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에우로스는 프시케를 좋아한다
“나쁘지는 않군요.”
프시케가 돌아서자 프레이아 고든레녹스가 간단히 평했다.
“다행이네요.”
프시케가 그리 말하며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살폈다. 가봉을 마치고 공작저로 배송된 데뷔탕트용 드레스를 입어 보던 차였다. 프시케 스튜어트를 위해 여왕이 열어 주겠다고 큰소리쳤던 무도회가 어느덧 내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노란색 드레스는 몸을 많이 드러내는 디자인이 아니었다. 갤러웨이 촌뜨기 아니랄까 봐, 필사적으로 가슴골을 숨기고 어깨를 가리는 드레스를 입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순전히 옷감의 주름만으로 굴곡을 드러내는 옷이 탄생했다.
네모 형태로 파인 목선과 부푼 소매 형태가 프시케 스튜어트에게 썩 잘 어울리기는 했지만, 이 변변찮은 꼴을 하고서 왕궁무도회에 갔다가는 비웃음을 살 것이 뻔했다. 게다가 이번 무도회는 본인이 주인공 아니던가.
프시케 스튜어트가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나대지만 않았어도, 그래서 다치지만 않았어도 프레이아는 첫 번째 쇼핑 이후로 여러 번 에우로스와 본드 스트리트에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자신의 뛰어난 감각으로 저 별것 없는 드레스에 어울리는 장신구들을 골라 주었을 텐데.
발목을 접질린 탓에, 프시케는 오늘까지 바깥 외출을 삼가고 있었다. 단 한 번 외출했던 때가 에우로스와 말을 타고 밤의 승마를 즐겼을 때였다. 에우로스와 보내는 밤 시간은 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갤러웨이 성에서 처음 산책했을 때도, 함께 산속의 위스키 증류소에 갔을 때도, 그리고 채스웍 하우스의 푸른 수염의 방에서 함께 별을 보았을 때도 그랬다.
몽롱한 기분은 늘 여운을 남겼다. 에우로스의 말처럼 모호한 것은 불길한 것이 아니라고 프시케는 그녀 자신을 다독였지만, 썩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불확실한 것은 불편했다.
어쨌든 프시케는 처음 쇼핑을 나갔던 날 이후, 늘 공작저에서 상인을 불러다 물건을 골랐다. 외출이 금지되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프레이아는 에우로스와 함께하는 시간이 아니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래서 하르모니아는 내내 괘씸해했다. 심보가 불순하다는 뒷담화도 함께였다.
하르모니아는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어미 짐승처럼 바지런히 필요한 것들을 골라 주었고, 프시케는 대부분 그녀의 결정을 따랐다. 그러나 한 가지, 머리에 착용하는 장신구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았다.
하르모니아는 프시케가 보여 준 머리 장식을 보고는 난색을 표했다. 그 후로 몇 번 더 그녀를 설득해 보려 했지만, 곧 포기했다. 프시케가 평소와는 달리 퍽 단호했기 때문이었다.
“머리카락은 무엇으로 장식할 건가요? 목걸이는? 귀걸이는?”
프레이아의 물음에 프시케는 수줍게 웃으며 제 머리에 꽂힌 머리 장식을 가리켰다. 프레이아는 뚫어지게 그것을 보다가 푸훗 웃었다.
“그걸 하고 가겠다는 거예요, 스튜어트 영애?”
그녀는 프시케의 새카만 머리카락을 고정하고 있는 노란색 나비 모양 장식을 살폈다. 어느 구석 마음에 드는 것 하나 없는 싸구려였다.
나무를 얇게 깎아 모양을 낸 나비 형태의 본체가 노란색 염료로 칠해져 있었고, 그 위에 모조 진주와 가짜 유색 보석들이 엉성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돈 없는 평민 여자들도 하지 않을 법한 물건이었다.
“이런 건 어디서 샀죠?”
프레이아가 물었다.
“어릴 적, 선물로 받았던 거예요.”
프시케는 그녀가 이 장식을 결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하르모니아도 그랬다. 클라리사도 펄쩍 뛰었다. 심지어 클라리사는 프시케가 데뷔탕트 무도회에 그 머리 장식을 하겠다고 하자 몰래 숨기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시케는 포기하지 않았다. 언젠가 제가 데뷔탕트를 하게 되면, 꼭 그 장식을 하고 가겠다고 선물을 주었던 사람에게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약속을 잊었을지 몰라도 프시케는 기억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물려주었던 패물을 팔 때도 손대지 않았다. 돈이 될 만큼의 값어치가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농담이죠? 진심으로 이걸 하고 왕궁에 가겠다는 건 아니죠?”
프레이아의 질문에 프시케는 대꾸하지 않고 빤히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농담이 아니었고, 진심이었다. 함께 있던 하르모니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프레이아는 기겁했다. 저런 저급한 물건을 자랑스레 머리에 달고 가겠다는 용기는 가상하나, 이건 품위의 문제였다. 제가 담당하는 숙녀가 그 꼴을 하고 무도회에 참석한다면, 샤프롱인 프레이아 고든레녹스의 명예가 실추될 것이다.
“절대 안 돼요.”
“어째서요?”
“그건 데본셔 공작님의 얼굴에 먹칠하는 일이에요. 샤프롱인 저까지 뒷말에 오르내릴 거라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여왕 폐하께서 친히 영애를 위해 여는 무도회예요. 모든 준비는 데본셔 공작가에 맡기셨고요. 그런데 영애가 그따위 물건을 머리에 꽂고 등장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수군거리겠어요?”
“그렇지만…….”
