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더럽고 고운 날
“여기서부터 남쪽으로 방향을 잡게.”
“예.”
에우로스가 마부에게 지시했다. 마차의 문을 잡고 있던 마부가 그에게 공손하게 대답하며 허리를 구부렸다.
에우로스 일행과 프시케, 그리고 클라리사는 갤러웨이를 출발해 리던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한참 마차를 달리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것을 본 에우로스는 가까운 마을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여장을 풀고 저녁 식사를 위해 여관에 붙은 작은 식당으로 들어섰다.
“남쪽으로 가지 않고 쭉 동쪽으로 달리면 글라미스라지?”
사무엘이 하기스를 우적우적 씹으며 말했다.
놀랍게도 그의 적응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제 그는 토탄 냄새가 잔뜩 밴 위스키를 벌컥벌컥 들이켰고, 누린내가 진동하는 하기스를 꿀떡꿀떡 삼키며 맛을 음미하기에 이르렀다.
“꼭 가 보고 싶은 곳인데 말이야.”
사무엘이 쩝, 소리를 내며 아쉬워했다.
“글라미스에는 어쩐 일로요?”
프시케가 물었다.
“맥베스의 고향이 아닙니까.”
사무엘이 신나서 대답했다.
“셰익스피어를 좋아하시나요?”
“셰익스피어를 싫어하는 잉그린트 사람도 있을까요? 인더스는 내주어도 셰익스피어는 내어 줄 수 없죠.”
프시케는 그 대답에 항변하고 싶었지만,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대신 에우로스가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을 해 주었다.
“인더스 사람들이 들으면 불쾌함에 치를 떨 말인데, 사무엘.”
“식민지인들에게는 안됐지만, 그만큼 셰익스피어가 대단한 극작가이니 하는 소리지.”
사무엘은 에우로스의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할 만큼 여러모로 좋은 남자였다. 적당히 준수한 외모와 활달하고 호탕한 성격, 의리와 의기는 그의 큰 장점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체성은 어쩔 수 없이 잉그린트 사람이었고, 귀족이었다. 그러한 정체성은 대개의 경우 장점으로 작용하지만, 가끔은 단점이 되기도 했다. 바로 이런 때였다.
“스태포드 님은 어떤 작품을 제일 좋아하시나요?”
프시케가 사무엘에게 질문했다. 사무엘은 잠시의 뜸도 들이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말괄량이 길들이기’입니다. 너무나 재미있지 않습니까? 망아지처럼 날뛰던 여자가 남편의 훈육을 통해 순종적인 귀부인으로 변화해 나가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지요.”
사무엘은 잉그린트 사람이었고, 귀족이었고, 그리고 당대의 남자였다.
“공자님은요?”
프시케의 목소리에 사무엘에게 질문할 때보다 호기심이 조금 더 실렸다.
“…….”
에우로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사실, 연극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애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하기 위해 굳이 말씀드리자면, ‘맥베스’입니다.”
맥베스. 야망의 서사. 프시케는 그 작품이 에우로스와 썩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어째서요?”
“그저, 좋아하는 구절이 그 극에 있으니까요.”
에우로스는 다소 시니컬하게 말했다.
“무엇인가요?”
“인생은 멍청이가 떠드는 이야기,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차 있지만 결국엔 아무 의미도 없다.”
1)
프시케는 그의 말에서 까닭을 알 수 없는 허무를 읽어 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야망이 가득해 보이는 에우로스에게 허무라니. 누구보다 잘 웃고 상냥한 그에게 분노라니. 욕망하면서도 욕망하지 않는 것 같은,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예전에, 아주 어렸을 적, ‘맥베스’ 공연을 본 적 있답니다.”
프시케가 이야기를 꺼내자, 사무엘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갤러웨이에도 극단이 있나 보죠?”
프시케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잉그린트에서 온 유랑 극단의 공연이었어요.”
그 말에 에우로스는 저도 모르게 입에 대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너무 어려서 공연 내용은 이해할 수 없었어요. 클라리사가 데려갔죠. 연극은 너무 보고 싶은데 저를 돌봐야 했으니, 몰래 데리고 나갔던 거였어요.”
“확실히 어린 아이가 보기에 적당한 극은 아니지요.”
사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도 기억나요. 그때 레이디 맥베스를 연기했던 배우 말이에요.”
에우로스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다음 말을 기다렸다.
“금발의, 아름다운 배우였어요. 그런데 너무너무 무서웠어요. 그래서 울었죠.”
“그랬겠군요. 그 역할은 그럴 테죠.”
사무엘이 맞장구치며 하하 웃었다.
“시간이 오래 지난 뒤에 깨달았어요. 그때 느꼈던 그 공포는 아마도 배우가 뿜은 압도적인 힘 때문일 거라고요.”
프시케는 클라리사의 손을 잡고 연극을 보러 갔던 날을 회상했다.
2)
더운 바람이 불었지만 공기는 청결했고, 오랜만의 나들이라 설렜지만 연극의 내용은 어려웠다.
그날은 참으로 더럽고 고운 날이었다.
연극을 보는 내내 칭얼거리던 그녀는, 공연이 끝난 뒤에도 극단의 천막 근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클라리사가 잘생긴 배우의 사인을 받아야 한다며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오래 흐르자 프시케는 점점 지루해졌고, 클라리사가 까치발을 들고 천막의 안쪽을 기웃거리고 있는 틈을 타 몰래 그곳에서 도망쳤다. 그것이 아마 그녀가 벌인 인생의 첫 일탈이었을 것이다.
