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질투하는 초록 눈동자
데이모스 캐번디시는 아레스 캐번디시 공작의 적자였다. 아버지의 작위를 잇고, 재산을 상속받는 영광된 미래는 그가 태중에 있을 때부터 당연히 획득한 권리였다.
공부며 운동이며 모든 면에서 자신을 압도하는 에우로스가 거슬렸지만 그는 적당히 이복형을 미워하는 수준에서 그 감정을 갈무리해 왔다. 어차피 입에 물고 태어난 수저의 색이 달랐다. 경쟁해 봤자 과정이 어떠했든 승자는 데이모스였다.
프레이아 스펜서는 그 무의미해 보이던 경쟁 중간에 튀어나온 방해꾼이었다. 데이모스에게 프레이아는 본래 그의 은수저 위에 올라와 있던 것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당돌한 프레이아는 크고 안락한 수저 위에서 몸을 날려 트랙 위로 몸을 굴렸다. 그리고 데이모스의 발을 걸어 기어이 넘어지게 만들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데이모스는 프레이아를 좋아했다. 어렸을 적에는 캐번디시와 스펜서의, 데이모스와 프레이아의 결혼이 논의되기도 했다.
데이모스는 자신과 프레이아가 어서 어른이 되어 부부가 될 날을 기다렸다. 프레이아 스펜서는 데이모스 캐번디시가 유일하게 간절히 욕망한 대상이었다.
그러나 에우로스의 등장이 그 열망마저 부서트렸다. 프레이아는 처음 에우로스를 우연히 마주쳤을 때부터 굴러 들어온 사생아의 번듯한 외모와 서늘한 태도에 홀려 버렸다.
문제는 에우로스가 그녀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둘은 신분 때문에 정식으로 만날 기회도 없었다.
프레이아는 끈질기게 그를 훔쳐보며 홀로 마음을 키웠다. 그래서 그녀는 갖은 핑계를 대며 데본셔 공작가를 찾았는데, 어른들은 그것이 데이모스나 하르모니아를 만나기 위한 방문이라고 생각했다. 데이모스조차도 그렇게 착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응접실에서 이야기하던 중 프레이아가 갑자기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데이모스 또한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하늘 끝까지 치솟을 기세로 꽃향기를 뿜어 대는 공작저의 장미 정원에서 그는 숨을 죽였다. 또랑또랑한 프레이아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녀의 앞에는 에우로스가 서 있었다.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내 파트너가 되세요.”
데이모스는 피식 웃는 에우로스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 웃음에 약간 당황해하는 프레이아의 얼굴도 보았다.
“내 파트너가 되면, 누구도 그대의 신분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을 거예요. 내가 원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져요. 그대가 누구의 입에도 오르내리지 않게 내가 돕겠어요.”
프레이아 스펜서의 데뷔탕트 무도회 파트너는 마땅히 데이모스 캐번디시여야 했다. 그것을 의심치 않았다.
데이모스에게 프레이아는 소중하게 간직했던 보물상자였다. 그러나 땅을 파헤쳐 그 상자를 찾고 보니 그것은 빈껍데기였다. 에우로스가 알맹이를 차지한 것이다.
“……상당히 흥미로운 제안이군요.”
에우로스의 대답에 데이모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프레이아의 고운 얼굴이 장미 꽃잎처럼 옅은 분홍빛을 띠었다.
“그럼 내 파트너가 되는 건가요?”
프레이아가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따스한 5월의 햇빛 때문인지 그녀의 숨이 조금 가빠졌다.
“장미꽃을 꺾어서 내게 정식으로 청해 주세요.”
그녀가 정원에 한가득 핀 장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에우로스는 말없이 프레이아의 얼굴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저를 응시하자, 장밋빛이던 소녀의 얼굴에 새빨간 홍조가 올랐다. 수줍음이 열정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프레이아는 저도 모르게 에우로스에게 한 발짝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지켜보는 데이모스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배었다. 에우로스는 그 자리에 그대로, 미동조차 없이 서 있었다.
프레이아의 보라색 눈동자에 갈증이 맺혔다. 그녀는 그대로 발뒤꿈치를 들고 양손을 뻗어 에우로스의 뒷목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에우로스의 잘생긴 입술을 올려다보았다.
