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균형과 불균형
더비 백작부인은 프시케가 입은 보수적인 디자인의 드레스를 보고는 흡족해했다. 사상은 진보, 취향은 보수. 알쏭달쏭했지만 프시케는 노부인의 참견이 싫지 않았다.
“그건 무엇인가요?”
“이건…….”
프시케는 말끝을 다 맺지 못했다. 옆에서 치장을 돕던 클라리사도 일순 긴장했다. 더비 백작부인이 클라리사의 손에 들린 나비 모양 머리 장식을 낚아채며 물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갤러웨이에서 가져온 것인데…….”
조곤조곤 말하면서도 프시케는 갈등했다.
이번에도 이 물건 때문에 백작부인이 샤프롱 역할을 거부한다면 그때는 자신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야 소중한 약속이라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고약한 고집으로 보일 것이다.
“오늘 무도회에 하고 갈 생각인가요?”
“……다른 걸 하는 편이 좋을까요?”
더비 백작부인의 눈이 또렷이 프시케를 응시해 왔다. 프시케는 노부인의 손에 들린 그 머리 장식을 보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다른 걸로…….”
“그걸 왜 나에게 묻죠?”
노부인이 동시에 말했다.
“네?”
“스튜어트 영애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보아하니 오늘 드레스에 잘 어울리겠군요.”
백작부인은 머리 장식과 프시케의 드레스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제야 프시케는 한시름 놓은 표정이 되었다.
클라리사는 약간 뚱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하르모니아의 말에 따르면 리던 사교계의 대모라고 불린다는 노부인이 허락했으니 말을 더할 수 없었다.
“대체 그 장식에 무슨 사연이 있는 거예요?”
옆에서 구경하던 하르모니아가 물었다.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고 있던 중이었다.
클라리사는 프시케의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다 말고 쿨럭쿨럭 헛기침을 했다. 거지 소년이 준 거라고 폭로해야 할까, 그녀는 잠깐 고민했다.
“선물로 받은 거예요.”
프시케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그 아이와 헤어진 뒤 몇 년 동안이나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고대했다.
프시케는 나이를 먹은 후에야 저를 업었던 그 남자아이의 등이 유독 말랐었고, 제 손이 움켜쥐고 있던 어깨가 무척이나 앙상했었음을 깨달았다. 그게 심각한 기아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선물을 받으며 했던 약속은 진심이었다. 그 이후에 그 진심은 공고해졌다.
다시 만날 수는 없어도 그날의 호의와 배려에 나름대로 보답하는 방법은 그 외에 없었다. 그렇게 작고 마른 몸으로 저를 보살피고 업어 주었다고 생각하니 그때의 그 아이가 한없이 안쓰러워졌기 때문이었다.
클라리사는 아마 그 아이가 일찍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가난한 집 자식들이 젖을 뗄 나이부터 혹독하게 일하다가 어린 나이에 죽어 버리는 일은 흔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프시케는 울었다. 클라리사는 당황해했으나 프시케의 질문에 조심스레 답해 주었다. 빈곤층 아이들이 겪는 참혹한 일들에 대해서.
“누가 준 선물인데요?”
질문은 시작하는 것이 어렵지, 그 후에는 쉽다. 하르모니아는 흥미 가득한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어릴 적 친구가요.”
“친구요? 남자예요?”
하르모니아가 사심을 담아 묻자 백작부인이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캐번디시 영애, 남의 사생활에 대해 그렇게 꼬치꼬치 묻는 것은 숙녀의 도리가 아니랍니다.”
“하지만 궁금한걸요, 부인.”
하르모니아는 여전히 프시케를 보고 있었다. 꼭 대답을 듣고 싶은 눈치였다.
그럴 만도 했다. 모두가 기겁하는 싸구려 머리 장식을 여왕의 하사품이라도 되는 양 구는 사연이 너무나도 궁금했던 것이다.
“음, 어릴 적에 길을 잃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도와주었던 친구가 헤어지면서 선물로 주었던 거예요.”
“낭만적이네요! 그 친구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토탄을 캐던 아이라서, 그 후에는 만날 수 없었어요.”
죽었을 테니까요. 프시케는 조용히 뒷말을 삼켰다.
“토탄이요?”
하르모니아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프시케는 잠깐 후회했다. 귀족 아가씨가 낮은 신분의 아이와 어울려 노는 것은 품위 없는 행동이었다. 더비 백작부인 쪽을 살폈으나, 부인은 별 반응이 없었다.
“이제 충분히 납득이 되었어요.”
하르모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토탄을 캐는 아이라면 주급으로 5펜스도 받지 못한다. 그건 빵 한 덩이 정도 겨우 살 수 있을 만한 금액이었다. 그런 아이의 선물이니 값진 물건이 맞다.
하르모니아는 급격히 울적해졌다. 끈 떨어진 가방을 안고 먼 길을 걷던 프레데릭의 뒷모습이 생각나서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더비 백작부인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들고 있던 머리 장식을 조용히 클라리사의 손에 넘겨주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클라리사가 그것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프시케의 머리카락에 꽂고 단단히 고정시켰다. 자연스레 늘어뜨린 새카만 머리카락에 노랑나비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사연을 듣고 나니 그 나비가 그렇게 조잡해 보이지만은 않는 것 같았다. 알알이 박힌 모조 진주와 가짜 보석들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 머리 장식은 프시케와 정말 잘 어울렸다. 어린 에우로스의 선택은 탁월했다.
