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28)화 (28/146)

28. 일식

“데이모스 캐번디시 공자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결연해 보이는 프시케의 표정을 보자 에우로스가 피식 웃었다.

“……그건, 직접 보고 판단하는 편이 좋다고 일전에 말씀하시지 않았던가요.”

그렇다. 프시케는 이 질문을 하기까지 오래 고민했다. 누군가의 성격이나 가치관에 대해 본인이 아닌 타인의 입을 빌려 전해 듣는 것은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 클라리사가 전한 ‘데이모스 캐번디시는 프레이아 고든레녹스를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프시케의 신념을 깼다.

“직접 뵐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어서요.”

프시케가 데이모스와 말을 섞은 것은 단 한 번이었다. 처음 데본셔 공작저에 왔던 날, 그 짧고도 적대적인 인사말이 그에게서 들은 말의 전부였다. 그 후에 가끔 스친 적은 있었지만, 언제나 그는 프시케를 본체만체했다.

슬픈 것은 아니었다. 대단히 실망스러울 것도 없었다.

애초부터 프시케는 ‘여왕의 명령에 따라 데이모스 캐번디시와 결혼한다.’라는 그 최초의 결심을 번복하지 않았다. 사랑해서, 좋아서 하는 결혼이 아님을 스스로 확실히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데이모스는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그 반쪽짜리 결혼 생활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면 정보가 필요했다.

프시케에게 필요한 것은 클라리사가 전해 주는 가십이나 스캔들 같은 정보가 아니었다. 그녀가 알고 싶은 것은 데이모스의 본질이었다.

“그렇게 묻는 걸 보니 이미 대충은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에우로스는 말을 돌렸다.

아마 원래의 에우로스였다면 이 상황에서 자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라며 적당한 거절을 섞은 심심한 위로 비슷한 말을 던지고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인생 최초로 자신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 채 상대방의 감정을 살피는 중이었다.

채스웍 하우스를 떠나 리던으로 오는 내내 사무엘은 언제 프시케에게 금광 개발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이냐며 보챘다. 그런데 한순간, 정확히는 천체망원경으로 밤하늘을 보았던 날 이후로 에우로스의 사기가 뚝 떨어졌다.

마음을 얻는 일쯤은 간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저분하지 않고 깔끔하게 계약관계를 맺으면 되는 그 쉬운 일이 이제는 금맥을 뚫는 일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다.

망설인다는 것. 성취를 앞두고 행동을 유예하고자 하는 것. 모든 것이 에우로스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감정의 변화가 생경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그것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공작에게 거두어진 후 그는 단 한 번도 흐릿해지지 않았다. 언제나 몽롱하고 끝없이 아득했던 극단 시절은 끔찍했다. 그러므로 원하는 것은 명확히, 이루는 것은 확실히. 그게 좋았다.

프시케 스튜어트를 안전하고도 무사히 공작저에 데리고 오라는 공작의 지시를 완수했다. 그리고 제 역할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카듀 강의 반짝이는 사금이 가끔 눈에 어른거리기는 했지만, 에우로스는 그 일에 대한 모든 결정을 프시케와 데이모스의 결혼 이후로 유예하리라 다짐했다. 그때까지는 그녀와 거리를 둘 생각이었다. 술에 취한 듯 모호한 것은 질색이었다.

차라리 데이모스가 프시케에게 첫눈에 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모든 일이 수월하게 풀릴 테니까.

프시케는 성실한 아내가 될 여자였다. 데이모스는 결혼 후에 다시 그녀에게 흥미를 잃겠지만, 적어도 후계를 위해 아이 한둘을 낳는 시도쯤은 할 것이다.

그러면 프시케 스튜어트는 그 아이들과 더불어 공작부인으로 살아가면 될 터였다. 그리고 그때 그녀와 명료한 계약관계를 맺으면 된다. 에우로스는 그리 생각했다.

그러나 데이모스는 프시케를 제대로 상대조차 해 주지 않았다. 에우로스가 처음 공작저에 나타났을 때도 데이모스는 그랬다. 퉁퉁 부은 얼굴로 대충 재킷을 둘러 입은 채 나타나 적의를 담은 눈빛을 쏘았었다.

그리고 그때도, 먼저 몸을 돌려 뛰어 들어가는 데이모스를 쫓는 하르모니아와 공작의 팔짱을 끼고 조용히 걸음을 옮겨 자리를 피하는 공작부인이 있었다. 그리고 열두 살의 에우로스는 허리를 숙인 사용인들 사이에 홀로 남겨졌었다.

