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24)화 (24/146)

24. 첫인상

“아가씨, 저길 좀 봐요!”

클라리사가 호들갑을 떨어 댔다. 프시케는 울렁이는 속을 부여잡고 마차의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드디어 리던행 여정의 마지막 날이었다. 채스웍 저택에서의 꿈같은 시간을 뒤로한 채 그들은 다시 꼬박 나흘간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처음에는 신기하게만 보였던 잉그린트의 목가적인 풍경에도 이미 질린 상태였다. 산이 많고 험한 지형인 스코틀린과 달리 잉그린트 영토의 대부분은 평야였다.

처음 지평선을 보았을 때 프시케는 경외감에 휩싸였다. 그 쭉 뻗은 선을 경계로 오르고 내리는 태양의 붉은 인상은 정말이지 강렬했다. 아무리 마차를 달려도 그 선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주는 막막함마저 신비로웠다.

그러나 이제 프시케와 클라리사는 한시 바삐 리던의 공작저에 도착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멀미 때문에 식사를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고, 툭하면 부글거리며 올라오는 토기에 지칠 대로 지쳐 버렸기 때문이었다.

에우로스와 사무엘의 배려로 마차는 내내 천천히 달렸다. 하지만 차라리 빨리 달리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고된 여행이었다.

“이제 리던인가 봐요. 아이고, 클라리사, 정말 출세했네. 리던에도 다 와 보고!”

그 고행의 끝에 드디어 시가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클라리사가 연신 감탄했다.

브라이튼 섬에서 가장 큰 도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사는 도시, 잉그린트와 스코틀린을 통치하는 여왕이 사는 도시, 잉그린트의 수도 리던이었다.

“건물들이 어쩜 이렇게 다 맨들맨들 빛이 날까요? 꼭 새로 지은 것들 마냥.”

“새로 지은 것들 맞을걸.”

“새로 지었다고요?”

“백 년쯤 전에 리던에서 큰불이 났거든. 건물들이 많이 타 버려서 재건사업을 했는데, 저 건물들이 아마 불탄 자리에 새로 지어진 것들일 거야.”

“그건 또 안됐네요.”

프시케의 설명에 클라리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 정도의 화재라면 많이도 죽어 나갔겠군. 그런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 약한 클라리사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배었다.

꼭대기에 거대한 돔을 왕관처럼 쓴 성당이 그들 곁을 스쳐 지났다. 그 성당도 대화재 이후 지어진 것이라고 들었다.

스코틀린인들과 잉그린트인들은 각기 믿는 종교가 달랐다. 결혼한 여자의 종교적인 자유가 인정될 리 없으니, 아마도 프시케 또한 저 성당에서 새로이 세례를 받고 잉그린트 국교로 개종해야 할 것이다. 데본셔 공작가의 위상을 생각하면 그녀와 데이모스 캐번디시 소공작의 결혼식도 어쩌면 같은 곳에서 거행될지 몰랐다.

“저기 저, 다리. 저거 리던 브리지인가요? 리던 브리지가 무너진다네, 무너진다네, 하는 그 노래의 리던 브리지 말이에요.”

“응, 아마 그럴 거야. 테임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는 리던 브리지가 유일하니까.”

클라리사가 쉴 새 없이 종알거렸다. 무심히 대답하던 프시케의 눈도 점차 호기심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신문과 책에서만 읽었던 리던의 테임 강, 리던의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졌다. 그들은 한참동안 즐거이 낯선 풍경을 바라보았다.

리던은 시골 영지 갤러웨이와는 전혀 다른, 아예 비교 자체가 불가한 곳이었다. 이곳의 모든 것이 기름지고 풍요로워 보였다.

섬세하게 겉면을 조각해 장식한 밝은색 대리석 건물들, 평탄하게 잘 닦인 도로, 그 위를 바삐 달리는 무수한 마차들, 웅장한 교회, 여왕이 기거하는 왕궁, 곳곳에 자리한 넓은 공원. 그 모든 것들이 도시를 조성하는 데 쏟아부은 돈의 액수를 대놓고 자랑하고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전부 왕족 같네요.”

테임 강변을 따라 길게 이어진 산책로 위에는 하녀나 하인을 거느린 채 천천히 걷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잉그린트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뛰지 않는다고 했었나. 그들의 걸음걸이에 느릿한 품위가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고급 레이스 양산을 받쳐 든 숙녀들은 무엇이 그리 행복한지 자주 웃었다. 신사모를 챙겨 쓴 신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시가를 피웠고, 그 연기는 흐르는 강물 위에서 물살과 함께 떠내려갔다. 리본을 치렁치렁하게 매단 아이들은 유모의 품에서 칭얼대고, 때로는 삐악삐악 소리를 질렀다. 말로만 듣던 깍쟁이 리던 사람들이었다.

프시케와 클라리사가 눈을 두는 곳마다 가을이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리던은 분주하면서도 한가하고 평화로웠다.

창문 사이로 높낮이가 거의 없는 잉그린트 악센트가 톡톡 내리꽂는 빗방울처럼 들이쳤다. 때때로 젖은 낙엽을 태우는 냄새가 매운 바람에 실려 들어왔다. 몸을 떨어트릴 준비를 하는 나뭇잎들이 파르르 흔들렸다.

“리던 탑이네.”

그녀들의 눈앞에 성채와 비슷한 형태의 건물이 또렷이 형체를 드러냈다. 스코틀린 역사서에 그려져 있던 그림을 떠올리며 프시케가 말했다.

“리던 탑이요?”

“책에서 본 적이 있어.”

“그 리던 탑이요? 메리 여왕 폐하가 갇혀 있던?”

클라리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맞아.”

“그분도 아가씨의 먼, 먼, 조상 아닌가요?”

