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때 늦은 구혼
짧은 산책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프시케는 에우로스와는 반대로 내내 몽롱한 상태였다.
그녀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은 비교적 산뜻하고 뚜렷한 편이었다. 프시케는 확실한 현실, 명확한 결정 같은 것들을 좋아했다.
갑자기 제 앞에 닥친 결혼도 그런 식으로 받아들였다. 거역할 수 없는 왕명, 기울어진 가세, 스코틀린 귀족들의 외면. 그녀의 결심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 미래도 그렇게 분명하게 흘러가리라 예상했다. 잉그린트의 대귀족 가문에서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을 리 없고, 프시케는 그저 배우자의 의무를 피하지 않는 수준의 노력을 하며 살아갈 생각이었다.
사랑에 대한 기대는 애초에 배제했다. 이 결혼에 그런 낭만적인 감정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그것에 대해 불만도 없었다.
그러나 에우로스를 만난 후 프시케가 설정했던 경계들이 점차 흐릿해졌다. 그의 태도는 모호했다. 자신을 관찰하는 것 같기도 했고, 무관심한 것 같기도 했다. 저를 아는 것 같기도,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태도는 프시케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바였다.
이제 그녀는 그가 그런 말과 행동을 하는 이유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프시케는 한숨을 쉬며 에우로스가 흐트러트린 생각들을 애써 주워 담는 중이었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어요.”
클라리사가 불안한 표정으로 프시케의 방에 들어섰다.
“손님이라니? 이렇게 늦은 시간에 누가?”
프시케가 놀라 물었다.
“그게, 월레스 경이에요.”
“말콤 월레스 경?”
“네에.”
프시케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이 상황에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바로 말콤 월레스였다. 그는 그녀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월레스 백작의 장남이었다.
백작에게 원한을 가질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서운했다. 아버지의 오랜 친구이자 자신의 대부였던 사람에게 느끼는 일종의 배신감 같은 거였다.
프시케가 열네 살이 되었을 때 두 살 연상의 말콤을 처음 만났다. 그의 첫인상은 착한 남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만 보면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지 못하는 순진한 사람이기도 했다.
아버지들은 농담 삼아 그들의 정혼을 이야기했다. 그때마다 말콤의 얼굴은 붉어지다 못해 불타는 것처럼 보였다.
월레스 백작가는 수백 년 전 잉그린트와의 전쟁을 이끌었던 명망 있는 무인 가문이었다. 스코틀린의 독립 영웅이자 수호자였던 빌리 월레스가 가문의 시조였다.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고, 적장의 목을 베었던 전적으로 그는 잉그린트군에 사로잡혀 반역죄를 선고받아 사지가 찢겨 죽었다. 그의 사후에 후손들이 월레스 가문을 이루어 여태껏 스코틀린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왔다.
그러나 그 명성과는 반대로 작금의 월레스 백작은 잉그린트의 치세하에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살고 있었다. 말콤 월레스는 그런 아버지를 경멸했다. 그래서 성인이 되자마자 그는 기사 작위를 받고 스코틀린 독립군이 되기 위해 영지를 떠났다.
당연히 백작은 필사적으로 그 사실을 숨겼다. 아버지의 노력으로 현재 말콤 월레스는 대외적으로 이탈린으로 건너가 그랜드 투어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혹시라도 그가 잉그린트에서 온 손님들과 마주치게 된다면, 그건 밀주를 눈감아 준 것과는 다른 결과를 초래할 터였다.
“손님이 계시니 정원에서 만나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리로 안내해 줘.”
프시케는 풀어 내렸던 머리카락을 다시 단단히 올려 고정했다. 턱 아래까지 목을 완전히 덮는 드레스를 입고, 장갑까지 갖추어 착용했다. 에우로스와 그의 친구가 성안에 있는 상황이므로 최대한 보수적으로 몸을 가린 채 외간 남자를 대할 작정이었다.
그녀가 정원에 발을 디디자 나무 그림자 속에서 거대한 체격의 사내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의 몸에 독한 알코올 냄새가 배어 있었다. 프시케는 입술을 한 번 꾹 다물었다가 최대한 예의 바른 말투로 인사했다.
“월레스 경.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결혼한다는 게 사실이야?”
말콤 월레스의 말투에 단단히 날이 서 있었다. 비난하는 듯한 태도가 거슬렸지만 프시케는 포기하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네, 사실이에요.”
“어째서 나에게 묻지 않았지? 이제야 네 얘기를 들었어.”
“월레스 가문으로 서신을 보낸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요.”
“그건 아버지의 뜻이었어. 내가 영지에 있었다면 그런 식으로 일이 흘러가진 않았을 거야.”
“상관없어요. 이제 끝난 일이에요.”
프시케의 무덤덤한 대답에 말콤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지금이라도 취소해.”
“그럴 수 없어요.”
“너는 스코틀린 여자야. 잉그린트 여왕의 그 빌어먹을 명령을 따를 필요가 없어.”
“월레스 가문도 잉그린트 여왕에게 세금을 내고 있지 않나요?”
