다.
“에우로스는 오늘 새벽 더비셔로 떠났어요. 당분간 저택이 텅 빈 것 같겠네요.”
“그래요?”
“에우로스는 경마대회 때 꼭 리던에 있는데, 이번에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채스웍 하우스에서 지내다가 데이모스의 결혼식에 맞추어 오겠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하는 하르모니아는 어쩐지 기뻐 보였다.
반면 프시케의 얼굴은 암울해졌다. 어둠의 정원 속에 서 있다가 저와 한참 눈을 마주친 후 인사도 없이 등을 돌려 버린 남자를 떠올린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