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12)화 (12/146)

12. 별

프시케와 에우로스, 사무엘, 그리고 클라리사가 도착한 곳은 갤러웨이 성에서 멀지 않은, 그러나 인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강변이었다.

“공자님, 이곳은…….”

프시케는 말끝을 흐렸다. 카듀 강. 스코틀린 고대어로 ‘검은 바위’라는 뜻을 지닌 곳.

“여길 어떻게 아세요?”

프시케는 살면서 이곳에 두 번째로 와 보았다. 처음 왔을 때는 일곱 살도 채 되기 전이었다. 우연히 또래의 남자아이를 만났고, 둘은 성으로 돌아오다가 길을 잃었다. 어둠 속에서 들판을 걷고 걸어 도착한 곳이 여기였다.

“이쯤에서 멈춰야겠어.”

그 아이는 강을 발견한 것이 크나큰 행운이라고 말했다.

“물을 마실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러자 프시케가 풀숲에 주저앉아 칭얼거렸다.

“배고파.”

“배고프면 물을 마셔.”

남자아이가 물이 흐르는 곳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배고픈데 왜 물을 마셔?”

“배가 고플 때 물을 마시면 덜 배고프니까.”

“물은, 목이 마를 때 마시는 것 아니야?”

프시케는 의아한 말투로 물었고, 아이는 잠시 조용하다가 다시 말했다.

“마시기 싫으면 관둬.”

상냥하지 않은 말에 프시케는 쭈뼛거리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녀는 오래 걸어 얇은 밑창이 너덜거리는 신발과 올이 나간 실크 스타킹을 가지런히 벗어 두고 강물에 발을 담갔다.

차가운 물속에서 새빨갛게 부어오른 발등과 물집이 잡힌 발바닥이 비명을 지르다 이내 잠잠해졌다. 시원한 물살이 종아리를 간질이자 프시케는 까르륵 웃었다.

“왜 웃는 거야?”

남자아이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보름달이 뜬, 깨끗하고 맑은 밤이었다. 그래서 그 애의 표정이 너무나도 잘 보였다.

“재밌잖아. 나 이렇게 강물에 들어와 본 건 처음이거든.”

고상한 숙녀는 남들에게 절대로 발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교육받았다. 어머니 릴리아나는 귀족 여성의 바른 언행에 대해 투철한 신념이 있는 사람이었다. 프시케가 아주 어린 아이였는데도 그랬다.

스타킹을 벗고 맨발로 사내아이 앞에서 웃고 있는 딸을 보면 무어라 하실까? 프시케는 어머니의 고운 눈이 놀람으로 활짝 벌어지는 모양을 상상했다.

그때 남자아이가 첨벙거리며 그녀의 바로 앞으로 와서 섰다. 그러고는 젖어 버린 드레스의 아랫단을 잡아 휙 들어 올렸다.

“뭐 하는 거야?”

프시케가 당황하자 그는 말없이 치맛자락을 힘주어 비틀었다. 흠뻑 물을 먹었던 천이 아이의 손안에서 다시 물을 뱉어 냈다.

“너 이렇게 젖은 꼴로 밤을 샐 작정이야?”

“그러면 안 돼?”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남자아이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밤은 쌀쌀해. 젖은 옷을 입고 있다가는 얼어 죽을지도 몰라.”

“죽어?”

프시케는 난생처음 ‘죽는다’는 말을 들어 보았다.

“죽는 게 뭐야?”

“뭐긴 뭐야, 그냥 뒈지는 거지.”

“뒈지는 게 뭔데?”

“죽는 거.”

“…….”

남자애가 말하는 것들은 전부 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배고프면 물을 마시면 된다,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죽는다.

“있잖아. 너는 이상해.”

“그래, 무척이나 이상하지 않은 귀족 아가씨.”

그는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드레스의 단을 모아 꽁꽁 묶기 시작했다. 무릎 위로 깡충 짧아진 치맛단은 더 이상 강물에 젖지 않았다.

