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자기만의 방
하르모니아의 손가락이 큼지막한 마호가니 책상의 표면을 살살 쓸었다. 크고, 단단하고, 육중한 책상이었다. 책상 모서리에는 G.S.라는 문자가 멋들어진 필기체로 각인되어 있었다.
짙은 적갈색을 띠는 이 책상은 에우로스가 선물해 준 것이었다. 그녀는 이 책상만 보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르모니아는 공작과 공작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데본셔 공작가의 귀한 소공녀였다. 태생부터 본디 높은 지체였고, 그녀의 삶은 윤택함을 넘어 마음껏 사치를 부려도 남을 정도였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누구든 몇 시간 내로 제 앞에 앉힐 수 있었다.
그러나 단 하나, 자기만의 방은 가질 수 없었다. 여기서 방은 침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가질 수 없었던 것은 서재였다.
아버지인 데본셔 공작도, 타고난 사업가인 에우로스도, 심지어 1년 동안 글줄 하나 읽지 않는 데이모스도 모두 자신만의 집무실이나 서재를 가졌다. 그러나 데본셔의 성과 리던의 저택, 잉그린트 곳곳의 매너하우스 그 어느 곳에도 딸인 하르모니아의 서재는 없었다.
하르모니아는 값비싼 패물과 같았다. 먼지가 앉을세라, 흠이 날세라 때때로 호호 불고, 반들반들 윤이 날 정도로 닦고, 고이 어루만지는 그런 패물 말이다.
패물이라는 것은 때가 되면 흥정을 거쳐 가장 높은 값을 지불하는 새로운 주인에게 넘겨지는 운명을 가진다. 그녀는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이상했다. 적자로 태어난 데이모스는 그렇다 치고, 모두가 그 신분을 두고 뒷이야기를 서슴지 않는 에우로스마저도 그 자신만의 방을 소유하고 있었다.
에우로스는 그 방에 호두나무로 만든 근사한 책상을 들이고, 그 책상 앞에 앉아 일을 했다. 때때로 독서했고, 사색하기도 했다. 손님을 맞을 때도 있었다.
“어머니, 저도 제 서재를 가지고 싶어요. 제 책상을 가지고 싶어요.”
하르모니아가 그 말을 처음 꺼낸 것은 열네 살이 되었을 때였다. 공작부인은 그녀의 부탁을 듣고, 다음 날 갈리아에서 수입한 낮은 키의 작달막한 세크리테어를 하르모니아의 침실 한편에 놓아주었다.
업라이트 피아노를 닮은, 장식장 형태의 장미목 가구였다. 그 위에 섬세하게 그려진 올망졸망한 들꽃들을 보며 하르모니아는 얼굴을 찡그렸다.
“책상은요?”
하르모니아의 질문에 공작부인은 웃으며 세크리테어 윗부분을 막고 있던 나무 패널을 아래로 내려 주었다. 그 패널을 책상으로 사용하면 된다는 설명을 곁들이며.
“제가 원한 건, 데이모스의 서재에 있는 책상과 같은 거예요.”
딸의 불퉁한 말에 어머니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 책상이 왜 필요한 거니?”
“저도 그곳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으니까요.”
“그건 세크리테어에서 해도 상관없지 않니.”
“불편하잖아요. 높이도 낮고, 폭도 좁고요. 몸을 잔뜩 기울여야 하니 오래 앉아 있을 수도 없어요.”
“오, 하르모니아. 책상에 오래 앉아 있는 숙녀라니, 정말 끔찍하구나. 게다가 몸을 잔뜩 기울인다는 말만 들어도 벌써 네 목과 등이 구부정해지는 꼴이 보이는 것 같아. 언제나 자세를 바르게 하고 꼿꼿하게 몸을 세워야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거란다. 맵시가 좋지 않은 여자에게 누가 청혼하겠니?”