이어 에우로스가 팔을 들어 올렸다. 프레이아는 숨을 참았다. 곧 그의 희고 곧게 뻗은 손가락이 그녀의 허리와 등을 단단하게 감싸고 서로의 입술이 맞닿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에우로스는 팔을 들어 제 뒷목에 감겼던 프레이아의 손을 떼어 냈다. 그러고는 바로 옆에 있는 장미 한 송이를 아무렇게나 꺾어 충격으로 오도카니 그 자리에 서 있는 프레이아의 손에 쥐여 주었다.
“거절하겠습니다.”
에우로스는 환하게 웃었다. 밀어내는 웃음이었다.
예의 바르게 인사한 그는 프레이아를 남겨 두고 정원을 벗어났다. 장미 줄기를 꽉 움켜쥔 프레이아의 손가락에 가시가 아프게 박혔다.
에우로스는 정원을 나서며 데이모스의 옆을 지나쳤다. 형제의 눈이 마주쳤다. 데이모스의 심장에도 질투와 열등감이라는 가시가 대못이 되어 아프게 박히는 순간이었다.
* * *
“어째서 프레이아의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았지?”
장미 정원에서의 일 이후 며칠이 지났을 때, 데이모스가 무작정 에우로스의 방으로 들이닥쳤다. 그들 형제는 평소에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않는 사이였다.
에우로스는 별말 없이 데이모스를 힐끗 보고는 곧 고개를 돌려 버렸다. 데이모스가 다시 물었다.
“부탁을 거절한 이유가 뭐야?”
“그런 걸 부탁이라고 하나?”
에우로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한심하고 유치했다. 치정에 끼어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에우로스가 되묻자 데이모스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그럼, 그녀가 너 같은 것에게 무릎이라도 꿇고 눈물이라도 흘렸어야 해?”
“바라는 게 있다면 그러지 못할 이유도 없지.”
“이 새끼가!”
에우로스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프레이아의 모습을 상상하자 데이모스는 이성을 잃었다. 실제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음에도 그랬다.
데이모스는 그대로 에우로스의 복부를 걷어차 그를 쓰러뜨렸다. 뒤로 넘어진 에우로스는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누운 채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일어나, 이 새끼야!”
데이모스는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에우로스는 계속 저항하지 않았다. 몸을 웅크리지도, 머리를 움켜쥐지도 않았다. 그런 폭력에 에우로스는 익숙했다.
열 살이 되기 전까지 그는 지금보다 더 심한 일들도 많이 겪었다. 노련하지 않은 도련님의 발길질 따위, 별일도 아니었다. 그 초탈한 모습에 데이모스는 더 부아가 치밀었다.
제 오빠가 길길이 날뛰는 소리를 듣고 쫓아온 하르모니아가 그들 사이로 달려들었다. 하르모니아는 언젠가부터 에우로스를 감싸고 돌았다. 천한 어미를 닮은 외모로 여자들 꼬시는 재주 하나는 기가 막힌가 보지.
“그만해, 데이모스!”
하르모니아는 엎드리다시피 하여 제 몸으로 에우로스를 덮었다. 그 꼴을 보며 데이모스는 더욱 폭주했다.
완벽하게 피를 나눈 남매보다 사생아 오라비를 두둔하는 여동생이라니. 아버지인 공작 각하에 이어 참으로 대단히 온정이 넘치는 가족애였다. 어째서 저 사생아 따위를 인간으로 취급하는지 데이모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데이모스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다리를 들어 올리자, 에우로스는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하르모니아 때문이었다. 데이모스는 제 여동생의 옆구리를 걷어찰 수도 있는 인간이었다.
“하르모니아, 넌 나가 있어.”
“하지만!”
“괜찮아. 이야기만 할 거야.”
에우로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터진 입 안쪽에서 주르르 피가 흘렀다.
“그래도…….”
하르모니아는 내켜 하지 않았지만, 그가 재차 부탁하자 어쩔 수 없이 방을 나섰다. 그러나 그녀는 방문 바로 앞에서 데이모스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여차하면 다시 뛰어 들어갈 생각이었다.
“듣고 싶은 답이 뭐지, 데이모스?”
에우로스가 시가 하나를 빼 들었다. 그러고는 시가의 냄새를 찬찬히 음미한 뒤 불을 붙였다.
방금 전까지 지독하게 발길질을 당한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여유로운 태도였다. 부어오른 한쪽 눈과 피가 흐른 입가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왜 프레이아를 거절했느냐고 묻잖아.”