프시케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 스튜어트는 스코틀린의 여왕이었고, 한때 갈리아의 왕비였으며, 잉그린트 엘리자베스 여왕의 사촌이기도 했다.

그녀는 사랑의 불장난으로 온갖 실정을 번복하다가 스코틀린에서 추방당했다. 그 후로 잉그린트의 리던 탑에서 20년간 갇혀 지내다 참수당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들은 이후 잉그린트의 왕좌를 차지했다.

잉그린트와 스코틀린은 엎치락뒤치락하는 레슬링 선수들 같았다. 어느 때는 잉그린트의 왕이 스코틀린을 지배하고, 어느 때는 스코틀린의 왕이 잉그린트를 지배하고.

그러다 지금은 아예 합병되어 하나의 국가라고 불리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 둘을 전혀 섞일 수 없는 전혀 다른 두 나라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여왕, 앤은 프시케와 같은 성을 쓰는 사람이었다. 여왕의 먼 조상이 스코틀린 왕족,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미 스튜어트 왕조는 완전하게 잉그린트화 되었다.

그 상황에서 가장 불편해진 쪽이 바로 스코틀린의 스튜어트의 가문이었다. 허울뿐인 왕족이나 정통성이 없지는 않고, 잉그린트에 동화되지 않은, 그리고 후사가 없는 여왕을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프시케 스튜어트였다.

부모가 죽고 어려움에 처한 프시케를 앤 여왕이 거두지 않은 것도 아마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먼 친척이니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손을 내밀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왕은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죽일 이유가 없는 어린 소녀였기에 죽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세를 키우게 둘 수도 없었다. 늙은 여왕 대신 새로운 여왕이 등극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프시케가 자라자 여왕이 곧바로 혼인을 주선한 것도 그런 복잡한 사정에 기인했다.

잉그린트인들은 스코틀린 출신의 왕을 세우느니 차라리 외국인을 데려오는 편을 더 반겼다. 그러므로 여왕은 프로센 사람을 잉그린트 차기 왕으로 지명했다. 이 경우 프시케의 신분이 또다시 애매한 문젯거리가 되었다.

그리하여 프시케는 여왕의 명령으로 잉그린트 최고 가문의 영식과 결혼해야 했다. 영향력이 막강한 잉그린트 귀족 가문으로 그녀가 시집가면 반역의 꿈을 꿀 이유도 사라질 거라 판단한 까닭이었다.

여기에 꼴 보기 싫은 데본셔 공작가를 골탕 먹이고, 과거의 연적에 대한 아주 사소한 복수와 같은 사심이 더해졌다. 게다가 양국의 통합이라는 대의까지.

스코틀린의 메리 스튜어트는 리던 탑에 유폐되어 살다가 목이 잘렸다. 그리고 지금 스코틀린의 프시케 스튜어트가 결혼을 위해 리던으로 와 그 앞을 지나고 있다. 그 모든 일은 전부 잉그린트 여왕들의 뜻이었다.

어느새 햇빛이 도르래에 걸린 실처럼 감겨 올라갔다. 일정한 크기의 네모반듯한 돌이 깔린 넓은 길 위에 어스름한 밤의 빛이 커튼처럼 천천히 드리워졌다. 빽빽한 건물들이 낸 창문으로 주홍색 촛불의 빛이 하나둘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밝게 하늘을 떠다니던 흰 새털구름이 어둠을 머금고 달리는 마차 위를 빠르게 지나쳐 사라졌다. 구름이 지나간 자리에 이르게 뜬 달이 거울처럼 내걸렸다. 멀리 희고 아름다운 자태의 대저택이 달빛을 받아 우아한 선을 드러냈다.

이 여행의 종착지, 프시케 스튜어트가 살게 될 켄싱턴의 데본셔 공작저였다.

* * *

사내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정중한 척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했지만, 그 태도는 숨길 수 없이 불량했다.

성화에 못 이겨 대충 꿰입은 재킷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재킷이 불편해서인지, 이 상황이 못마땅해서인지, 남자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데이모스 캐번디시는 옅은 금발과 초록빛 눈을 지녔다. 에우로스와 하르모니아는 데본셔 공작의 파란색 눈동자를 물려받았다. 데이모스의 초록색 눈동자는 공작부인에게서 온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그의 눈동자를 녹음이나 에메랄드에 비유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에우로스를 질투하는 녹색 눈을 가진 괴물이었다.

1)

“공자님을 뵙습니다.”

마차 여행으로 구깃구깃해진 드레스 자락을 내려다보며 프시케가 몸을 굽혔다. 남편이 될 데이모스 캐번디시를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들어 남자를 살폈다. 차가운 표정에 담긴 진한 적의를 확인하자 마음이 이른 겨울을 만난 듯 아릿해졌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프시케를 훑어본 데이모스가 빙글 몸을 돌려 먼저 저택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무례한 행동이었다.

뒤에 서 있던 클라리사의 턱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데이모스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사무엘마저도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헛기침을 뱉었다.

“데이모스!”

하르모니아가 급하게 오라비를 부르며 뒤를 쫓았다. 데이모스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프시케에게 제법 친절했다. 데본셔 공작과 공작부인이 애써 미소 지으며 발을 떼었다.

그들이 움직이자 저택 앞에서 깍듯한 모양새로 서 있던 사용인들이 동시에 허리를 숙였다. 프시케는 그 자리에 박힌 듯 홀로 서 있었다.

말없이 옆에서 지켜보던 에우로스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보며 망설이는 프시케에게 그가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잡아요.”

흰 장갑 위에 바들거리는 작은 손이 살짝 포개어졌다.

1) 윌리엄 셰익스피어 《오셀로》 3막 3장 대사 일부 수정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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