그녀의 말을 들은 말콤 월레스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꽉 다문 입매가 잘게 경련했다.
“그만 돌아가세요. 지금 잉그린트에서 손님이 와 계시거든요.”
“그게 어떻다는 거야?”
“몰라서 물어요?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 그들이 경을 보면 잉그린트 군대를 부를 수도 있다고요.”
프시케는 불안한 어조로 재빨리 속삭였다. 그녀의 눈이 자꾸만 성 쪽을 힐긋거렸다.
“상관없어. 날 걱정할 시간에 네 걱정이나 해.”
“제 걱정은 할 필요 없어요.”
그녀의 대답에 말콤의 표정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내가 널 걱정해, 프시케.”
퍽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어쩌면 조금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오랫동안 널 사랑해 왔어. 내 처지가, 아직은 안전하지 않아서, 그래서 차마 말하지 못했어.”
“월레스 경.”
프시케가 차분하게 그를 바라다보았다.
그의 마음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완전히 싫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고백하는 시점은 정말이지 바람직하지 않았다.
“사랑해, 프시케.”
“그만두세요.”
말콤의 절절한 고백에 프시케의 눈두덩이 뜨끈해졌다.
비록 그녀의 마음은 그의 것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그의 말이 고맙기도 했다. 아무도 데려가지 않던 갤러웨이 성의 붙박이 유령을 줄기차게 좋아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은 작은 위안이 되어 주었다.
“이제라도.”
말콤이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추었다.
“세상에! 월레스 경, 제발 이러지 말아요.”
하지만 청혼은 다른 문제였다. ‘프시케 스튜어트는 데이모스 캐번디시와 결혼한다.’라고 이미 내려 버린 그 확고한 결론을 이런 식으로 흐리고 싶지 않았다.
“나와 결혼해 주겠어?”
“…….”
프시케는 어쩔 줄 몰라 입만 벙긋거렸다.
“나와 함께 떠나자. 독립군에서 함께하는 생활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잉그린트에서 멸시받으며 사는 삶보다는 나을 거야.”
말콤이 품에서 꺼낸 것은 반지였다. 월레스 백작가의 가보가 아니라 탄피를 갈아 만든 투박하고 두툼한 가락지 두 개.
“훈련을 하면서 종종 네 생각을 했어. 언젠가는 너에게 꼭 청혼하리라 결심했지. 그게 이런 식이 될 줄은 몰랐지만.”
그가 두 개의 반지 중, 작은 것을 골라 내밀었다. 프시케가 왼손을 내밀어 주기를 기다리면서.
프시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순수한 남자는 대책이 없었다. 독립군 막사에서 함께하는 생활이라니.
게다가 갤러웨이 성에 남은 사람들은? 그리고 영지는? 여왕의 명은? 월레스 가문은? 그녀가 설령 그와 도망친다 해도, 끝도 없는 난제들이 험준한 산맥처럼 앞에 솟아오를 것이다.
“미안해요, 월레스 경. 그대의 청혼은 받아들일 수 없겠어요.”
그녀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제 생각을 전부 다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구태여 실랑이할 필요는 없었다.
“도대체 왜?”
말콤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성큼 그녀의 앞으로 다가섰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프시케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왜 나의 청혼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지?”
“여왕의 명령이잖아요.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까지 곤란해지는 건 절대로 원하지 않아요.”
“언제부터 프시케 스튜어트가 잉그린트 여왕의 충직한 신하가 되기로 한 거야? 아, 그래도 같은 핏줄이라 이건가?”
청혼하며 연정을 머금었던 그의 눈빛이 다시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미안하지만 저는 이제 그만 들어가 볼게요. 조심히 돌아가요.”
열이 오른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프시케는 차갑게 인사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갤러웨이 성의 붙박이 유령을 사랑해 주어 고맙다고 생각한 것은 취소였다. 그는 말이 통하지 않는 돌벽 같았다.
“그럴 수 없어.”
고개를 저은 말콤이 그녀의 팔을 세게 잡아 쥐었다.
“말콤!”
프시케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말콤은 잠시 움찔했다. 그러다 이내 그녀의 팔을 당겨 정원의 외딴 구석으로 이끌었다.
프시케는 장갑을 벗고 잡혔던 팔을 빼냈다. 장갑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말콤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그리고 그대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
“말콤, 제발! 이러지 말아요.”
남자의 뜨거운 체온이 곧장 그녀에게 감겨들어 온 신경을 압박했다.
프시케의 분별력이 흩어지고 있었다. 여기서 소리를 지르자니 잉그린트의 손님들이 신경 쓰이고,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이대로 납치라도 당할 것만 같았다.
크고 두툼한 남자의 양손이 프시케의 등을 더듬어 내려가 허리에 닿았다. 숨을 참고 있는 그녀의 몸이 마치 터지기 일보 직전의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제 얼굴로 서서히 다가오는 말콤의 입술을 멀뚱하게 보던 그녀가 상황을 깨닫고 순간 긴장했다.
그때였다. 화살 한 대가 두 사람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 바로 옆 나무줄기에 박힌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