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31)화 (31/146)

31. 조금 미루었을 뿐

“에우로스도 이제 한물간 것인가!”

사무엘이 연극조의 과장된 말투로 외치며 에우로스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에우로스, 그대는 속임수를 쓰지 않으려 하면서도, 부정하게 얻고 싶기도 하지. 실행은 두려워하지만, 이루고 싶은 일은 성취하고 싶어 한다네.”

1)

빙글빙글 웃으며 놀려 대는 그를 보며 에우로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닥쳐, 사무엘.”

에우로스는 책상 위에 올려둔 시가 케이스를 열었다. 그가 시가를 하나 꺼내자마자 사무엘이 낚아채며 실실 웃었다.

“이야기를 마저 끝내시지요, 카듀의 왕이 되실 분이여.”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사무엘?”

에우로스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스튜어트 영애의 마음은 언제 얻을 거야?”

“또 그 소리군.”

“데이모스와 결혼하기 전에 일을 끝내는 게 좋지 않아?”

에우로스가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무엘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프시케가 결혼하면 갤러웨이의 영지는 지참금이 될 것이고, 잉그린트 법에 따라 아내는 지참금에 대한 권리를 남편인 데이모스에게 양도할 수 있었다. 그러면 카듀 강의 엘도라도는 데이모스의 것이 되는 것이다.

“결혼 이후에 다시 논의하지.”

“그러다가 소유권이 데이모스에게 넘어가면?”

“그럴 일은 없어.”

“그걸 어떻게 확신해?”

“그럴 테니까.”

사무엘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에우로스의 확언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었다.

원래 이렇게 막무가내였나. 지금껏 막무가내 역할은 사무엘의 담당이었다. 그리고 에우로스의 역할은 사무엘이 했던 근본 없는 주장들을 지적하고, 수정하고, 무시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뒤바뀐 역할 변화에 사무엘은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었다.

“에우로스, 뭐가 문제야?”

“뭐가 문제냐니?”

사무엘은 에우로스의 주변에 흐르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류를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애초에 그 먼 갤러웨이 성까지 나를 데려간 목적은 함께 카듀 강의 금광을 개발할 계획을 세우기 위함이었어. 안 그래?”

에우로스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네는 나에게 프시케 스튜어트의 마음을 얻어서 계약을 성사시키겠다고 말했지.”

“그래.”

“그런데 대체 이게 뭐야? 한 달이 다 되어 가는 이때까지 말도 못 꺼냈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이야?”

“정정하지. 말을 못 꺼낸 게 아니고, 안 꺼낸 거야.”

“그게 그거지.”

“아니야, 달라.”

“에우로스.”

“사무엘.”

둘은 동시에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짓궂은 눈빛과 짜증 섞인 눈빛이 맞부딪쳤다.

“설마, 마음을 얻으려다 마음을 뺏긴 건 아니겠지?”

“같잖은 소리 좀 그만해.”

사무엘은 이제 거의 자신하는 말투였다.

“내가 지금껏 자네를 보아 온 시간만 10년이야. 이 모습은 도무지 에우로스답지 않아.”

“대체 내가 뭘 어쨌길래?”

“분명하지 않잖아.”

“하!”

에우로스는 들고 있던 깃펜을 거치대에 쑤셔 넣었다.

분명, 명료, 명확, 명백, 확실. 이 모든 단어들은 에우로스의, 에우로스를 위한, 에우로스에 의한 말이었다. 분명히, 명백히 그것은 사실이었다.

불명확하고 불확실하게 태도를 취하면서 명확하고 확실하게 결과를 얻어 내며 살아왔다. 애매하고 모호하게 웃으며 단호하고 엄격하게 계산하고 행동했다.

그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그것은 누구보다 지금 앞에서 비웃음을 흘리고 있는 사무엘이 제일 잘 알았다.

“단지, 조금 미루는 것뿐이야.”

어쩐지 변명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도대체 이 역전된 분위기는 뭐란 말인가.

“에우로스, 딱 거기까지만 해.”

장난스러운 태도를 걷어 낸 사무엘이 진지하게 말했다.

“뭘?”

“네 마음 말이야.”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군.”

에우로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프레이아 고든레녹스가 무언가를 알아차린 것 같아.”

사무엘의 말에 에우로스의 표정이 돌변했다.

“무슨 말이지?”

“어제 황금화살에서 프레이아를 만났어. 그녀가 프시케 스튜어트에 관해 이것저것 묻더군.”

“더 자세히 말해 봐.”

“별말은 아니었어. 그 여자도 자존심 때문인지 캐묻지는 못했고. 그저 갤러웨이 성에서 무슨 일은 없었는지, 리던으로 돌아오는 여행은 어땠는지 두루뭉술하게 물으면서 자네와 스튜어트 영애의 사이를 알아보려 하더라고.”

“그래서?”

“채스웍 매너에 들렀다고 이야기했더니 눈빛이 바뀌었어. 프레이아 고든레녹스가 한번 데려가 달라고 예전부터 졸라 댔던 곳 아니었나.”

그 말을 하면서 사무엘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비밀은 아니었지만 괜히 말을 꺼내서 분란을 조장한 꼴이 되었다.