프레이아의 의견에도 일리는 있었다. 하지만 프시케는 쉽게 그 말에 따르겠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소문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건 아니었다. 이미 프시케는 에우로스와 프레이아, 프레이아와 데이모스의 소문을 듣고 마음이 불편해지지 않았던가.
하지만 소문에 휘둘려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면서 살 생각은 없었다. 갤러웨이 성의 붙박이 유령이라는 소문이 전해졌을 때 웃으며 넘겼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프시케의 입에서는 끝내 수긍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프레이아는 가식의 가면을 벗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프시케 스튜어트는 건방진 계집애였다.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주제에 입만 살아서 꼬박꼬박 말대답을 했고, 말귀를 알아듣지도 못하고, 제 마음대로 하겠다는, 거슬리는 여자였다.
무엇보다 에우로스를 생각하면 더 그랬다. 그날 보았던 에우로스의 웃음, 프시케가 쓰러지자마자 곧바로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살피던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프레이아는 반복해서 곱씹었다.
그저 신사의 예의일 것이다, 애써 치부할수록 마음속 불안감이 속삭였다. 그게 아니라고, 그건 평소의 에우로스와 매우 다른 태도였다고.
황금화살 클럽에서 사무엘을 만났을 때, 그 불안을 감추려 노력하며 그녀는 물었다. 그리고 그들이 리던으로 돌아오던 길에 채스웍 하우스에 들러 며칠 머물렀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 불안감이 부피를 기하급수적으로 키웠다.
에우로스가 그 저택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더비 백작부인에게 수모를 당하면서도 찾아가 설득하고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수용하며 어렵게 구입한 집이었다.
그 후에도 그가 채스웍 하우스에 들인 정성은 대단했다. 예술품들을 외국에서 들여오고, 최고급 대리석을 구해 장식하고, 정원을 조경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녀는 그 저택의 안주인이 될 자신을 그렸다.
결국 그 저택에 발 한 번 들여 보지 못한 채 프레이아 스펜서는 프레이아 고든레녹스가 되었다. 결혼한 후에도 저택에 초대해 달라고 여러 번 졸랐지만 에우로스는 사무엘을 제외한 그 누구도 채스웍 하우스에 데려가지 않았다.
치사했지만 참았다. 언젠가 그 꿈같은 저택에 초대될 최초의 여자 손님은 자신이 될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었다.
에우로스는 또다시 제 소망을 깼다. 데뷔탕트 무도회의 파트너가 되어 주길, 남편이 되어 주길, 채스웍 매너의 첫 여자 손님으로 만들어 주길, 그녀가 에우로스에게 바라던 것들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에우로스가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때는, 상응하는 조건이 있을 때뿐이었다. 계약이나 내기와 같은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러나 프시케 스튜어트는?
저 갑갑한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싸구려 장식을 하겠다고 우기는, 벽창호 같은 프시케에게 어째서 에우로스는 매우 드물게 인간적인 호의를 보이는가? 왜 가식 없는 웃음을 지어 보이는가? 무엇 때문에 그녀의 부상을 걱정하는가?
답은 하나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 입으로 꺼내기는커녕, 마음에 잠시라도 품고 있고 싶지 않은 의혹.
에우로스는 프시케 스튜어트를 동정한다.
아니다, 에우로스는 타인을 동정하는 남자가 아니다. 특히나 여자는 더욱.
에우로스는 프시케 스튜어트에게 관심이 있다.
아니다, 에우로스는 고작 관심 따위로 실행하는 남자가 아니다.
에우로스는 프시케 스튜어트를 좋아한다.
프레이아는 또다시 손톱을 입에 물었다.
늘 예쁘게 다듬었던 손톱은 요즘 지저분하게 끝이 뜯겨 나가 있었다. 결혼했으니 망정이지, 미혼이었다면 어머니에게 불려가 다시 손톱에 쓴 약을 발라야 했을 것이다.
“프시케 스튜어트 영애.”
쓰라린 인정의 시간이었다.
“저는 영애의 샤프롱을 할 수 없겠습니다.”
프레이아의 말에 프시케의 수발을 들던 클라리사가 들고 있던 빗을 뚝 떨어트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프시케의 목소리가 조금 떨려 나왔다.
“영애의 명예를 위해, 저의 불참 사유는 잘 지어 사교계에 흘리겠습니다. 갑자기 복통으로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하면 되겠지요.”
“고든레녹스 부인, 그게 말이 되나요? 프시케의 명예가 아니라, 약속을 어긴 부인의 명예를 걱정하시는 것 아니고요?”
“하르모니아,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하르모니아가 비난했지만, 프레이아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무도회가 내일인데, 어쩜 그리 무책임할 수 있죠?”
하르모니아의 음성이 높아졌다. 그러자 프레이아는 프시케 쪽으로 몸을 돌려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준에 맞지 않는 영애를 보살필 만큼 제가 한가하지 않아서요, 프시케 스튜어트 영애.”
프시케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머리 장식으로 괜한 고집을 부렸나 잠깐 후회하긴 했지만, 프레이아 고든레녹스는 그게 아니었어도 무엇이든 꼬투리를 잡으려 했을 것이다.
프레이아가 우아하게 인사했다. 구불거리는 새빨간 머리카락이 어깨 앞쪽으로 꽃잎이 떨어지듯 쏟아져 내렸다.
그때 하르모니아는 깨달았다. 자신과 프시케가 잠시 붉은 양귀비의 환각에 취했었음을.
“있다고 다 보여 주지 말고, 안다고 다 말하지 말고, 가졌다고 다 주지 말고, 들었다고 다 믿지 말아요.”
제가 프시케에게 당부했던 말이었다. 들었다고 다 믿으면 안 되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