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25)화 (25/146)

25. 아내의 조건

1)

“많은 재산을 가진 미혼남이 아내를 원하는 건 당연한 진리지요.”

프레이아의 말에 하르모니아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폭 쉬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프시케는 조용히 웃었다.

“데이모스 캐번디시는 브라이튼에서도 가장 많은 재산을 물려받을 사람이니 더욱 그럴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프레이아는 찻잔을 들었다. 살짝 내리깐 긴 속눈썹 아래로 영롱한 보랏빛 눈동자가 탐색하듯 프시케를 훑었다.

프시케 스튜어트에게는 프레이아의 예상을 뛰어넘는 부분들이 있었다. 음침한 갤러웨이 성의 붙박이 유령이라는 소문 탓에 비쩍 곯고 흐리멍덩한 계집애의 모습을 상상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마주한 프시케의 외모는 꽤 봐줄 만한 것이었다.

흑단처럼 은은한 윤기를 뱉어 내는 새카만 머리카락. 요요하게 빛나는 새카만 눈동자가 자아내는 고아한 분위기. 흰 피부, 매끈한 살결,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와 날씬한 몸. 프레이아의 눈매가 갸름해졌다.

잘만 꾸미면 데이모스 캐번디시의 눈에 들 수도 있겠군. 그는 미인을 좋아하니까.

프레이아는 이번 왕궁무도회에서 프시케를 적당히 눈에 띌 정도로 만들어 줄 작정이었다.

자신이 샤프롱을 맡겠다고 선언한 이상, 그녀가 대동하는 아가씨가 주목받지 못하는 일은 치욕이 될 터였다. 그렇게 미모를 어느 정도 인정받고 나면 데이모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프시케와 데이모스가 서로를 좋아하게 되든 싫어하게 되든 프레이아가 알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도 제게 지긋지긋하게 따라붙는 ‘데이모스의 첫사랑’ 꼬리표를 떼어 버리려면 프시케를 이용해도 좋겠다는 계산이었다.

여태 저를 잊지 못해 비슷한 외모의 매춘부를 만난다고 했던가. 황금화살 클럽에서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프레이아의 고운 목 뒤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었다.

“제가 오늘 공작저에 온 건,”

프레이아가 테이블 위로 찻잔을 내리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프시케 스튜어트 영애의 샤프롱으로서예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은근슬쩍 계속 응접실의 문이 열리기를 고대했다. 외출했다던 에우로스가 돌아오면 자신의 방문 소식을 듣고 인사하러 오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였다.

“데이모스 캐번디시 소공작의 부인이 된다는 건, 리던 사교계에서 최고의 여성 중 하나가 된다는 의미지요. 프시케 스튜어트 영애를 그 자리에 걸맞는 여성으로 만드는 것이 저의 목표예요.”

프시케는 별말 없이 신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소공작님이 아내를 원하게끔 만들어야 해요.”

“대체 어떻게요?”

하르모니아가 끼어들었다.

데이모스는 아직 공작부인과 비올레타의 치마폭에 싸인 어린애일 뿐이었다. 억지로 아내를 들이는 상황이 되었으니, 그 결혼에 충실할 리 없었다.

프시케와 처음 만났던 날에도 그는 내내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만찬장에 앉아 있었다. 그러고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저택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불편한 분위기를 조율하느라 하르모니아, 에우로스, 거기에 사무엘까지 모두 억지 미소를 지어야 했다. 프시케의 존재를 반기지 않는 공작과 공작부인까지도 제 아들의 막돼먹은 예의를 무마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간단해요. 여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외양을 가꾸는 일이죠. 거기에 훌륭한 자수 실력과 피아노 실력을 갖추면 금상첨화고요.”

그렇게 말하며 프레이아는 하르모니아를 힐긋 쳐다보았다.

“아직도 첼로를 배우고 싶은 것은 아니지, 하르모니아?”

