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이상한 밤
프시케는 몇 년 동안 닫아 두었던 만찬장을 개방하도록 했다. 저녁 식사 전까지 모든 준비를 끝내기 위해 하녀들은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나 불만을 드러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프시케를 데리러 온 잉그린트의 두 남자가 퍽 마음에 든 까닭이었다.
특히 에우로스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다. 하녀들은 틈만 나면 그를 두고 소곤거렸다.
“세상에, 저렇게 잘난 남자는 처음 봐요!”
“사생아가 저 정도로 미남인데, 아가씨와 결혼할 남자는 대천사 미카엘의 현신처럼 생기지 않았을까요?”
에우로스에 대한 소문은 이미 갤러웨이까지 드문드문 퍼진 상태였다. 캐번디시 가문이 워낙 유명한 대귀족이기 때문이었다.
데본셔 공작가는 거대한 영지와 자산을 소유하였다 했으나 에우로스는 출생이 미천한 사생아라 물려받을 재산도 없을 것이라 했다. 프시케와 결혼할 캐번디시의 적자가 오는 것도 아니고, 서자가 방문한다는 소식에 갤러웨이 성 사람들은 아가씨를 무시하는 처사라며 분개했다.
그러나 떠들썩했던 소문 중에 에우로스의 빛나는 외모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스코틀린 남자들에 비하면 약하고 말라비틀어진 기생오라비 같은 생김새라는 말이 돌았을 뿐이었다.
그러니 그의 형제인 데이모스 캐번디시도 마찬가지로 기생오라비일 거라는 추측이 난무했다. 신랑감의 초상화 한 장 받아 보지 못했으므로 이쪽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사실 그것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가 있었다. 데이모스가 결혼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펄펄 뛰었던 탓에 초상화를 그려 보낼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림 한 장 보내지 않은 것은 분명한 결례이긴 했지만, 데본셔 공작가가 프시케 스튜어트를 굳이 깔보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데본셔 공작은 굳이 깔볼 정도의 관심조차 그녀에게 주지 않았다.
어쨌든 갤러웨이 성의 하녀들은 모두 에우로스를 보자마자 무조건적인 호감을 보였다. 수려한 외모와 더불어 아랫사람들에게까지 다정한 미소를 띠며 친절하게 대하는 그 귀족적인 행동에 쌀쌀한 가을 날씨에도 불구하고 하녀들의 마음속에는 따뜻한 봄바람이 불었다.
“멀리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드넓은 만찬장에는 오직 세 사람만이 앉아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프시케와 에우로스, 그리고 사무엘이었다.
“천만에요. 전혀 고생하지 않았습니다. 스코틀린의 풍경은 참으로 멋지더군요.”
에우로스가 제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대며 예의 바르게 답했다. 사무엘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사무엘, 마부, 호위 그리고 말들까지 모두 스코틀린의 거친 땅과 변화무쌍한 기후에 혀를 내둘렀다. 짐을 실었던 마차 중 하나가 고장 나는 바람에 마부가 밤새 수리한 일까지 있었다. 그게 다 에우로스의 지시로 스코틀린의 돌길을 쉼 없이 달린 탓이었다.
“다행입니다. 스코틀린은 여름을 제외하곤 날씨가 썩 좋지 않은데, 풍경을 즐기셨다니 대단히 긍정적인 분이시군요.”
프시케의 대답에 에우로스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겨우 열여덟. 아직 소녀티를 다 벗지 못한 여자의 대답치고는 매우 성숙했다.
프시케는 에우로스를 만난 순간부터 계속 그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그가 미세하게 자신을 탐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애써 에우로스 쪽을 무시한 채 식사를 계속했다.
“컥!”
에우로스를 따라 술을 입안에 털어 넣던 사무엘이 갑자기 무릎 위에 올려 두었던 냅킨으로 입을 막은 채 쿨럭거리기 시작했다. 만찬장 입구 쪽에 서 있던 하녀가 급히 다가와 여분의 냅킨을 더 건넸다.
“괜찮으신가요?”
사무엘의 기침이 진정되자 프시케가 동그랗게 떴던 눈을 누그러뜨리며 물었다.
“아, 네. 괜찮지 않, 아니, 괜찮습니다.”
“술이 입맛에 맞지 않으신가 봅니다.”
