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도움의 손길
프레이아 고든레녹스는 현재, 한껏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에우로스는 아직이야?”
그녀가 거만하게 응접실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조아리는 시종들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으며 물었다.
“부인.”
응접실에 놓인 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데본셔 공작가의 소공녀, 하르모니아 캐번디시가 자리에서 일어나 억지로 미소 지으며 고개를 살짝 까닥여 인사했다. 동시에 그녀의 발치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작고 하얀 개도 몸을 발딱 일으켜 앙앙 짖었다.
“부인이라니, 하르모니아. 그따위 호칭은 집어치우렴.”
프레이아의 걸음을 따라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그녀는 언제 봐도 아름다운 여자였다.
“이쪽으로…….”
프레이아는 하르모니아가 손으로 가리킨 의자를 힐긋 보고는 반대편으로 가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언제 봐도 재수 없는 여자이기도 했다.
“차를 드시겠어요?”
“그럼 안 주려고 했니?”
하르모니아는 프레이아의 대답에 잠시 할 말을 잃고 방황했다.
저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사교계의 여왕이라니, 진심으로 ‘사교’라는 단어의 의미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르모니아는 상대방이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살짝 돌리고는 눈동자를 마구 굴렸다. 그러다가 응접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와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하르모니아가 씩 웃으며 그녀에게 주문했다.
“차를 내오렴.”
그러자 프레이아가 냉큼 제 기호를 덧붙였다.
“오이 샌드위치도 함께 가져오려무나.”
문을 열던 하녀가 황급히 몸을 돌려 꾸벅 절했다. 프레이아의 신경질은 이미 데본셔 공작저의 사용인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가급적이면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있다가, 명령하면 고이 받드는 것. 하녀들이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방법이었다.
오이 샌드위치라니. 취향 한번 아삭아삭 고급스럽기도 하지. 하르모니아가 꿍얼거렸다.
리던에서 손님에게 오이를 낼 수 있는 저택은 몇 없을 것이었다. 습한 잉그린트의 기후 탓에 오이가 잘 자라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저택에 온실을 갖추고 오이를 키울 수 있는 가문에서만 과시용으로 대접하는 메뉴가 바로 오이 샌드위치였다.
“그래서, 에우로스는 언제 온다고?”
프레이아가 물었다. 그녀는 리던을 떠난 지 한 달 가까이 지났는데도 아직 돌아오지 않는 에우로스를 기다리다 금단현상 비슷한 것을 겪는 중이었다.
황금화살 클럽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곳의 모든 신사들이 저만 바라본다는 걸 안다. 그러나 그런 건 프레이아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곳에 금빛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시가 연기를 뿜는 에우로스가 없다면 말짱 꽝이었다.
“글쎄요. 오며 가며 2주일은 족히 걸릴 테고, 갤러웨이에서도 머무는 시간이 있겠지요. 또 돌아올 때는 스튜어트 영애를 데리고 와야 하니 아무래도 사무엘과 둘이 움직이는 것보다는 오래 걸리지 않겠어요?”
하르모니아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공작저의 사람들은 그들이 채스웍 매너하우스에 며칠 머물렀다가 리던으로 돌아올 거라는 사실을 미리 전해 들었다. 그러나 잔뜩 가시 돋친 프레이아 고든레녹스에게 그 말을 전했다가는 또 무슨 불호령을 들을지 몰라 그녀는 모른 척하는 중이었다.
“그 촌뜨기를 데리고 오는데 무슨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린단 말이니?”
유리 인형도 아니고, 그래 봐야 지푸라기로 만든 허수아비일 텐데. 그저 마차에 짐짝처럼 싣고 달리면 되는 것을.
“그래도 숙녀잖아요. 긴 여행이 힘들 수도 있지요.”
하르모니아의 대답에 프레이아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숙녀는 무슨! 갤러웨이 성의 붙박이 유령이 어째서 숙녀란 말이야?”
“부인. 말을 삼가세요.”
하르모니아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하녀와 시종들 앞에서 프레이아의 무례를 그저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까닭이었다.
“여기는 공작저고, 프시케 스튜어트 양은 곧 데본셔 소공작의 부인이 될 사람입니다. 부인의 그 말은 우리 가문을 모욕하고자 하시는 건가요?”
그 말에 프레이아가 멈칫했다.
