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오만과 편견
갤러웨이를 출발한 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쉼 없이 마차를 달린 결과, 그들은 3일 후 잉그린트 중부에 있는 더비셔에 도착했다. 마차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지어진 한 매너하우스 앞에 섰다.
“이곳에서 이틀 정도 쉬었다가 다시 리던으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프시케가 탄 마차의 문을 열고 에우로스가 말했다. 그의 말에 프시케와 클라리사는 동시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가 어디인가요, 공자님?”
에우로스는 프시케의 물음에 싱긋 웃었다.
“제가 소유한 저택입니다.”
프시케는 에우로스의 뒤편에 서 있는 고풍스럽고 우아한 베이지색 건물을 건너다보았다. 옆으로 길게 뻗은 사각형 대칭 구조의 건물 가운데 중정이 있고, 종탑이 위로 뻗어 올라간 형태였다.
“저택이, 참 아름답네요.”
그녀의 칭찬에 에우로스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그들은 현재, 마구간 앞에 있었다. 그러나 에우로스는 그녀의 말을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이 건물 뒤편으로 본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머물게 될 곳입니다. 잠시 뒤에 뵙지요.”
그가 말을 맺으며 다시 제가 탔던 마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순간 프시케가 에우로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틀이나 머물러도 되는 걸까요? 어서 리던으로 가 보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갤러웨이 성에 있는 동안, 그녀는 에우로스와 사무엘이 서류 더미에 파묻혀 일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그들은 열정 넘치는 사업가였고, 사업가에게 시간은 곧 돈이라는 사실을 프시케도 잘 알았다.
“저와 사무엘만 이동하는 거였다면 곧장 달렸을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애께서 동행하시니 최대한 불편함 없이 모시는 것이 도리 아니겠습니까.”
그의 다정하고 자상한 말투에 프시케는 살짝 볼을 붉혔다. 감동의 홍수에 휩쓸린 건 클라리사도 매한가지였다.
그들 평생 이렇게 오래 마차를 타 본 적이 없었다. 갤러웨이 영지를 벗어나 본 적도 없었다. 국경을 지나 잉그린트로 진입한 뒤부터는 도로 사정이 좋아져 조금 덜했지만, 스코틀린의 길은 정말이지 험악했다.
그런 이유로 프시케와 클라리사는 여행 내내 구토를 번갈아 가며 했다. 그치지 않는 멀미 때문에 실제로 지금 그녀들의 몸 상태는 별로 좋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그럼 본관에서 뵙겠습니다.”
마차 문이 닫히자 클라리사는 또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프시케에게 말했다.
“이렇게나 신경을 써 주는 걸 보니, 아가씨와 가족이 될 사이라 그런가 봐요. 뺀질뺀질한 누구랑은 달리 정말 괜찮은 남자라니까요.”
* * *
에우로스 일행이 마차에서 내려서자, 저택 앞에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던 사용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선 위치는 간격이 일정했고, 숙이는 고개의 각도마저 자로 잰 듯 동일했다.
사무엘은 처음 갤러웨이 성에 도착했을 때, 그곳 사용인들의 인사를 떠올리며 쿡쿡 웃었다. 보아라, 이것이 바로 잉그린트의 절도라는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에우로스 님.”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 가운데, 격식을 갖춘 옷차림을 한 중년 남성이 한 발짝 걸어 나와 에우로스에게 인사했다. 채스웍 하우스의 집사였다.
“잘 지냈나?”
에우로스는 본관 건물과 사용인들을 슥 훑어보며 물었다.
“예. 오신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손님들을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만, 만일 부족한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집사는 더할 나위 없이 예의 바른 태도로 대답했다. 그리고 에우로스 뒤쪽에 서 있는 프시케를 향해서도 공손히 인사했다.
프시케는 이 순간, 굉장히 당황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프시케가 멋지다고 칭찬했던 건물이 사실은 마구간이었다는 것이 그녀를 매우 부끄럽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오늘 밤 그녀는 침대에 누워 몇 번이나 발을 구르고 이불을 걷어차게 될 것이다.
한편,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저택의 본관. 프시케는 그 건물을, 갈리아의 루이스 왕이 파리스 근교에 지었다던 궁전에도 견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뒤로는 키가 높은 숲, 앞으로는 개울이 흐르는 대지 위에 세워진 크고 잘생긴 석조 건물은,
1)
여러 양식이 조화롭게 혼재되어 있었다.
“처음 이 저택이 지어진 것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통치하던 때였습니다. 그 후에 이 건물을 중심으로 증축과 개축을 거듭하면서 지금 이런 모습이 되었죠.”
에우로스가 친절히 설명했다.