오랜 여행으로 초췌해진 낯빛과 긴장으로 역력한 표정, 환영받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과 앞으로의 삶에 대한 막막함. 프시케는 떨고 있었다.

괜찮지 않았다. 욱신거리는 느낌도 통증의 한 종류라면, 그 관찰은 아팠다.

손을 내민 것은 어떤 의사결정도 하지 않은 충동의 결과였다. 단순한 신사의 도리, 매너 같은 것이 아니었다.

갤러웨이의 꽃가게 앞에서 처음 프시케 스튜어트에게 손을 뻗었을 때부터 그래 왔다. 에우로스는 계속 손을 내밀었고, 잡으라고 재촉했다.

바들거리는 작은 손의 촉감이 장갑을 거쳐 제 손등까지 전달되었다. 그게 싫고, 한편으로는 싫지 않았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소공작님에 대한 가십 같은 게 아니에요.”

“그럼 무엇을 알고 싶으십니까?”

“그분의 생각을 알고 싶어요.”

데이모스의 생각. 에우로스는 냉소했다.

갤러웨이 성의 초라한 도서관에서 읽었던 책에서는, 실수란 무의식의 반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데이모스의 그 수많은 실수 또한 무의식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에우로스는 데이모스가 부려 대는 그 온갖 난동 아래에 몸을 숨긴 그 무의식의 형태를 안다.

데이모스는 열등감 덩어리였다. 그 열등감은 대부분 에우로스로부터 비롯되었다.

애초에도 거만하고 폭력적인 아이였지만, 에우로스가 공작저에 온 이후부터 데이모스는 걷잡을 수 없이 추락했다. 사생아인 자신과 끊임없이 비교당하고 모든 순간 패배했다.

“제게 물어도 저는 답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을 프시케에게 전달할 필요는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어두운 내용이었다.

이미 어두워진 프시케의 얼굴을 더 어둡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에우로스는 간결하게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그렇군요.”

프시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언제나 또박또박 살아왔어요.”

프시케가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빈 서류에 글자를 채우듯, 그렇게요.”

“그렇습니까.”

“확실한 것들이 좋았어요. 빈칸에 딱 들어맞는 정확한 단어와 숫자를 기입하고, 종이 마지막에 멋있게 서명하는 것 같은, 그런 명확한 인생을 살 거라고 생각했죠.”

“…….”

“얼마 전부터 빈칸에 들어갈 단어가 생각나질 않아요. 떠올리려고 할수록 점점 더 알 수 없어져요.”

그건 비단 프시케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었다. 둘은 서로를 만난 순간부터 안개를 만난 새들처럼 갈피를 잡지 못했다.

시야는 뿌옇고 날개는 축축하게 무거워졌다. 그들은 그 안개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아직까지는.

“쨍쨍하게 내리쬐던 햇빛이 갑자기 가려져 없어지는 느낌을 아시나요? 그래서 온 세상이 어둑해지고, 모든 것들이 확실하게 보이질 않고, 길을 잃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요.”

에우로스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지막한 한탄이었다. 숨을 한 번 내쉰 에우로스가 손을 내밀었다. 결국 그는 이대로 모른 척할 수 없었다. 프시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혼자 걷지 못하지 않습니까. 잡아요.”

“어딜 가는데요?”

“일식을 보러요.”

“일식이요?”

의구심으로 가득한 프시케의 얼굴을 보며 에우로스가 저도 모르게 웃었다. 눈매의 주름도, 입가의 움직임도 없이 눈빛만으로 웃는 웃음이었다.

* * *

에우로스의 부축을 받아 도착한 장소는 마구간이었다. 그곳에 암갈색 털을 가진 말이 있었다.

“이클립스네요.”

프시케가 말 가까이에 다가갔다.

이클립스가 오른쪽 뒷다리를 구르며 인사했다. 다른 부위와는 달리 한쪽 뒷다리만 유독 하얀색이라 눈에 금방 띄었다.

“언제 데려온 거예요?”

“곧 경마대회가 있습니다. 채스웍 하우스에서 고이 모셔 왔죠.”

에우로스가 콧김을 내뿜는 말의 갈기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타 보시겠습니까?”

“제가 타도 되는 건가요?”

“물론이지요.”

프시케는 조금 긴장하며 이클립스의 옆에 섰다. 대단한 명마라던데, 자신이 타는 것을 허락해 주는 걸까.