하여간 싸가지 하고는. 귀한 소공녀 하르모니아는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는 여자애였다. 자신에게 살살거리는 영애들과는 달리, 시종일관 윗입술을 뻣뻣하게 굳힌 채 웃어 주지도 않는 건방진 계집애.
“……그럴 리가 있겠어?”
꿈틀거리는 얼굴에 애써 힘을 주며 그녀가 대답했다.
“아무리 지혜롭고 선한 것도, 악한 자에게는 악하게 보이는 법이에요.”
1)
개 눈에는 똥만 보이고요. 하르모니아는 그 뒷말은 눌러 참았다. 대신 꼬리를 살랑거리는 흰 강아지의 등을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부인처럼 사교계에서 명망 있는 분이 그런 실수를 하실 리는 없겠지만요.”
듣다 못한 프레이아가 한마디 하려던 찰나에 하녀가 트롤리를 끌고 들어왔다. 곧 티 테이블에 오이 샌드위치와 찻잔이 보기 좋게 놓였다.
프레이아는 침착하게 마음을 다독였다. 원래 더 사악한 것이 있을 때는, 최악이 아니라는 이유로 칭찬을 받기 마련이다.
2)
프레이아에게 하르모니아가 지금 그런 존재였다. 어쩐지 짜증 나는 갤러웨이 성의 붙박이 유령, 프시케 스튜어트를 떠올리자 하르모니아에게 화를 내려던 마음이 조금 사그라든 것이다.
“사교계, 하니까 말인데.”
프레이아는 찻잔을 들고 잠시 향기를 맡았다. 따스하고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러자 그녀는 제법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숙녀란 무릇, 찻잔을 쥐고 시간을 조금 흘려보내야 하는 법이다. 저 말괄량이 하르모니아 캐번디시처럼 무심하게 뚝딱 차를 들이켤 것이 아니라.
“여왕 폐하께서 스튜어트 영애의 데뷔탕트 무도회를 왕궁에서 열어 주실 거라고 들었어.”
“그랬다더군요.”
하르모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 때문에 공작저는 한창 난리였다.
스튜어트 영애가 결혼 전까지 지낼 방을 꾸며야 했고, 오자마자 치수를 재어 드레스를 여러 벌 만들 수 있는 유능한 재봉사를 고용해야 했으며, 스코틀린 사람인 그녀를 위해 유능한 잉그린트 예법 선생을 초빙해야 했다. 그 모든 일은 신랑이 될 데이모스의 외면과 회피하에 이루어졌다.
“준비는 잘되어 가니?”
프레이아가 떠보듯 물었다.
하르모니아는 티 나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재봉사는 누구를 불렀는지, 장신구는 어느 상점을 통해 주문했는지 그런 시시콜콜한 내용들을 모두 포함한 질문이었다.
프레이아는 중요한 연회가 있을 때마다 하등 쓸데없는 그런 정보들을 긁어모으는 악취미가 있었다. 그 정보들을 토대로 자신이 제일 비싸고 좋은 것으로 치장한 후 누구보다 돋보여야 하는 까닭이었다.
“그건 왜 물으세요?”
“궁금하잖아.”
프레이아가 상큼하게 웃었다.
예쁘긴 참 예뻐서, 저렇게 웃을 때면 꼭 새빨간 꽃잎을 한껏 벌린 한들한들한 양귀비 같았다. 양귀비꽃처럼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화사하기 짝이 없는 미모였다. 그 환각 때문에 리던 사교계가 이 모양 이 꼴인 것이다.
“부인께서 그게 왜 궁금하세요?”
하르모니아의 질문에 프레이아의 눈매가 새치름해졌다.
“내가 도와줄 일이 있을까 해서 물어보는 거야.”
“네에?”
하르모니아의 눈이 커졌다. 빈 가방 하나 제 손으로 들고 다니지 않는 여자의 입에서 도움이라는 말이 나올 줄이야.
“무슨 도움이요? 이미 준비는 저와 어머니가 대충 해 두었어요.”
하지만 하르모니아도 만만치 않았다. 에우로스를 보려고 핑계 삼아 저택에 드나들려는 속셈, 누가 모를 줄 알고.
“스튜어트 영애가 사교계에 데뷔하려면, 샤프롱이 있어야 하잖아.”
아! 하르모니아는 탄식했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자신은 스튜어트 영애와 동갑인 데다 미혼이었다. 그러니 탈락. 어머니인 공작부인은 데이모스가 말도 안 되는 결혼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속이 쓰렸기에 그런 일을 해 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또 탈락.
