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38)화 (38/146)

38. 나비효과

“아가씨, 어땠어요?”

늦은 밤까지 자지 않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클라리사가 반색하며 프시케를 맞았다.

“클라리사, 나 조금 피곤해.”

불길한 예감이 들어 클라리사는 입을 다물었다. 방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혼자 있고 싶어.”

프시케의 말에 어쩔 줄 몰라 하던 클라리사는 조용히 방을 나가며 고심했다.

혹시 무도회에서 잔뜩 무시라도 당하고 온 게 아닌가, 그 조잡한 머리 장식 때문인가, 아니면 결혼할 남자와 함께 참석하지 않아서인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동행했던 에우로스나 하르모니아에게 물어보면 실례가 되겠지.

이제 클라리사도 아랫사람이 윗전들에게 함부로 말을 걸어서는 안 된다는 잉그린트의 예법 정도는 알고 있었다. 복도를 걷는 클라리사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프시케는 창을 열었다. 처음 잉그린트에 왔을 때는 아직 여름의 훈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초가을이었다. 그 후로 하루하루 바람은 조금씩 차가워졌고, 대기의 무게는 무거워졌다.

그녀는 입을 벌리고 숨을 들이켰다. 습한 공기가 바싹 말라 버렸던 입안을 채웠다. 저녁 내내 프시케는 목이 탔다. 하르모니아가 건네주는 샴페인을 몇 잔 마셨어도 그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원에 누군가가 있었다. 숨을 참았으나 냄새는 호흡과 상관없이 흘러 들어왔다. 익숙한 시가 냄새였다. 프시케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서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오늘 무도회의 주인공은 곧 데본셔 소공작의 아내가 될 프시케 스튜어트였다.

갤러웨이 성의 붙박이 유령을 실제로 만나게 된 사람들은 궁금증으로 눈을 빛냈다. 에우로스의 에스코트를 받아 연회홀에 입장하는 순간부터 프시케의 일거수일투족은 주목을 받았다.

처음에는 프시케의 옆을 비운 데이모스 캐번디시에 대한 이야기로 수다가 시작되었다.

“캐번디시 소공작은 어째서 함께 오지 않았을까요? 혹시 그 화이트채플의…….”

“쉿, 조용히 해요.”

“데이모스 캐번디시는 갑자기 독감에 걸렸다지 뭐예요.”

“그래서 그 사생아가 대신 데리고 왔군요.”

그 후에는 에우로스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저 남자는 정말 근사하네요.”

“사생아만 아니었어도 리던의 일등 신랑감이었을 텐데요.”

“이번에 손댄 회사 주식이 급등했다지요?”

“돈 버는 능력은 있는 것 같은데, 그래 봤자 사생아인 것을요.”

다음에는 더비 백작부인의 차례였다.

“프레이아 고든레녹스 부인이 갑자기 복통으로 쓰러졌다지 뭐예요.”

“그래서 샤프롱으로 더비 백작부인이 오신 거군요.”

“지금껏 그렇게 거절하시더니 이번에는 어쩐 일로?”

“저분이 와 주신 걸 보면 저 아가씨가 꽤 맘에 드셨나 보네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입에 오르내린 사람이 프시케였다. 데이모스와 에우로스, 더비 백작부인에 대한 모든 말들을 다 합쳐도 프시케 한 사람에 대한 것보다 많지 않았다.

노란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프시케는 눈 높은 사교계 사람들의 수준을 충족시켰다. 동시에 은근슬쩍 촌뜨기의 모습을 기대하던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유령이라더니!”

“저렇게 아름다운 숙녀를 두고 왜 그런 소문이 돌았을까.”

“드레스가 소박하네요. 그래도 꽤 잘 어울려요.”

“머리 장식은…….”

수군거리던 사람들은 모두 목소리를 낮추었고 부채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이야기들은 이상하게 너무나 잘 들렸다. 절대로 듣지 못하도록, 이야기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단속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괜찮아요?”

프시케는 점점 아래로 내려가던 시선을 퍼뜩 올렸다. 에우로스가 살짝 고개를 내리고 그녀를 바라봤다. 새파란 눈동자에 약간의 걱정이 담겨 있었다.

“일부러 들으라고 하는 얘기입니다. 리던 사교계의 저열한 평가 방식이니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공자님은 괜찮으신가요?”

“무엇이요?”

“공자님을 두고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 말이에요.”

에우로스는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 불빛과 만나 파편처럼 사방으로 부서졌다.

그러자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에우로스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가 손등으로 입을 가린 채 속삭였다.

“웃어요, 스튜어트 영애.”

“네?”

“사람들에게는 잔인한 구석이 있습니다. 상대가 울면 동정하는 척하지만 결국 무시하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상대가 웃으면 무시하지 못해요. 웃음은 강한 자의 전유물이거든요.”

에우로스는 말을 마친 후에도 만면에 띤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주변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미뉴에트가 연주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곡은 오늘 갓 데뷔한, 프시케 스튜어트를 위한 무도회의 첫 춤곡이었다.

“준비됐어요?”

에우로스가 손을 내밀었다. 언제나 그랬듯, 흰 장갑을 낀 매끈한 손이었다.

“춤을, 제대로 연습을 못 해서…….”

프시케는 그 손을 내려다보며 머뭇거렸다. 어느 순간부터 에우로스의 손을 잡는 것이 망설여졌다. 다시 마음이 쿡쿡 쑤시는 것 같았다.

“순서는 다 외웠어요?”