프시케는 요즘에 와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수백 년 전의 건축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1층보다는 2층의 천장고가 높았고, 2층보다는 3층의 천장고가 높은, 특이한 형태였다. 벽에 유리창이 빼곡하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벽보다 유리가 더 많네요.”
프시케는 경탄했다.
유리는 비쌌다. 사치품인 유리를 이렇게 벽 전체에 빽빽하게 두를 수 있는 고택은 브라이튼 섬 내에서도 몇 없을 것이다.
“사실, 이 저택의 정수는 내부에 있습니다.”
에우로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들어가 보시지요. 저택을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프시케는 홀린 듯 에우로스의 뒤를 따랐다. 사무엘은 이미 휘적휘적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난 후였다.
에우로스가 움직이자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사용인들이 다시 한번 몸을 숙였다. 여전히 어떠한 오차도 없는 움직임이었다.
“세상에나, 하인들이 아니고 무슨 군인들 같네요.”
클라리사가 프시케의 옆에 바짝 붙어 소곤거렸다. 클라리사 또한 이곳에 도착한 후 상당히 주눅 든 상태였다.
저택의 규모도 그렇고, 멀리까지 내려다보이는 정원은 마치 들판 여러 개를 떼어 와 붙여 놓은 것처럼 광활했으며, 무엇보다 사용인들의 말쑥한 옷차림과 품위 있는 태도가 주는 위압감이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곧 클라리사는 하녀장의 부름을 받고 뒤뚱거리며 사라졌다.
프시케는 엉성한 제 옷차림과 어수룩한 클라리사의 행동에 조금 웃음이 나왔다. 놀라긴 했지만 압도당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단단하고 굳센 생각은, 건물 안으로 들어간 순간 와장창 깨어졌다. 그 내부는 상상 이상이었다.
“이곳은 대연회장입니다.”
에우로스가 위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손가락 끝에 대연회장의 천장화가 있었다.
“저 모서리 쪽 회화는 꽤나 입체적으로 표현되었지요. 촛불을 밝히면 생기는 그림자까지 계산해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 속에는 신화 속 인물들과 천사들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었다. 그 인물들이 내려다보는 벽면에는 금칠한 가죽 벽지와 섬세하게 조각된 장식, 눈부신 태피스트리들이 천박하지 않은 방식으로 조밀하게 들어차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지나칠 수 없었다. 웬만한 일에는 크게 놀라지 않는 프시케마저도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릴 정도였다.
“갤러리도 구경해 보시겠습니까?”
“네, 네에.”
에우로스의 제안에 프시케는 여행으로 인한 피로도 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그녀를 이끌고 북관으로 향했다.
천장에 뚫린 사각형의 창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자 회색 대리석 벽 공간이 곧 모습을 드러냈다. 로미아 시대에 만들어진 관능적인 조각상과 부조가 내부를 채우고 있는 곳이었다.
“이것들을 깨지지 않게 옮겨 오느라 꽤 고생했습니다.”
에우로스의 목소리에 자부심이 배어 나왔다.
“흰색 조각상과 회색 벽이 잘 어울리네요.”
“그렇게 보아주시니 고맙습니다.”
에우로스가 그녀를 향해 빙긋 웃은 뒤 말을 이었다.
“사실은 조금 더 화려한 색깔의 대리석을 사용해 벽을 꾸밀 예정이었습니다만, 수급이 원활하지 않았습니다. 유색 대리석은 다른 대륙에서 들여와야 하니까요. 어쩔 수 없이 회색 자재를 썼는데, 결과적으로는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에우로스는 갤러리를 빠져나와 그녀를 중앙 홀로 인도했다. 높고 웅장한 홀의 바닥은 체스판처럼 희고 검은 대리석 격자로 짜여 있었다. 천장과 벽면을 장식한 그림 속 인물들이 새어 들어오는 빛에 감겨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밤을 지나 새벽으로 들어서는 그 찰나의 시간을 공간으로 표현한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일 것이다. 프시케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쩐지 조금 위축되는 기분이네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공작부인이 되시면 이보다 더 대단한 것들을 누리며 사실 테니까요.”
그녀가 내어놓은 소감에 에우로스가 돌아보며 말했다. 프시케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조금 걱정되기 시작했어요.”
프시케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에우로스가 급히 손을 내밀었다.
“잡아요.”
그녀는 그의 팔을 잠시 내려다본 뒤 천천히 그 위로 손을 올렸다. 그러자 어쩐지 조금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기도 했다.
“공자님께서는,”
프시케가 입을 열었다.
“이 저택을 상속받으신 건가요?”
적자도 아닌 아들에게 이런 수준의 저택을 넘겨주는 가문이라니.