프레이아가 기세등등한 어조로 물었다.

“첼로는 숙녀가 배우기에 절대로 적합한 악기가 아니랍니다. 여자가 다리를 벌리고 연주한다는 건, 정말이지 고상하지 않은 행동이에요. 바이올린도 마찬가지예요. 그렇게 비딱하게 한쪽 턱을 괴고 오래 있다가는 곧은 목선이 흐트러질 거예요.”

프시케를 바라보며 프레이아가 부연했다. 언짢아진 하르모니아의 입이 살짝 비죽거렸다.

하르모니아가 가장 좋아하는 악기는 첼로였다. 첼로의 두꺼운 현이 토해 내는 낮고 무거운 음색이 그녀에게는 더없이 매력적으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잉그린트 어디에도 여성을 가르치는 첼로 선생은 없었다. 사람들이 다리 사이에 악기를 위치시키는 그 자세를 정숙하지 못한 것으로 여기는 까닭이었다. 그래서 여자들은 대개 피아노나 하프를 배웠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습니까?”

갑자기 응접실 문 쪽에서 빛이 쫙 쏟아졌다. 지루하고 나른한 오후의 티타임에 섬광이 번쩍인 순간이었다.

“에우로스!”

프레이아가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근 한 달 만의 조우였다. 그녀의 얼굴에 숨기지 못한 반가움과 안달이 떠올랐다.

에우로스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까딱여 인사했다. 그러고는 아직 모락모락 김을 피워 올리고 있는 세 개의 찻잔 쪽으로 눈을 돌렸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에우로스가 하르모니아의 옆에 앉았다. 그의 앞에도 곧 찻잔이 놓였다.

그의 등장은 세 명의 여인에게 각각 다른 의미로 달가운 것이었다. 프레이아에게는 학수고대하던 재회였고, 하르모니아와 프시케에게는 프레이아의 지겨운 일장 연설로부터의 탈출이었다.

“무슨 이야기 중이었습니까?”

에우로스는 막 승마를 마치고 돌아온 참이었다. 흰 승마복을 차려입은 그는 로미아 시대의 개선장군 같았다. 살짝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곧고 긴 손가락을 보며 프레이아는 소녀처럼 뺨을 붉혔다.

“제가 스튜어트 영애의 샤프롱이 되기로 했어요.”

프레이아의 말에 에우로스가 슬쩍 눈썹을 들어 올렸다.

“부인께서 말입니까?”

“그래요. 곧 열릴 왕궁 연회에 참석해야 하는데, 데본셔 소공작의 부인이 될 분에게 샤프롱이 없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요.”

“그렇군요.”

에우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미심쩍어하는 것 같은, 묘한 표정이었다.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하는데, 신사분의 도움이 필요해요.”

프레이아가 에우로스를 똑바로 보며 애교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에우로스 그대가 스튜어트 영애를 도와주었으면 해요.”

“제가, 말입니까?”

에우로스가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확인하듯 물었다.

프레이아의 속내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자신을 좋아하는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황금화살 클럽의 성공을 위해 그것을 적극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프레이아가 프시케를 끌어들여 자신을 이용하고 있었다.

“요즘, 리던 시내에서 여성들을 상대로 한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 들으셨지요?”

프레이아의 속 보이는 말에 에우로스는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애써 참았다.

그 사건의 피해자들은 화이트채플의 매춘부들이었다. 고급 상점들이 즐비한 본드 스트리트를 걷는 귀족 여성들을 상대로 한 범죄는 아니라는 말이다.

“스튜어트 영애를 위해 의상실과 잡화점 여러 곳을 점찍어 두었어요. 그런데 무서워서 숙녀들끼리 외출하는 것이 영 꺼려지네요.”