“갤러웨이 영지에 소풍을 갈 만한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을 뿐입니다.”

에우로스의 대답이 프시케의 기억을 가르고 귀에 박혀 들어왔다.

“그런 소문이 있나요?”

“적어도 브라이튼 섬에 관해서는, 제가 모르는 것이 없답니다, 영애.”

에우로스는 약간 과장된 어투로 대답했다. 그의 태도는 느긋했으나 카듀 강을 훑는 그의 시선만큼은 예리했다.

“이상하군요. 이곳은…….”

“실은, 갤러웨이 성으로 오는 길에 잠시 길을 잃고 헤맸습니다. 그때 이곳을 발견했지요.”

“아…….”

프시케가 무어라 더 말을 하려 하자, 에우로스는 급조한 변명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클라리사 쪽으로 눈길을 주며 그녀의 주의를 돌렸다.

“저기, 저 하녀가 든 바구니가 무척 무거워 보입니다.”

클라리사의 한 손에는 간식이 든 바구니가, 다른 한 손에는 바닥에 펼칠 담요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짐을 어디에 부려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는 중이었다.

“하녀를 곤경에서 구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자님의 말씀이 옳아요.”

그의 말에 프시케는 좁혔던 눈매를 풀고 이내 클라리사에게로 다가갔다. 본격적인 소풍 준비를 할 참이었다.

“에우로스, 이건.”

프시케가 멀어지자 사무엘이 에우로스의 곁으로 다가와 빠르게 속삭였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분명히 이건.”

사무엘의 목소리는 작았으나 격앙되어 있었다.

“그래, 맞아.”

에우로스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어떻게 알았어?”

“내가 모르는 것도 있나?”

에우로스는 사무엘의 물음에 대충 답하며 강변에 제멋대로 쌓인 검은 바위들을 세심하게 살폈다.

반짝반짝 빛나는 카듀 강. 그가 이곳을 알게 된 때는 열 살 생일 하루 전이었다.

“얘, 저걸 봐.”

땅바닥에 철퍼덕 누워 별들의 위치를 파악하던 에우로스를 여자애가 톡톡 건드렸다.

“하늘에도 강이 있어.”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부연 은하수를 보며 그 애가 한 말이었다.

“저건 은하수야.”

“은하수?”

“그래.”

“그게 무슨 뜻이야?”

“저렇게 생긴 거.”

“왜 저렇게 생긴 게 은하수인데?”

“…….”

제 짧은 인생에서 들었던 질문의 전부를 합친 것보다 여자아이가 단 몇 시간 동안 했던 질문이 더 많을 것이다. 끊임없는 물음 폭격에 에우로스는 그냥 입을 닫아 버렸다.

“우리 아버지는 커피를 좋아하시거든?”

또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려고 하는 걸까. 당장 별자리라도 기억해 방향을 알아 두려 기를 쓰던 노력이 허망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도 에우로스는 자꾸 그 재잘거림을 기다렸고,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유리잔에 커피를 붓고 거기에 우유를 떨어뜨리면 저렇게 돼.”

“커피가 뭔데?”

커피. 에우로스는 난생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다.

“으음, 커피는 그냥 커피야. 새카만 물이야.”

“마시는 거야?”

“응. 아버지는 그걸 마시면 기분이 좋아진댔어.”

술 아니면 마약인가 보군. 에우로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자신이 알기로, 사람의 기분을 좋아지게 만드는 것은 그 두 개 외에는 없었다.

“그런데 저기 새카만 물에도 은하수가 있어.”

여자아이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은하수’라는 말을 처음 응용한 아이의 뿌듯함이 얼굴에 가득했다.

에우로스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줄곧 하늘만 바라보던 시선이 조르르 흐르는 물가에 닿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저기 저 바위 보여? 강물 옆으로 까만 바위들이 있잖아.”

아이가 열심히 설명했다.

“그런데?”

“자세히 봐봐.”