그래서 사교계의 어른들 중에 프시케 스튜어트의 샤프롱이 될 만한 이를 수소문해 보았다. 그렇지만 그들 대부분이 프시케 스튜어트의 샤프롱을 담당하는 일에 난색을 표했다.
표면적으로는 샤프롱을 맡을 만큼의 친분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으나, 실제로는 프시케 스튜어트를 불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령’이라는 별명을 가진 여자의 샤프롱을 할 대담한 귀부인이 어디 있겠는가.
“사교계에서 내 영향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겠지, 하르모니아.”
그 말의 진의를 파악하자, 하르모니아의 귀가 솔깃해졌다.
그녀가 프시케 스튜어트의 샤프롱이 되어 준다면 아마 큰 화제가 될 것이다. 대귀족 출신인데다, 총리의 부인이고, 사교계의 여왕인 프레이아만큼 샤프롱으로 조건이 딱 들어맞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샤프롱이 되어 주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하르모니아의 질문에 프레이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넘어왔군. 그녀의 예쁜 얼굴 뒤편으로 비웃음이 내걸렸다.
“실은 저도 프시케 스튜어트 영애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어쩌면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할 수도 있어요.”
“그건 걱정하지 말렴.”
3)
여차하면 발을 빼면 된다. 프레이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생글거리며 하르모니아를 다독였다.
무에서 생기는 것은 무밖에 없겠지만.
하르모니아는 생각에 잠겼다. 프레이아 고든레녹스는 재수 없는 여자이긴 하지만, 샤프롱으로 전면에 나서면서 설마 무슨 꿍꿍이야 있으려고.
샤프롱이 된다는 건 프레이아 본인의 체면이 걸린 일이기도 하니 섣불리 행동하지는 못할 것이다. 공작새처럼 꾸미고 나타나 프시케의 기를 죽이려 들긴 하겠지만 그건 데본셔 공작가의 위세로 대응하면 될 일이다.
미심쩍은 구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으로서는 프레이아만 한 패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르모니아는 결정을 마쳤다.
이번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프레이아 고든레녹스가 프시케 스튜어트의 샤프롱이 될 것이다. 그렇게 결심하고 나니 하르모니아는 마음의 짐이 한결 덜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스튜어트 영애가 오기 전까지 우리가 무엇을 더 준비하면 될까요?”
“일단, 아주 화려한 보석을 좀 봐 두어야겠지?”
하르모니아가 묻자, 프레이아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보석이요?”
4)
비싼 옷은 결점을 전부 가려 주지. 스튜어트 영애는 좋지 않은 소문의 주인공이니까, 그걸 덮을 만한 고급스러운 인상을 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원래 넝마 옷 사이로는 작은 흠결이 더 잘 보이는 법이란다.
“그런가요?”
하르모니아는 약간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으나,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하르모니아 본인은 보석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프시케 스튜어트의 취향은 아직 모르는 것이다. 게다가 명색이 데이모스의 부인이 될 여자인데 괜찮은 장신구를 갖추는 편도 나쁘지 않겠지.
비싼 옷은 결점을 전부 가려 주지. 스튜어트 영애는 좋지 않은 소문의 주인공이니까, 그걸 덮을 만한 고급스러운 인상을 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가요?”
“다음에 본드 스트리트에서 쇼핑하면 되겠네. 내가 공작저로 올게.”
“다음에요? 그게 언제인데요?”
“프시케 스튜어트 영애가 도착하면 고든레녹스 저택으로 전갈을 보내렴.”
에우로스가 도착하면, 이라는 말이 더 맞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프레이아는 고혹적이고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제 앞에 정갈하게 놓인 오이 샌드위치 하나를 집었다. 입안에서 퍼지는 상쾌한 오이 향이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에우로스가 도착하면, 이라는 말이 더 맞겠지.
그 속이 참으로 빤하다. 하르모니아는 마음속으로 구시렁거렸다. 프레이아는 결혼 전에도, 심지어 결혼 후에도 에우로스를 만나려 공작저와 황금화살 클럽을 쏘다니는 여자니까.
제 주인의 생각에 대답하듯 하르모니아의 품 안에서 강아지가 또 앙앙 짖었다.
1)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어왕》 4막 2장 대사 일부 수정 인용.
2)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어왕》 2막 4장 대사 일부 수정 인용.
3)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어왕》 1막 1장 대사 일부 수정 인용.
4)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어왕》 4막 6장 대사 일부 수정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