천막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와 버린 어린 프시케는 문득 돌아갈 길을 잃어버렸음을 깨달았다. 갤러웨이 성을 벗어나 본 적 없던 꼬마 귀족 아가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씩씩했다. 그녀는 골목을 쏘다니며 자신을 집으로 데려다줄 마음씨 넉넉한 어른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나 어둑하고 더러운 골목에서 그녀가 발견한 것은, 마음씨 넉넉한 어른이 아니었다.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것 같아 보이는 또래의 남자아이였다.
“괜찮니?”
프시케는 그 아이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이고 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아프지 않니?”
눈물 맺힌 새파란 눈이 가득 부풀어 올랐다.
“신경 꺼.”
남자아이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넋이 나가 있던 프시케가 들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건 그 아이가 진심으로 원하는 일이 아니라는 걸.
그래서 프시케는 기꺼이 오물과 진흙으로 뒤덮인 그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처음 입고 나온 드레스가 더럽혀지고 구겨지는 것쯤은 상관없었다.
제 행동에 아이는 왠지 안도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끅끅거리던 울음은 소리를 내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둡고 비좁은 골목길에서, 그 울음소리는 메아리처럼 건물 사이를 여기저기 부딪치며 튕겨 나갔다.
그 울음은 낯설었다. 프시케는 그때까지 그렇게 울어 본 적이 없었다. 넘어져서, 무서워서, 심술이 나서 울어 본 적은 있었지만, 남자아이의 울음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 애의 울음은 깊고 무거웠다.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마치 둑을 허물어트리고 밀려드는 물살처럼 그녀에게 밀려들어 왔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알싸하고, 묵직하고, 씁쓸하고, 어지러웠다.
소리에 형태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클라리사가 빨래할 때 내는 비눗방울과 같은, 그런 모양일 거라고 프시케는 생각했다. 그렇게 그 남자애의 소리는 제 안에서 둥글게 모양을 빚어 쉼 없이 솟아오르다 천천히 곳곳으로 터져 나갔다.
“그 공연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에우로스가 물었다. 프시케는 고개를 살짝 젓고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새파란 눈동자의 남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새파란 눈동자. 이제야 그녀는 왜 자신이 에우로스를 처음부터 친근하게 여겼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에우로스의 눈동자는 그때 만났던 남자아이의 눈동자와 많이 닮아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이상하리만치 신뢰하는 마음이 들었던 거였다.
그러나 그 눈동자를 제외하면 그 아이와 에우로스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에우로스는 프시케보다 나이가 몇 살 더 많았다. 그 남자애는 많아 봐야 저와 동갑인 정도로 보였다.
에우로스는 순도 높은 금빛 머리카락을 가졌다. 그 남자애의 머리카락은 마치 회색 고양이의 털과 같았다.
에우로스는 공작의 아들이었다. 그 남자애는…… 아마도 토탄을 캐는, 가난한 집 자식이었을 것이다.
“네, 그 배우에 대해서요.”
프시케는 방금 전 대화 주제로 돌아와 답했다.
“공포를 느끼셨을 만큼 대단한 연기였나 보죠. 아이의 눈은 정확하니까요.”
에우로스는 무심하게 답했다.
그래, 제 어미의 연기는 대단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엘리자베타에게 남은 것은 광기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의 레이디 맥베스는 아마도 완벽했을 것이다.
엘리자베타가 공연할 때, 에우로스는 늘 그랬듯 단장이 시킨 일을 하고 있었다.
커다란 들통에 독한 양잿물을 가득 부어 놓고 극단 사람들의 옷을 빠는 것은 그와 그보다 조금 더 자란 소년들이 항상 해 오던 일이었다. 그때도 에우로스는 손이 부르트고 눈이 따끔해질 때까지 빨래를 주물러 대는 중이었다.
“그 꼬맹이 봤어?”
“파란 옷 입고 있던 여자애?”
“부잣집 아가씨인가 보지. 드레스에 그런 색깔을 내려면 값비싼 염료를 써야 할걸.”
“납치라도 해서 돈을 뜯어내 볼까. 어리숙해 뵈는 하녀 하나만 달랑 데리고 나왔던데.”
에우로스에게 일을 전부 넘겨 버리고 담배를 태우던 놈들이 시시덕거렸다.
“야, 에우로스, 너도 낄래?”
그중 제일 나이가 많고 덩치도 좋은 조니가 바닥에 침을 칵 뱉으며 빙글거렸다. 에우로스가 대답하지 않자 조니는 갑자기 얼굴을 굳히더니 들통 쪽으로 다가와 다짜고짜 그의 뒷목을 잡아 머리를 양잿물 속으로 처넣었다.
자주 당하던 일이었다. 그날도 에우로스의 머리는 수십 번, 어쩌면 수백 번 양잿물 속에 담가졌을 것이다.
그냥 이대로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그는 자유로워졌다. 소년들이 킥킥거리며 자리를 뜨자 에우로스는 너무 따가워 제대로 뜰 수조차 없는 눈을 비비며 아무 쪽으로 달려 나갔다.
어느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썩은 음식물 냄새를 맡으며 그는 주저앉아 울었다. 그리고 그녀를 만났다.
이제는 저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래서 다행스러운, 어린 프시케 스튜어트를.
1) 윌리엄 셰익스피어 《맥베스》 5막 5장 대사 일부 수정 인용.
2) 윌리엄 셰익스피어 《맥베스》 1막 3장 대사 일부 수정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