하르모니아는 프레이아의 내숭이 진심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에우로스의 동행에는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살인범이 나타날까 걱정되어서는 아니었다. 단지 프레이아를 믿지 못했을 뿐. 에우로스는 세련된 신사이니 프시케 스튜어트의 성공적인 데뷔를 위해 꽤 괜찮은 조언들을 해 줄 수 있을 터였다.

“저는 괜찮아요.”

지금껏 입을 열지 않고 있던 프시케가 어렵사리 첫마디를 꺼냈다.

“이미 공작부인의 배려로 여러 벌의 드레스를 맞추었어요. 그 이상은 부담스럽습니다.”

프시케는 지금 입고 있는 매끄러운 초록색 공단 드레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렇게 좋은 옷감으로 만든 옷은 부유했던 어린 시절 이후로 입어 본 적이 없었다.

첫날 데이모스의 행동 때문에 내내 속상함을 숨기지 못하던 클라리사도, 유명 재봉사가 지어 바친 드레스들을 보고는 금세 함박웃음을 지었다.

“외출복이나 실내복을 입고 무도회에 가겠다는 건가요, 스튜어트 영애?”

프레이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녀가 에우로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설마 데본셔 공작가에서 영애에게 연회용 드레스 하나 마련해 주지 않는 건가요?”

하르모니아와 에우로스의 얼굴에 미세하게 짜증이 올라왔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부인.”

이복 남매의 대답은 거의 동시에 튀어나왔다. 프레이아는 프시케를 보며 피식 웃었다. 프시케는 포기한 심정으로 입을 닫았다.

“그리고, 리던 최고의 신사인 에우로스가 설마 숙녀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지는 않겠지요?”

“……기꺼이 도와 드리지요.”

기다리던 에우로스의 대답에 프레이아는 배불리 먹은 고양이처럼 웃었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하르모니아의 작은 개가 아르르거리기 시작했다.

* * *

“프레이아 고든레녹스는 에우로스를 좋아해요.”

하르모니아가 프시케의 눈을 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녀가 프시케의 샤프롱을 자처한 것은 에우로스 때문일 거예요. 그러니 고든레녹스 부인의 말을 다 믿지는 않았으면 해요.”

하르모니아의 당부에 프시케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르모니아는 그녀에게 처음부터 호의적이었다. 데이모스의 무례를 대신 사과한 사람이기도 했다.

“있다고 다 보여 주지 말고, 안다고 다 말하지 말고, 가졌다고 다 주지 말고, 들었다고 다 믿지 말아요.”

2)

“‘리어왕’이군요.”

프시케가 하르모니아의 말을 듣고 웃으며 대답했다.

“알고 있네요. 제가 리던 사교계에서 반드시 지키는 철칙이기도 하지요.”

프시케는 그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리던에서만일까요.”

하르모니아의 눈빛이 초롱초롱 반짝였다. 에우로스를 제외하고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기다니. 천진한 즐거움이 그녀의 마음속을 꽉 채웠다.

“제 방을 보여 드릴게요.”

하르모니아가 프시케를 이끌었다. 그녀가 교류하는 수많은 사교계 숙녀들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던 그녀만의 방이었다.

“저 책상은 에우로스의 선물이에요.”

자랑스러운 말투로 하르모니아가 말했다.

전형적인 귀족 아가씨의 침실에 어울리지 않는 어두운 색깔의 커다란 책상이었다. 그 부조화가 어쩐지 멋있었다. 책상의 존재는 대단한 결심이나 선언처럼 느껴졌다.

“정말 근사하군요.”

프시케는 천천히 다가가 그 책상을 살펴보았다. 얼핏 투박해 보이지만 표면을 정교하게 다듬은 최고급품이었다.

“여기, G.S.는 무슨 뜻인가요?”

프시케가 책상 모서리에 새겨진 글자를 발견하고 물었다. 하르모니아는 짓궂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건 다음에 알려 드릴게요.”

1)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첫 문장 일부 수정 인용.

2)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어왕》 1막 4장 대사 일부 수정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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