에우로스가 묻자 프시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서라면 이미 지긋지긋하게 외웠다. 하르모니아는 춤 수업이 있는 날이면 매번 연회홀로 찾아와 자신을 가르치고 확인했다. 그 열정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발목은 어때요?”

“그것도 괜찮아요.”

프시케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구두에 대해 고맙다고 말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얼굴이 붉어질 것 같아 감사 인사는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그럼 걱정하지 말아요.”

에우로스가 손을 조금 더 가까이 내밀었다.

“잡아요.”

익숙한 재촉이었다. 프시케는 에우로스가 말한 대로 웃었다. 그를 흉내 내어 환하게.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 홀의 중앙으로 향했다. 무대에는 두 사람만이 섰다.

느린 박자의 무곡에 맞추어 에우로스가 리드를 시작했다. 군더더기 없는 몸놀림이었다.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프시케는 마치 에우로스와 여러 번 춤을 추어 보았던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여유로우면서도 절제된 리드 덕에 프시케의 춤은 꽤 그럴듯해 보였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호의적인 시선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프시케가 빙글 돌았다. 에우로스는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받쳐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했다. 스텝에 맞추어 팔랑거리던 노란 드레스 치마가 튤립 꽃송이처럼 동그랗게 부풀었다. 동시에 에우로스의 눈매가 갸름해졌다.

다시 한번 빙글 돌았다. 프시케의 검은 머리카락에 달린 나비 장식이 바르르 떨었다. 동시에 그린 듯 웃던 에우로스의 얼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에우로스의 변화를 알아챈 프시케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물었다.

“괜찮으세요? 안색이 좋지 않아요.”

에우로스는 다시 입술에 힘을 주었지만,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더 이상 처음에 짓던 그 환한 웃음이 아니었다. 그는 이를 꽉 물었다. 그리고 프시케의 시선을 피했다.

춤이 끝나고 마주 보며 인사를 하는 남녀를 향해 사람들이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짧은 춤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긴 것은, 날갯짓하는 노랑나비의 잔상이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여왕이 불참한 여왕 주최 무도회는, 그럼에도 성공적이었다. 꽃잎에 사뿐히 앉은 나비처럼 리던 사교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프시케 스튜어트 덕분이었다.

* * *

그녀와의 춤은 나쁘지 않았다.

하나도 빠짐없이 외웠다는 미뉴에트의 스텝을 놓칠세라, 조금이라도 자세가 흐트러질세라 열심히 집중하는 프시케를 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러다 입으로 가쁜 숨을 내뱉을 때면 달콤하고, 보드랍고, 따뜻하고, 간질거리는 향기가 안개처럼 둘을 감싸는 것 같았다.

빙글, 가볍게 몸을 돌리자 에우로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한 번 더 빙글, 그녀가 돌았다. 그리고 에우로스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내가 처음 무도회에 가게 되면, 꼭 이걸 하고 갈게.”

프시케 스튜어트는 약속을 지켰다.

여유를 부리던 마음에 세게 바람이 일었다. 지구 어느 한 곳에서 파닥거린 작은 나비의 날갯짓은 구체의 반대편에서 태풍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했다.

프시케의 머리카락을 장식한 나비가 춤을 따라 팔랑팔랑 날았다. 그리고 그 미약한 바람은 맞은편에 있던 에우로스에게로 건너와 거센 돌풍으로 바뀌었다.

돌풍은 에우로스의 마음 이곳저곳을 강타했다. 그리고 가장 약한 부분부터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모른 척 외면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별 감정 아닌 것처럼 무시하며 그렇게 대충 넘겨서는 안 됐다. 변명으로 아슬아슬하게 땜질해 놓은 곳이 무너졌다. 무너진 곳에서 감정이 범람했다.

마음을 얻는 것은 쉽다고 자신해 왔다. 틈만 조금 벌리면 되는 일이라며 오만을 떨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비의 날갯짓이 벌려 놓은 틈에 에우로스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사무엘의 말대로, 마음을 뺏겨 버린 쪽은 그였다. 방심한 대가였다.

“실례하겠습니다.”

춤을 마친 에우로스는 급히 홀을 빠져나왔다. 돌풍이 안개를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추한 진실만이 남았다.

제가 프시케 스튜어트에게 했던 말과 행동은 어린 날 푸른 드레스를 입은 아이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생각과 의도는 완벽히 현재의 프시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제 아무것도 모호하지 않았다.

감정을 배제한 계약 관계를 운운했던 제가 우스워 그는 피식 웃었다. 완벽하게 균형을 맞추어 웃고 있던 입술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갑자기 짜증이 치밀었다. 더 이상 이런 식은 곤란했다.

기억의 봉인. 에우로스의 특기였다. 이미 비루한 나귀 같던 과거를 완벽히 봉해 버리고 선두에 서서 달리는 준마로 탈바꿈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그는 그렇게 할 것이었다. 달콤하고 보드랍고 따뜻하고 간질거리는 향기를 씻어 내고, 그를 칭칭 감은 안개의 실을 풀어낼 작정이었다.

서늘한 밤바람을 쐬고 돌아온 에우로스의 표정 또한 서늘해져 있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마음 졸이던 프시케가 기척을 듣고 고개를 돌렸을 때, 에우로스는 웃었다. 지금껏 프시케에게 지어 보인 적 없는, 더없이 환하고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그러나 프시케는 따라 웃지 못했다. 강렬한 빛을 쬔 꽃잎이 마르듯이 그녀의 입안도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마른 입술을 깨물자, 아무것도 모르는 하르모니아가 샴페인을 권했다. 아무리 목을 축여도 갈증은 해갈되지 않았다.

한 발짝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더비 백작부인의 표정이 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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