“설마 저도 무릎을 내어 드려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

프시케가 망설이자 에우로스는 짓궂은 표정으로 농담을 건넸다. 프시케는 웃었다. 무릎을 밟고 오르지 않으면 그녀 앞에 엎드릴 기세였던 사무엘이 생각나서였다.

에우로스는 조심스레 그녀를 말 등에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뒤편에 순식간에 올라탔다.

에우로스는 최소한으로만 몸이 닿도록 신경 쓰고 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프시케는 어쩔 수 없이 몸을 굳혔다.

“긴장하지 말아요.”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에우로스는 이 세상이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차 있다고 냉소했지만, 그가 내는 소리는 언제나 듣기 좋은 것이었다. 적막 속에 비눗방울이 터지듯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두 사람의 숨소리 또한 그랬다.

“일식을 보자고 하시더니, 이클립스였군요.”

어쩐지 어색해진 마음을 숨기려 프시케가 말문을 열었다.

“해가 가려진 기분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일식처럼.”

“네.”

“실제로 이클립스를 보니 어떤 기분이신가요?”

“반갑고, 또 두근거려요.”

그녀의 대답에 에우로스가 가만히 웃었다.

그는 남을 위로해 본 적이 없었다. 위로받을 일이 더 많은 삶을 살면서 제대로 위로받지 못했기 때문에 위로할 줄도 몰랐다. 서투른 방식이었지만, 그럼에도 프시케는 위로받았다.

“아시다시피 일식은, 불길한 징조였습니다. 태양이 워낙 신성시되었기 때문이죠. 일식 때마다 고대인들은 태양이 사라질까 봐 공포에 떨었다고 하더군요.”

프시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늑대가 태양을 물어뜯는 시간, 그래서 일식이 있는 날, 사람들은 집 밖으로 나오는 것을 꺼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랬다. 근거 없는 모호한 불안이었다.

“이클립스의 이름은, 이 녀석이 일식이 있던 날 태어났기 때문에 그리 붙였습니다. 다들 불길하다고 떠들었어요. 좋지 않은 날 태어났으니 말입니다.”

“그렇군요.”

“실제로 이클립스는 어릴 적 통제 불가였어요. 왜소하고 비쩍 마른 데다, 성격은 얼마나 폭군처럼 더러웠는지 모릅니다. 누가 올라타려는 시늉만 해도 발길질을 해 댔지요. 다들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이렇게나 근사한데요.”

“거세시켜 버리자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수컷에게 정말 잔인하게도요.”

에우로스가 장난스레 웃었다. 프시케도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도 저는 이클립스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읽었어요. 그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이 말은 곧 변화할 것이다, 누구보다 멋지게 달릴 것이다, 그런 것들이요.”

이클립스가 그 말을 알아들은 듯 조금 속력을 냈다. 에우로스는 고삐를 말아 쥐고는 프시케를 단단히 품 안에 가두었다.

“불길한 날에 태어난 이클립스는 현존하는 최고의 경주마가 되었어요. 경마에는 선두와 240야드 이상 격차가 나면 바로 탈락하는 룰이 있습니다. 이 녀석은 늘 선두에 있고, 뒤따르는 말들을 그 이상으로 따돌리곤 해요. 혼자 달리고 혼자 우승하는 셈이죠.”

“그런 규칙이 있는지는 몰랐어요.”

“그래서 가끔은, 이클립스가 우승해도 사람들이 손해를 볼 때가 있습니다. 모두 이클립스에게만 돈을 걸거든요.”

그 말을 끝으로 에우로스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말 머리를 오른편으로 돌렸다. 양옆으로 가로수가 빼곡한 넓은 길은 어둡고 조용했다. 멀리서부터 밤안개가 퍼져 오고 있었다.

에우로스도 모호한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모호한 것이 꼭 불길한 것만은 아니라고, 그리고 불길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꼭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생아로 태어난 에우로스도 그 태생은 불길했다. 일식에 태어난 이클립스도 그랬다. 그러나 에우로스와 이클립스는 결국 선두에 섰다. 뒤따라오는 주자를 240야드 이상 따돌리는 단독 선두였다.

그의 침묵에 프시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에우로스를 보았다. 에우로스는 저를 바라보는 프시케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둘의 눈이 마주치자 에우로스의 새파란 눈동자에 프시케의 검은 눈동자가 정확히 겹쳐졌다. 불길하지만, 그래서 더 아름답고 신비한 일식이었다. 그 테두리는 짙고 푸르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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