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웃음
프시케와 카듀 강을 번갈아 바라보던 에우로스가 뒷짐을 지고 천천히 수풀 위를 걸었다. 그의 걸음을 따라 드문드문 깔려 있던 자갈이 타닥타닥 소리를 냈다.
저 여자는 아직 이 땅이 얼마나 비싸질지 모르고 있다.
프시케에게 소풍을 청한 것은, 그녀가 이 땅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한낮의 푸른 강물은 한밤의 그것처럼 빛나지 않았다. 한낮의 검은 바위는 한밤의 그것처럼 제 진짜 모습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니 가뜩이나 인적이 드문 이곳에, 황금을 숨긴 광산이 있을 것이라고는, 땅 주인인 프시케를 포함해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밤중에 이곳엘 오는 사람은 더더욱 없을 테니까.
카듀 강은 어린 프시케가 다녀간 후 비로소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프시케가 몸을 담갔던 강물 속에 숨어 있던 사금이, 그녀의 입을 빌려 제 존재를 알렸던 것이다.
황금을 만들어 내는 손을 가졌다던 왕이 강물에 손을 씻자 강바닥의 모래가 전부 금으로 바뀌었다지. 그 전설 속 왕처럼 프시케는 이 강의 가치를 폭등시킨 위인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직 에우로스 본인과 사무엘 단둘뿐이다.
에우로스가 카듀 강을 떠올린 것은 불과 얼마 전이었다. 아버지와 거래한 뒤 갤러웨이로 프시케를 데리러 갈 채비를 하던 때였다.
신문에서 스코틀린 어느 지방의 금광 채굴 기사를 읽었던 것은 우연이었다. 강물이 유독 번쩍거려 조사해 보았다가 발견한 금맥에 대한 이야기를 보았을 때 그의 머릿속에 별똥별이 펑펑 불길을 내뿜으며 떨어졌다.
그때 그 여자애와 보았던 것은 반딧불도, 별도 아니었다. 그건 아마도 사금이었을 것이다.
조사해 본 바, 갤러웨이 영지의 3분의 2는 이미 빚쟁이들의 손으로 넘어가 있었다. 그러나 카듀 강이 흐르는 이 땅은 갤러웨이에서도 가장 개발되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에 고스란히 프시케의 소유로 남아 있었다. 그건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가히 천운이라 할 만했다.
그녀가 데이모스와 결혼한 후, 에우로스는 데이모스의 눈을 피해 프시케와 거래를 할 생각이었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두 번째 소원을 들이밀어 반드시 이 땅을 사용할 권리를 얻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금광을 개발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금을 찾겠다고 몸을 굽실대며 투자를 받아 신대륙으로 배를 띄울 필요도 없었다.
“양이 어마어마하군. 흐르는 사금의 양을 보면 금광 규모는 가히…….”
사무엘이 혀를 내둘렀다. 그는 에우로스 옆에서 오랜 시간 함께하며 그가 어떻게 사업을 하는지, 어떻게 돈을 벌어들이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에우로스, 이번에는 또 무슨 약점을 쥐려고?”
그 말에 에우로스가 피식 웃었다.
“약점이라니. 그렇게 말하면 꼭 내가 악당이라도 된 것 같잖아.”
악당이 맞긴 하지. 사무엘은 그 말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며칠 전에 봤던 그 반군을 들먹이면 일이 쉬워지지 않을까?”
사무엘의 말에 에우로스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잔인하네, 사무엘.”
잔인하다니, 내가? 네가 아니고? 사무엘은 그 말도 꿀꺽 삼켰다.
“데이모스 캐번디시가 알면 당연히 양보하지 않을 텐데. 어떻게 할 작정이야?”
“당연히 데이모스는 몰라야지.”
“둘은 부부가 될 사이인데 모를 수가 있나?”
“모르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에우로스는 뜻 모를 웃음을 지었다. 악마는 원래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미소를 띠고 다가온다고 했다. 사무엘은 그의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저 여자를 어떻게 설득할 셈이야?”
“글쎄. 마음을 얻어야 하지 않겠어?”
마음을 얻는다. 에우로스가 프시케 스튜어트의 마음을.
“이번에는…….”
사무엘은 며칠 전 밤, 프시케가 험한 꼴을 당할 뻔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돌보아 줄 부모 형제가 없으니 그런 일을 겪는 게지. 그는 아직 나이 어린 제 막내 여동생을 떠올렸다.
부모인 스태포드 남작 부부가 죽고 오빠 세 명도 없다면, 그 아이는 얼마나 힘들게 살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니 사무엘의 마음이 짠해졌다.
“이번에는 웃어 주지 마, 에우로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사무엘?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에우로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에도 그는 잘생겼다. 사무엘은 저 외모에 영혼을 판 여자들의 이름을 목록으로 만들어 줄줄이 꿸 수도 있었다.
그 여자들 앞에서 에우로스는 장갑 한 번, 코트 한 번을 벗은 적이 없건만, 그녀들은 재산을 다 내어 줄 것처럼 굴었다. 그는 여자들의 투자를 이끌어 내는 데 천재였다.
“동생의 여자를 꼬드길 생각이라면 나는 반대야.”
“하!”
사무엘의 말에 에우로스는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처음에는 큭큭거리던 웃음이 점점 큰 소리를 내다가 종래에는 그의 눈에 눈물까지 고였다.
“사무엘, 자네 정신이 나갔나 보군.”
이윽고 웃음을 멈춘 에우로스가 버석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흰 장갑을 낀 손으로 발갛게 물든 눈매를 살짝 훔치며 그는 말을 이었다.
“내가 그렇게까지 쓰레기로 보여?”