사실 사무엘은 에우로스의 마음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변태 같은 에우로스가 누군가를 각별히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사무엘은 지금껏 에우로스의 비정상적인 행태, 즉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는 사내답지 못한 행태에 대해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에우로스가 조금은 인간적이길 바랐다. 또한 진심으로 웃고 울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랐다.

열두 살부터 그들은 친구였다. 옆에서 지켜본 에우로스는 마치 초인과 같았다. 밤새워 공부했고 쓰러지기 직전까지 몸을 단련했다.

그에게 경쟁자는 없었다. 오로지 제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목표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능수능란하게 남의 감정을 가지고 놀면서도, 제 감정에 대한 부분은 어린아이보다 서툴렀다.

그러니까 조금은 풀어져도 괜찮지 않을까. 그 대상이 곧 동생의 아내가 될 여자라는 것이 꽤나 비극적이긴 했지만, 현재의 비극이 과거가 되면 희극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시간에는 모든 것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에우로스를 그대로 둘 생각이었다. 딱 여기까지만. 에우로스는 이성적인 인간이니 여자를 데리고 도망친다거나 하는 미친 짓거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그 감정을 양분 삼아, 미래에 적당한 영애와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되면 더 좋고.

카듀 강의 금광 개발이 늦어지는 것은 염려되었지만, 에우로스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루어 낼 것이다. 프시케 스튜어트가 자신의 재산을 쉽사리 데이모스에게 넘겨줄 만큼 물러 터진 여자가 아님을 사무엘도 이미 알고 있었다.

“…….”

“그리고 스튜어트 영애의 발목은 괜찮은지 묻더군. 그녀가 발목을 다쳤나?”

에우로스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프레이아 고든레녹스는 감이 좋은 여자였다. 그녀는 자신과 거의 처음 대면하다시피 했던 장미 정원에서 제 웃음의 의미를 곧바로 파악했다.

또한 끈질긴 여자이기도 했다. 배타하는 웃음에도 상관하지 않고 그녀는 이내 처세를 전환했다. 친구이자 투자자로 에우로스의 곁에 남은 것이다.

그것이 자신에게 이득이 되었으니 에우로스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희망을 주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수년간 공생하며 살아왔다. 에우로스는 프레이아의 명성을, 프레이아는 에우로스의 옆자리를 얻으며 나름 만족스러운 관계를 이어 왔던 것이다.

프레이아는 경솔하지 않았지만 잔혹한 데가 있었다. 그건 에우로스와 닮은 구석이기도 했다.

프시케와 에우로스 사이에 실제로 오간 것은 아무것도 없었음에도 프레이아의 특출 난 감은 무언가를 감지해 냈다. 그것이야말로 불길했다.

“그럼 나는 이만 스튜어트 영애의 문병을 가야겠어.”

사무엘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문병?”

“발목을 다쳤다며? 영애의 방은 어디지?”

에우로스는 기가 막혔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말해 주지 않을 건가?”

사무엘이 다시 떠보듯 웃었다.

“……지금 방에 없을 거야.”

“그럼?”

“함께 가지.”

에우로스가 일어섰다. 사무엘이 능글거리며 물었다.

“설마 단둘이 만나면 스튜어트 영애가 나의 자상함에 반하게 될까 봐 걱정하는 거야?”

“제발 닥쳐, 사무엘.”

사무엘은 이를 빠득 가는 에우로스를 보며 징그럽게 웃었다.

* * *

그 시각, 프시케와 하르모니아는 공작저의 연회홀에 있었다. 춤 수업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발목을 다친 프시케를 대신해 하르모니아가 나섰다. 제가 대신 춤 시연을 해 보일 테니 구경하며 머릿속에 익히라는 제안을 한 것이다. 프시케는 당연히 그 고마운 제안을 수락했다.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자 선생과 하르모니아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사교춤을 처음 배우는 프시케를 배려한, 아주 간단하고 느린 미뉴에트였다.

“데이모스는 걱정하지 말아요. 이건 초보적인 춤이니까 미리 합을 맞추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잘 출 수 있을 거예요.”

하르모니아가 프시케를 바라보며 말했다. 더 정확히는 프시케 뒤편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남자 쪽을 훔쳐보며 말했다.

“빠르지 않고, 스텝의 폭도 작으니까 추기 어렵지 않아요.”

하르모니아의 팔과 다리가 우아하게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성실하게 프시케가 앉아 있는 쪽을 쳐다보며 동작을 보여 주고 설명했다.

짧은 무곡이 끝나자 하르모니아가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프시케에게 다가왔다. 춤을 추고 난 뒤라 그런지 그녀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숨도 조금 할딱거리는 것 같았다.

그때 홀의 문이 벌컥 열렸다. 프시케와 하르모니아의 시선이 문 앞에 선 에우로스와 사무엘에게 가 닿았다. 그들을 향해 반갑게 인사를 건네려던 찰나, 에우로스가 차갑게 말을 뱉었다.

“하르모니아 캐번디시, 당장 나와.”

1) 윌리엄 셰익스피어 《맥베스》 1막 5장 대사 일부 수정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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