* * *
“레이스를 조금 더 달 걸 그랬나 봐요.”
하르모니아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리던 사교계에 나서는 첫 무대이니 화려하게 꾸며 주어도 좋으련만.
“데뷔탕트를 하는 숙녀가 너무 사치스럽게 보이면 매력이 없는 법이지요.”
더비 백작부인의 의견은 달랐다. 자고로 데뷔 무대에서는 청초한 매력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었다. 요즘 아가씨들은 너무 눈에 띄려고만 한다는 비판도 함께였다.
프시케는 둘의 의견을 조율해 드레스 뒷면에 자잘한 리본 몇 개를 더 달았다. 치장이 끝나자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노란 실크 드레스는 장식을 거의 달지 않았지만 옷감에 모양을 잡아 실루엣을 드러낸 것이었다. 치마폭에 주름을 넣어 풍성하게 보이게 하는 갈리아식 디자인이었다. 과하지 않게 부풀린 소매가 고상한 느낌을 주었다.
“이제 구두까지 신으면 완벽해지겠어요.”
하르모니아가 그렇게 말하며 하녀에게 눈짓했다. 하녀는 아침에 배달된 구두 상자를 들고 프시케 바로 앞에 앉아 리본을 풀었다.
프시케의 발목은 거의 나은 상태였지만, 아직 높은 굽을 신기에는 무리였다. 그래도 하룻저녁 정도는 참아 볼 요량이었다.
“세상에!”
“너무 예쁘네요.”
하녀가 상자의 뚜껑을 들어 올리자, 구두 한 쌍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르모니아와 클라리사가 탄성을 터뜨렸다.
구두는 드레스의 색깔에 맞추어 노란색 비단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아주 작은 진주 알갱이를 일일이 꿰어 만든 우아한 디자인이었다. 일전에 본드 스트리트의 제화점에서 프레이아와 함께 골랐던 높은 굽의 신발이었다.
“그런데, 모양이 좀 특이하네요.”
백작부인이 구두 한 짝을 들어 살폈다. 구두는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었다. 새 구두는 앞부분에도 높이 있는 밑창을 달아 앞으로 쏟아지는 발의 각도를 최소화한 모양이었다.
“아직 발목이 불편해서 이렇게 만들었군요!”
하르모니아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프시케는 놀라서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제화점에서 주문했던 디자인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때는 분명 프레이아의 닦달에 못 이겨 뾰족한 굽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건 아마도 제 다친 발목을 고려해 추후에 누군가 디자인을 수정한 것일 테다. 그 사람이 프레이아 고든레녹스일 리는 없었다.
모호한 감정이 조그맣게 소용돌이쳤다. 불길하다고 여기기에는, 마음이 너무도 따스하게 젖었다. 아니, 어쩌면 그 따스한 감정 자체가 불길한 것일지도 모른다. 프시케는 옅게 웃다가 이내 차게 다스렸다.
뒷굽이 너무 높다면 구두 앞쪽의 굽도 높이면 되는 것이다. 감정도 그런 식으로 균형을 잡아 추슬러야 했다.
한쪽이 높아지면 저번처럼 넘어져 버릴 수도, 그래서 다칠 수도 있다. 넘어지지 않고 다치지 않으려면 솟아오른 마음의 반대편 높이를 조절해 주어야 한다.
‘프시케 스튜어트는 데이모스 캐번디시와 결혼한다.’
여왕의 명령을 되뇌자 솟아오른 쪽의 맞은편 감정이 크기를 키웠다. 모호하지 않은, 명확한 현실에 대한 자각이었다. 그렇게 다시 아슬아슬한 균형이 만들어졌다.
“이제 나가요. 에우로스가 기다릴 거예요.”
하르모니아가 재촉했다.
“에우로스라니요?”
프시케가 묻자 하르모니아가 손뼉을 짝 쳤다.
“이런, 내 정신 좀 봐요. 아까 더비 백작부인께서 샤프롱을 해 주신다는 것 때문에 너무 흥분했었나 봐요. 데이모스가 다치는 바람에,”
이 말을 하면서 하르모니아는 프시케와 백작부인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오늘 무도회에는 에우로스가 동행하게 되었어요.”
프시케는 가까스로 태연한 표정을 지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오해한 하르모니아가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아버지께서 특별히 부탁하셨대요. 그러니 데이모스가 가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서운해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균형에 균열이 갈까, 프시케는 서둘러 마음을 정리했다. 계단의 난간을 잡은 손에 힘이 세게 실렸다.
무너지면 안 돼. 넘어지면 안 돼.
“저기, 에우로스네요.”
계단 아래에 그가 있었다.
검은색 연미복을 입은 채 무심한 얼굴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던 그가 위층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채도 높은 금발을 단정하게 빗어 넘긴 남자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머금어졌다.
“제 오빠지만, 정말 잘생기긴 했다니까요.”
하르모니아가 소곤거렸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내내 꾹 참았던 숨이 탁, 하고 터져 버렸다. 그렇게 터져 버린 감정이 한쪽으로 쏠리며 애써 맞추어 놓은 수평을 기울였다. 마음의 뒤축이 다시 솟아올랐다. 어쩐지 다친 발목처럼 욱신거리는 느낌이 드는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