데본셔 공작가가 매우 부유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프시케는 그것이 그렇게 달갑지 않았다.
“상속받은 것이 아닙니다. 원래 이 저택은 잉그린트의 한 귀부인이 소유했던 것이었지요. 그분을 설득해 사들인 것입니다. 제힘으로 일군 첫 쾌거가 이 저택이거든요.”
에우로스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무는 프시케를 유심히 보며 대답했다. 제 손을 잡고 난 뒤 희게 질렸던 그녀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는 것도 같았다.
“이렇게 대단한 곳을 순순히 팔려 하시던가요?”
프시케는 의외의 대답에 조금 놀라 물었다.
“그럴 리가요. 꽤 애를 먹었죠.”
그렇게 말하며 에우로스는 까탈스럽게 굴던 노부인을 떠올렸다.
처음 큰돈을 벌었을 때, 그가 가장 처음 알아보았던 것은 ‘집’이었다. 데본셔 영지의 성도, 리던의 공작저도 아닌 오로지 에우로스 본인만을 위한 집.
그가 이 매너하우스를 발견했던 것은 우연이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에우로스는 이 저택을 매입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 당시 저택의 소유주는 일흔이 넘은, 명망 있는 가문의 귀부인이었다.
에우로스가 그녀와 약속을 하고 저택에 방문했던 날, 노인은 그가 사생아라는 사실을 확인이라도 시켜 주듯 세 시간 넘게 응접실에서 홀로 차를 마시게 했다. 그 후에도 몇 번이나 에우로스를 바람맞히며 그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어떻게 설득하셨나요?”
프시케의 호기심이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에우로스는 피식 웃었다.
마침내 노부인을 만나게 되었을 때, 에우로스는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입술에 경련이 날 만큼 웃어야 했다. 어차피 자식이 없어 사후에 방계의 누군가에게로 넘어갈 이 저택을 잇새에 꽉 물고 내어 주질 않으며 얼마나 애를 태우던지.
게다가 그녀는 저택을 매매하기 위해 반드시 확인받아야 할 내용이라며 별의별 황당한 조건들을 내세우기까지 했다.
사용인들을 해고하지 말 것, 함부로 저택을 손상시키거나 상스럽게 꾸미지 말 것, 정원을 개보수하되 자연의 흥취를 깨트리지 말 것, 1년에 한 달 이상은 반드시 저택에 와서 기거할 것, 손님들을 초대할 것, 자신의 정원 산책을 허가할 것.
더 이상 자신의 것도 아니게 될 저택을 두고 노부인은 시시콜콜 잔소리를 해 댔다. 에우로스는 다소 배알이 꼴렸으나 겉으로 환하게 웃으며 무조건적인 긍정을 쉴 새 없이 표출했다.
“왜 하필 이 집인가?”
그녀의 물음에 에우로스는 이렇게 답했다.
“사생아에게도 편히 다리 뻗고 잘 집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녀는 평생 남편의 외도에 시달렸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남편이 남기고 떠난 사생아들을 포용해 뒤로 몰래 거두고 있을 정도의 호인이기도 했다.
마뜩잖게 그를 보던 노인은 그 대답을 듣자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내걸었던 조건들을 계약서에 명시한 뒤 거듭 확인을 거친 후에야 에우로스에게 소유권을 넘겨주었다.
“그저,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했을 뿐입니다.”
에우로스의 대답에 프시케가 다시 물었다.
“마음을 얻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닐 텐데요?”
“그럴 리가요.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에우로스에게 남의 마음은 돈보다도 얻기 쉬운 것이었다.
인간은 유약하고 변덕스럽고 멍청한 존재였다. 누구에게나 어떤 식으로든 틈이 있고, 그 틈을 벌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조그마한 지렛대 하나면 충분했다. 타인의 마음을 웃기고 울릴 만한 아주 작은 막대 하나만 있다면, 그 막대를 지레 삼아 틈에 끼워 넣고 약간의 힘만 주면 되었다. 그러면 틈은 순식간에 커지고 내용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프시케는 그의 확고한 말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오만에 편견을 가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어쩐지 그녀는 말하고 싶었다. 그건, 대단히 교만한 생각이라고.
“내일은 정원을 구경시켜 드리지요.”
프시케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에우로스가 새파랗게 웃었다. 그 눈웃음이 프시케의 아주 작게 벌어진 틈을 타고 들어왔다.
흰 장갑을 낀 손이 그녀의 앞에 다시 내밀어졌고, 그리고, 그의 손가락이 마음속 작게 벌어진 틈새의 간격을 조금 더 벌렸다.
1)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팸벌리 저택 묘사 장면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