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첫사랑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하르모니아는 말없이 제 책상만 뚫어지게 보았다. 반들반들하게 광이 올라오는 상판 위로 입을 꾹 다문 자신의 모습이 흐리게 비쳤다.
침묵이 이어지자 에우로스가 일어났다.
“말하지 않겠다면 관둬. 프레데릭과 얘기하는 편이 더 낫겠군.”
미동도 하지 않던 하르모니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사람은 상관없어, 에우로스.”
“상관없는 사람이 왜 저택에 있는 거지?”
“그건!”
하르모니아가 잠시 멈칫했다가 숨을 골랐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내가 클럽에 드나드는지 몰라. 여기서도 나와 이야기한 적 없다고.”
“그리고?”
“토마스를 시켜서 프레데릭이 클럽으로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 만나게 했어. 데본셔 공작저에서 춤 수업을 하는데 피아노 반주할 사람을 구한다고, 그렇게 말을 전하라고 시켰어.”
“하!”
에우로스가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왜 그랬지? 무엇 때문에?”
“말했잖아. 그 사람의 피아노 연주가 좋아.”
“그것뿐이야?”
“다른 이유가 필요해?”
프레데릭의 연주가 최고인 것은 사실이었다. 수많은 대가들의 연주를 들어왔던 그녀였다. 안목이 없을 리가 없었다.
“고작 프시케 스튜어트의 춤 연습 반주자를 구하자고, 데본셔 공작가의 귀한 영애가 그렇게까지 했다는 말을 믿으라고?”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하르모니아가 고집스럽게 입술을 꾹 물었다.
당연히 연주 때문만은 아니었다. 황금화살 클럽에서의 프레데릭은 눈부셨다.
천박한 환락의 가운데에서도 잃지 않던 고결함, 살짝 기울인 고개를 따라 흐르던 비탄, 구부정한 등이 감추지 못한 꼿꼿한 자존심. 그녀가 어둠 속에서 목격한 프레데릭과 그의 연주에 대한 빛나는 소회였다. 그 잔상은 그를 처음 본 날 밤부터 지금까지 그녀를 지배했다.
“프시케의 데뷔탕트 전날까지만이야. 그 후에는 이곳에 올 일 없을 거야.”
하르모니아의 말에 에우로스는 얼굴을 구겼다.
그는 여자가 짓는 표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가 어떤 얼굴을 하는지, 그 격정을 이기지 못할 때 어떤 짓까지 할 수 있는지, 리던에서 그것을 가장 잘 아는 남자가 에우로스였다.
하르모니아는 사랑에 빠졌다. 처음 책상을 선물했던 날 그녀가 내보였던 감격과 흥분의 감정을 그는 기억했다. 책상을 가지고 싶다고 털어놓았을 때 드러내던 갈망과 그 소원이 공작부인에 의해 좌절되었을 때 표출했던 실망도.
지금의 하르모니아는 그 감격, 흥분, 갈망, 실망이 정리되지 않은 채 아무렇게나 포개져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면 어떻게 할 건데?”
“뭘 어떻게 한다는 거야? 내가 저 남자에게 고백이라도 할까 봐 걱정돼?”
하르모니아는 말을 툭, 내뱉고 이내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 버렸다. 고백이라니.
이건 에우로스에게 대놓고 ‘나는 프레데릭을 좋아한다, 그래서 얕은수를 써 가면서까지 공작저에 불러다 훔쳐보고 있다.’라고 털어놓은 것과 진배없는 짓이었다.
에우로스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제 이복 여동생은 가끔 다혈질이긴 했지만 말실수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앞뒤 재지 않는 걸 보니 중증이다.
“프레데릭을 좋아한다고 지금 내게 알려 준 거야?”
에우로스의 빈정거림에 하르모니아의 얼굴이 거의 울 듯 변했다.
“실언이었어. 잊어 줘.”
“하르모니아.”
에우로스는 본디 남의 일에 관여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현재 이 상황을 만든 이가 하르모니아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 프시케 스튜어트가 잠시 스쳤지만 에우로스는 무시했다.
“나는 사생아야.”
“그 얘기가 왜 지금 나와?”
에우로스의 말에 하르모니아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제 이복 오라비의 입에서 저런 말이 흘러나오는 건 처음이었다. 남들 입으로야 수없이 듣는 말이었지만, 본인이 뱉은 적은 없었다. 그는 늘 신분에 초월해 보였고, 신분보다 월등해 보였다.
“사생아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 한쪽 발은 장미 꽃잎이 둥둥 뜬 깨끗한 물속에, 한쪽 발은 악취가 진동하는 똥물에 각각 담그고 사는 사람들이 사생아야. 깨끗한 물에 담긴 발을 똥물에 다시 집어넣기는 죽어도 싫고, 똥물에 담긴 발을 깨끗한 물에 집어넣자니 그 물까지도 더러워질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사생아라는 족속이야.”
“그래서?”
“한쪽 발에서 향기가 풍겨도, 반대쪽 발에서 올라오는 냄새 때문에 멸시를 받아. 그건 네가 지켜봐서 잘 알겠지.”
당연히 잘 알고 있다.
데이모스만 봐도 그랬다. 에우로스가 데본셔 공작저에 발을 들였을 때 데이모스는 사생아와는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는 것마저 역겹다고 했었다.
어머니인 공작부인은 대개의 일에 무심하고 회피했기에 대놓고 에우로스를 핍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끔 그를 개나 소 같은 가축 보듯 했다.