평생 신경증에 시달리고 있는 공작부인은 이미 주름이 팬 미간을 슬슬 문지르고 있었다. 그녀의 찌푸린 이마를 한참 보던 하르모니아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후 하르모니아는 그 세크리테어를 방치했다. 그걸 안타까이 여기던 유모는 그 위에 오밀조밀한 고급 자기 인형들을 올려 장식해 주었다. 물론 그녀는 그 인형들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의 소망을 성취시켜 준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에우로스였다. 하르모니아는 캐번디시 성을 가진 다른 가족들보다 에우로스와 절친했다.
아버지는 지위에 걸맞게 바빴고, 얼굴 볼 시간도 많지 않았다. 어머니는 딸에게 애정을 주었지만, 그 애정은 받는 사람을 고려한 방식이 아니었다. 그리고 데이모스는 어릴 적부터 인간 말종이었다.
반면 에우로스는 하르모니아의 ‘진짜’ 가족들과는 결이 달랐다. 그것이 사생아라는 배경 때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에우로스는 상식적이었고, 적극적이었으며 변화를 수용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하르모니아의 특질과 꽤 잘 어우러졌을 뿐이었다.
에우로스가 그녀의 열여덟 살 생일선물로 거대한 마호가니 책상을 주었을 때, 그녀는 제 인생에서 최초의 경험을 했다. ‘자기만의 방’을 가진 경험이었다.
놀고 있는 수많은 저택의 방들 중 어머니가 제게 서재로 쓰라고 내어 준 것은 없었기 때문에, 그 위풍당당한 책상은 하르모니아의 침실로 들어왔다. 그것은 흰 레이스 커튼과 침구, 예쁘게 채색된 자기 인형들과 앙증맞은 티 테이블 사이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공작부인은 1차로 경악했고, 2차로 외면했다. 그랬기에 하르모니아는 굳건히 침실 속 자기만의 방을 사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방에서 글을 썼다. 오로지 자기만의 글을.
* * *
여자가 글을 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경험치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었다. 간혹 출간되는 여성 작가들의 글은 대부분 로맨스였는데, 하르모니아는 곱게 자란 귀족이라 로맨스를 경험해 볼 기회도 없었다.
아는 것들을 기초로 소설을 써 보려 했으나, 깃펜을 들고 한두 줄 적어 내려가면 끝이었다. 아는 것이 없어서였다.
아버지와 형제들이 보는 신문을 훔쳐 읽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모르는 용어도 많았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많았다. 물어볼 사람도 별로 없었다.
하르모니아가 받는 수업에서 배우는 내용은 피아노와 자수, 그리고 귀부인이 갖추어야 할 예법과 덕목, 다도 정도였다. 조금 더 실용적인 것으로, 결혼 이후 귀족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알아야 할 간단한 살림 셈법 정도가 추가되었다.
“에우로스, 부탁이 있어.”
하르모니아가 밤중에 귀가한 에우로스를 붙들고 소곤거렸을 때, 그는 잠자코 여동생을 서재로 데려갔다. 심상치 않은 말을 할 거란 기색을 귀신같이 눈치챈 까닭이었다.
“이제 이야기해 봐.”
에우로스는 턱을 살짝 치켜든 채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는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할 때 종종 그런 태도를 취했다.
위압감을 느낀 하르모니아는 어깨를 동그랗게 움츠렸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재빨리 말했다.
“신사복이 필요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에우로스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신사복이 왜 필요하지?”
“내가 입으려고.”
하르모니아의 대답에 에우로스의 눈매가 더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는 더 움츠러들었다.
“네가?”
“응.”
“네가, 신사복을, 왜?”
“황금화살 클럽에 갈 거거든.”
웬만한 일에는 눈도 꿈쩍하지 않는 에우로스였다. 그러나 하르모니아의 말을 듣자 에우로스는 대답하는 것도 잊고 눈을 깜박거렸다.
“황금화살 클럽에 입장하게 해 줘.”