에우로스의 웃음은 대개 기쁨의 표현이 아니었다. 숨기거나, 밀어내거나, 부정할 때 그는 웃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이 있을 때와 화가 났을 때 가장 크고 환하게 웃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사무엘은 등 뒤가 축축하게 젖는 것을 느꼈다.
“에우로스. 다이애나 스터튼, 기억해?”
그러나 할 말은 해야겠다. 사무엘이 불쑥 물었다.
“스터튼이라면? 아폴론 스터튼은 아는데.”
에우로스의 한쪽 입술이 살짝 들려 올라갔다. 얼마 전 그 오만방자한 아폴론에게 멋지게 복수한 일이 떠올라서였다.
“그 아폴론 스터튼의 누이 말이야.”
“그치에게 누이가 있었나?”
사무엘의 턱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1년 전, 에우로스에게 빠져 리던 사교계에 풍파를 일으켰던 드센 여자, 다이애나 스터튼. 아직도 가끔 회자되는 그 우스꽝스럽고도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 중 하나가 그녀였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의 주인공은 그 사건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다이애나 스터튼이 에우로스에게 빠진 것은 사냥대회에서였다. 오라비와 마찬가지로 성격이 괴팍하며 난폭하다고 소문난 그녀는 사냥대회에서 백발백중의 활 실력을 뽐낸 금발의 미남 에우로스를 향해 열렬히 돌진했다.
차갑고 무뚝뚝하기로 유명했던 다이애나였으나 그 사랑만큼은 뜨겁고 애달팠다. 그 사랑의 대상이 그릇되었다는 것이 불운이었을 뿐이다.
인간을 가치 환산하는 에우로스의 계산적인 눈에 다이애나의 불같은 열정이 보였을 리는 만무했다. 하지만 그는 새파란 눈동자를 반짝이며 그녀에게 웃어 주었다.
있는 거라고는 돈밖에 없는 스터튼 자작가의 장녀는 그의 웃음에 홀려 투자를 약속했다. 에우로스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짓는 웃음인지도 모르고.
계약서를 작성하는 척, 다이애나는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에우로스의 손등을 살짝 스쳤다.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여자의 손을 밀어내며 그가 다시 웃었고, 사랑에 눈먼 여자는 자신이 거절당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사무엘은 옆에서 그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밀어내는 웃음은 에우로스만이 지을 수 있는 것이었다.
다이애나의 통 큰 투자 덕에 에우로스는 황금화살 클럽을 인수했다. 사교클럽에서 나오는 수익은 투자금 비율대로 정확히 계산되어 투자자들에게 되돌아갔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에우로스를 만나기 위해 부단히 황금화살 클럽에 방문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신사 전용 장소라는 앵무새 같은 안내만을 듣고 돌아서야 했다.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다이애나의 분노는 날이 갈수록 누적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그녀는 프레이아 고든레녹스가 황금화살 클럽에 드나든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에우로스!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죠?”
다이애나는 씩씩거리며 에우로스에게 따져 물었다. 황금화살 클럽의 정문 앞에서 장장 네 시간 동안 기다린 후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영애?”
에우로스는 만개한 장미꽃처럼 미소 지으며 따사롭게 물었다. 화내는 웃음. 사무엘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이애나는 잠시 그 미소에 혼 빠진 얼굴을 했다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어째서 나는 이곳에 들어갈 수 없고, 프레이아 고든레녹스는 들어갈 수 있는 건가요?”
“그건, 계약을 그렇게 했으니까요.”
“우리는 계약에 얽매이는 사이가 아니잖아요!”
빽, 소리를 지르는 여자 앞에서 에우로스는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물었다.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천진하고도 무구한 표정이었다.
“우리가 무슨 사이입니까?”
“우리는, 우리는, 마음을 나눈 사이잖아요.”
다이애나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양산을 든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에우로스는 그럴듯한 신사처럼 그 양산을 대신 잡아 주며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절 좋아하셨으니 그리 웃어 주신 것 아닌가요?”
에우로스는 그 말을 듣자 또 웃었다. 아주 환하게.
그 웃음을 보자 문득, 다이애나는 그간 그녀가 알아채지 못했던 어떤 미묘한 감정의 틈 같은 것을 깨달았다. 에우로스의 웃음은 텅 비어 있었다.
다이애나의 얼굴이 마치 납에 중독된 사람처럼 창백해졌다. 사랑의 신이 내지른 납 화살이 심장을 관통하는 순간이었다.
순간 그녀는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에우로스는 들고 있던 양산을 곧바로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그 후로 다이애나 스터튼은 사교계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아폴론 스터튼은 에우로스와 같은 천한 사생아 잡종에게 돈을 갖다 바친 누이를 고이 두지 않았다. 그는 다이애나를 수녀원에 보낸 뒤, 평생 결혼하지 못한 채 처녀로 늙어 죽으라는 악담을 퍼부었다.
한 집안의 남매 모두에게 상처와 수모를 준 이 인간을 어떻게 해야 하나.
아폴론 스터튼은 에우로스에게 한 짓이라도 있는 놈이지만, 다이애나 스터튼은 그저 멍청하고 가여운 여인일 뿐이었다. 악마의 미소에 저항하지 못하고 흐물흐물하게 녹아 버린 영혼.
“됐다, 됐어. 어쨌거나 프시케 스튜어트에게는 웃어 줄 생각이 없단 말이지?”
사무엘의 물음에 에우로스는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 못 하겠군, 사무엘.”
1)
악마도 가끔은 진실을 말하고, 소소한 정직으로 사람을 유인한다.
진실한 낯짝을 한 채 내뱉는 그의 대답을 듣고 사무엘은 다시 한번 속으로 되뇌었다. 에우로스는 정말, 의심할 여지도 없이, 나쁜 놈이다.
1) 윌리엄 셰익스피어 《맥베스》 1막 3장 대사 일부 수정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