아버지인 공작은 그들보다는 나았다. 그렇다고 해도 만일 에우로스가 보여 준 능력이 형편없었다면 곧바로 그를 시골 어딘가에 처박아 놓고 돌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하르모니아가 물었다.
“네가 좋아하는 프레데릭은, 양발을 모두 똥물에 담그고 사는 자야.”
그 말에 하르모니아의 얼굴에 분명한 적의가 돌았다.
“온몸에 장미수를 뒤집어쓴 데본셔 공작가의 소공녀가 관심을 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야.”
“아니야, 그 사람은! 그 사람은 달라. 똥물이라니, 어떻게 그를 그런 식으로 모욕할 수가 있어?”
“폴스카 출신에, 귀족도 아니고, 클럽에서 소액을 받으며 피아노를 치는 남자를 그럼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브라이튼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을 가진 네가 한번 말해 봐. 귀족들이 그를 어떻게 보고 평가할지 가장 잘 알 만한 사람이, 귀족 중의 귀족, 하르모니아 캐번디시 영애 아닌가?
에우로스가 이죽거리자, 하르모니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모르지 않았다. 에우로스의 말대로 귀족들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그녀였다.
프레데릭을 처음 보았던 밤, 하르모니아는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그와 마차 사이의 거리는 참으로 멀고, 길은 길고, 그 방향은 반대였다.
그것은 곧 에우로스가 한 말의 핵심이기도 했다. 에우로스가 짚어 주기 전부터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왠지 억울했다. 프레데릭은 그런 한심한 자가 아니었다. 귀족은 아니었지만 그의 연주에는 품위가 넘쳐흘렀다. 어째서 에우로스는 그런 점을 보아주지 않는 걸까?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천부인권설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들은 다 허상이다. 결국 하늘이 내린 인권은 귀족들에게만 있는 것인가.
“함부로 말하지 마, 에우로스.”
“이게 진실이야.”
“아니야.”
“백번 양보해서, 내가 모른 척하고 네가 프레데릭과 가까워진다고 치자. 그랬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아?”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약속해.”
“하지만 넌 그 작자를 공작저까지 데리고 왔지. 깜찍하게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로. 이미 너는 실행으로 옮겼어. 두 번째가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르모니아.”
“믿어 줘. 반주만 끝나면, 그러면 다시는 이런 일을 벌이지 않을게.”
“…….”
에우로스는 피로한 듯 이마를 짚었다.
“그 사람을 해고하지 말아 줘.”
“네 알 바 아냐.”
“그 사람, 이스트엔드의 빈민가에 살아. 월세도 제때 내지 못하고, 매일 같은 옷만 입어. 신고 오는 구두는 깨끗하지만 뒤축이 다 닳아 있어. 가방끈도 떨어져서 안고 다닌단 말이야.”
“그걸 어떻게 알지?”
“토마스를 시켜서 알아봤어.”
하르모니아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말했다.
에우로스가 황당해할 것은 알지만, 그래도 지금은 해고를 막는 것이 먼저였다. 에우로스는 냉정한 구석이 있어서, 제가 미리 당부하지 않는다면 오늘 득달같이 프레데릭을 내쳐 버릴 것이었다.
“가지가지 한다, 하르모니아.”
“미안해.”
어째서 프레데릭이 아니라 에우로스에게 사과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하르모니아는 진지했다.
토마스는 하르모니아가 별도로 부리는 사람이었다. 신사복을 입고 황금화살 클럽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에우로스가 믿을 만한 사람을 수소문해 그녀에게 붙여 주었다. 조지 샌드에게는, 여자인 하녀가 할 수 없는 일들을 처리할 만한 남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토마스에게 그런 일을 시키는 것이 미안하긴 했지만, 어쨌든 하르모니아는 지시했다. 그리고 토마스는 충실히 결과물을 가져왔다.
프레데릭은 폴스카 혁명을 피해 잉그린트로 망명한 평민 출신 음악가였다. 고국에서는 꽤 이름을 날리던 피아노 연주자이자 작곡가라고 들었다. 또 이스트엔드의 다세대주택 다락방에서 월세살이를 하고, 황금화살 클럽을 비롯한 몇 군데에서 연주를 하며 돈을 번다고 했다.
그리고 결혼하지 않았다. 그 보고를 듣고 하르모니아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의 혼인 여부는 자신과 상관없는 것이었지만, 하여튼 그랬다.
하르모니아는 자신이 제 지위에 어울리는 결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기뻤다. 그냥 그런 마음이었다.
“프시케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하르모니아는 머뭇머뭇 일어나며 말했다. 자신을 쏘아보는 에우로스의 시선을 모른 척하고 그녀는 쏜살같이 연회홀로 내달렸다.
춤 수업은 막바지였다. 프시케는 선생이 시범으로 보여 주는 동작을 앉아서 열심히 따라 하고 있었다.
프시케의 뒤로 프레데릭이 고개를 숙인 채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 보였다.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하르모니아는 창문을 열었다.
넓은 창을 통해 오후의 마른 햇살과 휘파람 소리를 내는 부드러운 바람이 뒤엉켜 들어왔다. 연노랑 햇빛이 프레데릭의 창백한 얼굴에 음영을 드리웠다. 바람 소리가 피아노 연주에 실려 홀 안을 춤추듯 맴돌았다.
프레데릭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와 하르모니아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잠깐 놀라는 듯하더니 이내 씩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웃음이었다.
1)
하르모니아는 굶주린 듯 그 달콤한 맛에 취해 있었다. 첫사랑이었다.
1) 이반 투르게네프 《첫사랑》 문장 일부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