하르모니아가 재촉했다.
“……너도 알겠지만, 그곳은 신사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야.”
“프레이아 고든레녹스는 언제든 드나들잖아.”
“고든레녹스 부인은 황금화살의 투자자니까.”
그리고 얼굴이기도 하지.
에우로스가 프레이아의 황금화살 출입을 허가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 유일무이성과 화제성, 금녀의 장소에 홀로 존재하는 여인이란 상징성 때문이었다.
프레이아의 존재는 황금화살 클럽을 신비로운 장소로 보이게끔 했고, 리던 최고의 사교클럽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더불어 그녀를 멀리서나마 보고 싶어 하는 신사들의 방문도 이어졌으니 꽤 성공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남장을 하겠다는 거야.”
하르모니아의 생떼에 에우로스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서 있는 그녀를 소파로 데려가서 앉게 했다.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볼 생각이었다.
“남장을 하고, 황금화살 클럽에 와서, 그리고 뭘 하려는 건데?”
에우로스의 물음에 소파에 엉덩이를 반만 걸치고 초조하게 앉아 있던 하르모니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한참 망설이며 대답을 꺼렸다. 에우로스는 침착하게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글을 써 보고 싶어.”
“글?”
“사실 이미 조금씩 쓰고 있어. 습작 단계이긴 하지만.”
“무슨 글을 쓰는데?”
“소설.”
에우로스는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하르모니아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수줍지만 곧은 결심이 그녀의 파란 눈에 맺혀 있었다.
“그래서, 소설을 쓰는데 어째서 황금화살에 드나들어야 한다는 거지?”
“신문과 책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으니까.”
“클럽에서 네가 알고 싶은 것은 뭔데?”
“진짜 남자.”
그 대답을 듣자 에우로스는 그만 피식 웃어 버렸다.
옳은 말이긴 했다.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숙녀라도, 황금화살에서 두어 시간만 보내면 남자들의 추악한 민낯을 속속들이 알게 될 테니까.
“진짜 남자에 대해 알아서 무얼 하게?”
“여자들만 가지고 소설을 쓸 수는 없잖아.”
“여자들만 나오는 소설도 있어. 남자는 보조적인 역할로만 나오는 작품들 말이야.”
“이 세상의 반은 남자인데, 남자에 대해 쓰지 않는 건 낭비나 다름없어.”
그녀의 대답을 들은 에우로스는 한참 동안 고민에 빠졌다. 하르모니아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오래 눈치를 보았다.
이윽고 생각을 마친 그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르모니아의 얼굴이 단박에 밝아졌다.
“조지 샌드.”
에우로스가 불쑥 말했다.
“뭐?”
하르모니아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이제부터 황금화살 클럽에 드나들 때 사용할 네 가명이야.”
“그게 내 이름이라고?”
“그래. 네가 하르모니아 캐번디시라고 밝히고 싶은 건 아닐 테지? 매니저에게 미리 말해 둘게. 조지 샌드가 오면 조용히 들여보내라고.”
“에우로스…….”
하르모니아가 감격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에우로스는 그 똘망한 얼굴이, 꼭 이복여동생이 키우는 조그맣고 복슬거리는 흰색 강아지의 것과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절대로 눈에 띄지 마. 남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자리에만 앉고, 술도 마시면 안 돼. 누구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불가야. 목소리에서 여자인 게 티 나니까.”
“으응. 정말 고마워.”
하르모니아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물었다.
“그런데 에우로스, 왜 이름을 조지 샌드라고 지었어?”
“네 머리카락 색깔이 꼭 백사장의 모래색과 비슷하니까. 조지는 다음 왕의 이름이고.”
그의 대답에 하르모니아가 명랑하게 웃었다. 그녀의 백금발이 마치 햇빛을 받은 모래알처럼 반짝거렸다.
잉그린트 문학계에 혜성처럼 등장할 조지 샌드는 그렇게 에우로스의 방 안에서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