여자애가 발딱 일어나 에우로스의 손을 잡고 제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곳으로 이끌었다. 그는 마뜩잖은 심정으로 찬찬히 그 울퉁불퉁하고 못생긴 시커먼 바위들을 들여다보았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그의 얼굴 위로 놀라움이 퍼져 나갔다.

“예쁘지?”

아이가 속닥거렸다.

“반딧불이 바위에 붙어 있나 봐.”

“저건 반딧불이 아니야.”

여자아이의 말에 에우로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럼 뭔데?”

그런데 사실 에우로스도 그게 뭔지 몰랐다. 하지만 여자애의 앞에서 모른다고 말하기는 죽어도 싫었다.

커피가 뭐냐고도 묻지 말걸. 그래서 그는 조금 으스대는 말투로 속내를 감추며 말했다.

“이건, 별이야.”

“별?”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별은 하늘에 있는 것 아니야?”

에우로스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지만, 그는 뻔뻔해지기로 했다.

“가끔 별이 땅으로 떨어지기도 해.”

“그래?”

“조금만 있어 봐.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는 걸 볼 수 있을 거야.”

그건 사실이니까. 에우로스는 민망한 마음을 다잡고 아이와 함께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지금부터 백까지 세면서 하늘을 봐. 그럼 별이 떨어지는 게 보일 거야.”

“정말?”

아이는 기뻐했다. 그러고는 정말 하늘을 보며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1, 2, 3, 4…… 10.”

그리고 그 애가 셈을 멈추었다.

“왜 더 안 해?”

에우로스의 물음에 아이가 우물쭈물했다.

“나, 아직 10까지밖에 몰라…….”

그 말에 에우로스는 입술을 꼭 물었다. 크게 웃어 버리고 싶었지만, 자신이 웃어 버리면 아마 여자애는 울 것이다.

“그럼, 내가 대신 세어 줄게. 1, 2, 3, 4…….”

그제야 여자아이는 창피함에 꼭 쥐었던 손을 풀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나, 별이 떨어지는 장면을 놓쳐 버릴까 봐 눈을 깜빡이질 못하겠어.”

아이의 말에 에우로스는 푸스스 웃었다. 순간 하늘에서 별 하나가 꼬리를 뒤로 길게 뱉으며 몸을 날렸다.

“봤어? 지금 왼쪽으로…….”

그가 아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쩐지 제가 더 흥분한 기분이었다.

“와아…….”

여자애가 작게 탄성을 뱉었다. 감동이 들어찬 검은 눈동자는 은하수가 흐르는 밤하늘보다 더 까맣게 빛났다.

“저 별이 지금 바위에 와서 박힌 거지?”

에우로스는 아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하고 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았다.

“또, 또 떨어졌어!”

여자애가 활짝 웃으며 에우로스를 쳐다보았다. 그때 그는 제 생각을 정정했다. 그 별은 바위가 아니라 여자애의 눈동자 속으로 찬란하게 떨어진 게 분명했다.

시간이 흐르고, 하늘의 별빛도, 눈동자의 별빛도 어렴풋해졌다. 에우로스의 어깨로 여자애가 얼굴을 묻었다. 졸음을 품은 숨소리가 색색거렸다.

에우로스는 꼼짝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 그 애의 숨은 달콤하고, 보드랍고, 따뜻하고, 간질거렸다.

아이와 에우로스는 하늘의 별들이 떠오르는 태양 때문에 빛을 잃고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아름다운 별똥별을 보내 준 청명한 밤의 신성한 보호를 받으며 잠든 여자애의 모습을, 그는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들의 주위에서 별들은 마치 수많은 양 떼처럼 말없이 조용히 움직였다. 그 별들 가운데 가장 곱고 가장 반짝거리는 귀한 별 하나가 길을 잃고 그에게로 와서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잠을 자는 것이라고, 에우로스는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1)

“엘도라도가 이곳에 있었군!”

사무엘의 찬탄이 유성우처럼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에우로스의 상념은 거기까지였다.

1) 알퐁스 도데의 《별》 일부 수정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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