“그걸 왜 알고 싶은데?”
그간 데이모스는 에우로스가 프레이아를 거절한 사유에 대해 여러 가능성을 두고 생각해왔다.
프레이아를 좋아하지만 그녀의 명예를 위해 거절한 것, 그 상황을 지켜보는 자신이 불쌍해 거절한 것, 프레이아에게 관심이 없으므로 거절한 것.
“그녀를 좋아해?”
어린애 같은 질문이었다. 역시 데이모스였다. 함께 어울려 놀다가 점찍어 둔 장난감에 누가 관심을 보일까 전전긍긍하다가 슬그머니 물어보는 말과 비슷했다.
에우로스는 픽 웃었다. 그리고 시가의 끝이 붉게 반짝이는 것을 확인하며 짧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
“그럼 내가 지켜보고 있어서 거절한 건가?”
에우로스가 깊게 시가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가 비딱하게 연기를 뱉어 냈다. 매캐한 흰 연기가 마치 누군가를 조롱하듯 흔들거리며 주위에 퍼졌다.
데이모스는 아직도 제 이복형이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에우로스는 겨우 그까짓 것을 신경 쓸 인간이 아니었다.
데이모스를 신경 썼다면 프레이아 스펜서가 제 쪽으로 다가오는 순간에 모른 척 몸을 돌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프레이아의 실연에도, 데이모스의 상심에도, 에우로스가 죄책감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제멋대로인 데다 교만한 여자와 질투와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이복동생의 감정을 헤아릴 여유도, 의지도 없었다. 에우로스야말로 끊임없이 제 천한 신분과 경쟁하고 있는 상태였다.
저를 훔쳐보는 시선, 조금이라도 스쳐 보려 안달하는 몸짓. 기민한 에우로스가 그런 것들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프레이아 스펜서는 성가신 여자였다. 이 세상을 혼자 사는 것 같은 거만한 태도도 짜증 났다.
“그것도 아니야.”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프레이아에게 관심이 없으므로 거절한 것.’ 그리고 그 선택지의 말을 에우로스가 그대로 읊었다.
“관심이 없으니까.”
보통 사람들이었다면, 내가 좋아하는 상대에게 남이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마음을 놓을 것이다. 그러나 데이모스는 특이한 자였다.
자신과 같은 고귀한 남자도 좋아하는 여자를, 감히 사생아 따위가 무시할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감히? 절벽 위에 피어난 고귀한 꽃처럼 올려다보며 눈물지어도 모자랄 판에, 관심이 없다고?
“네까짓 게 감히?”
이 지점에서 에우로스는 황당해졌다. 좋아한다고 했어도, 불쌍하다고 했어도 아마 같은 대답을 들었을 것이다.
어차피 데이모스 캐번디시는 자신을 경멸했고, 이번 일로 인해 자신을 증오하게 될 것이다. 어떤 말과 어떤 행동을 해도 결과는 같다.
“그럼, 좋아해 볼까? 프레이아 스펜서를?”
에우로스의 도발에 데이모스는 악귀로 돌변했다. 그리고 에우로스도 더 이상 수동적으로 맞고만 있지 않았다. 하르모니아를 향해 발을 치켜들었던 데 대한 보복이었다.
둘 중 하나가 죽은 채로 발견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들의 싸움은 격렬했다. 바깥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하르모니아가 아니었다면, 아마 데이모스 캐번디시는 그날 가문의 묘소에 묻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프레이아 스펜서의 파트너는 데뷔탕트 무도회 당일까지 정해지지 않았다. 그녀가 원했던 남자와 그녀를 원했던 남자는 싸움의 여파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어린 사교계 여왕의 탄생을 축하하러 모인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린 채, 프레이아는 제 오빠인 스펜서 소백작의 손을 잡고 연회에 참석했다.
인생은 마치 오솔길과 같다. 걷다 보면 수없이 많은 갈래를 만나고, 선택을 해야 한다. 가끔은 아무 이유 없이, 가끔은 신중하게, 사람들은 방향을 정해 몸을 튼다.
그리고 그날 데이모스 캐번디시는 갈래 길을 만났고, 한쪽으로 다리를 뻗었다. 예쁜 여자들과 사치와 향락, 방탕이 그 길 곳곳에 얼굴을 내밀고 그를 유혹했다. 그리고 그 길의 먼 끝에는 절벽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