그녀의 말에 사무엘은 고개를 끄덕일 수도, 저을 수도 없었다. 끄덕인다면 실례이고, 젓는다면 거짓이기 때문이었다.
“스코틀린에서 만든 위스키를 처음 마시는 사람들 중에 가끔 그렇게 괴로워하는 분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토탄을 태워서 향을 입히기 때문에 그 냄새에 익숙하지 않으면 마시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프시케의 설명을 듣고 사무엘은 어색하게 웃었다.
어쩐지 이곳까지 오는 내내 창문을 열 때마다 나던 그 싫은 냄새가 술에서도 나더라니. 설명을 듣지 않았으면 누가 술에 장난질을 친 게 아닌가 의심할 뻔했다.
“공자님께서는 잘 드시네요.”
이미 두 잔째 술을 홀짝거리는 에우로스를 보며 프시케가 살짝 웃었다.
“예전에 마셔 본 경험이 있습니다.”
“위스키를요?”
프시케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네.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마실 기회는 많았지요.”
“잉그린트에도 위스키를 판매하는 곳이 있는지는 몰랐어요.”
프시케의 말에 에우로스는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프시케는 도대체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대신 사무엘의 질문이 그녀의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 주었다.
“이 술을 파는 곳이 있다고? 리던? 아니면 데본셔에? 난 본 적이 없는데.”
“공작가로 들어가기 전이었지.”
그 말에 사무엘과 프시케는 잠시 침묵했다.
프시케도 에우로스의 출신에 대해 들었지만 오늘 그가 보여 준 완벽한 매너에 잠시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사무엘은 조금 다른 이유로 놀랐는데, 에우로스가 데본셔에 오기 전 이야기를 들려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그……. 그런데 자네 열두 살에 데본셔에 오지 않았던가?”
“그랬지.”
사무엘의 질문에 에우로스가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어린 나이에 이런 독한 술을 마셨다고?”
“꽤 흔한 일이었어.”
“어린아이가 술을 마시는 게 흔한 일이라니.”
사무엘이 탄식하듯 말했다.
비록 공작 가문처럼 대단한 권세를 가진 집안은 아니더라도, 사무엘 또한 남작 가문의 자제였다. 적어도 성인식을 마친 후에 술을 마실 자격이 주어져야 한다고 믿는 것이 보수적인 귀족의 상식이었다.
“술을 마시는 아이들은 많아요.”
프시케가 사무엘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예? 많다고요?”
“네. 이 영지만 벗어나도 쉽게 볼 수 있지요. 대부분 토탄을 캐는 아이들이에요. 추위를 견디기 위해 마시는 거예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몸이 얼고, 몸이 얼면 동작이 느려지고, 그러면 감독관에게 크게 혼이 나니까요.”
사무엘은 약간 충격을 받았다. 설마 에우로스에게 추위 속에서 토탄을 캔다거나 하는 과거가 있었던가? 고생 한 번 해 보지 않았을 것 같이 고결한 저 인간에게?
“물론, 다른 경우도 있답니다. 이곳보다 더 추운 곳에 사는 사람들도 어릴 때부터 독한 술을 물처럼 들이켠다고 해요. 그것도 역시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겠죠. 꼭 고된 노동을 하는 아이들만 술을 마시는 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그제야 어쩔 줄 몰라 하던 사무엘이 긴장을 풀었다. 그러면 그렇지. 설마 저렇게 고고한 인간이 채찍이나 몽둥이 따위로 두들겨 맞으며 일을 했을 리가.
“자네도 그럼 아주 추운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나 보군.”
사무엘의 말에 지금껏 마치 남의 이야기인 양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던 에우로스가 빙긋 웃으며 세 번째 잔을 들어 올렸다.
“그 어느 쪽도 아니야. 토탄을 캐 본 적도 없고, 아주 추운 곳에서 살아 본 적도 없지. 물론 겨울에는 추웠지만,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닌가.”
“그건, 그렇지.”
에우로스는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무엘을 지켜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프시케가 앉은 쪽으로 약간 몸을 틀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귀족 아가씨께서 밀주를 생산하시는 걸 여왕께서 아시면 가만히 있지 않으실 텐데요.”
프시케는 그의 말에 잠시 멍해졌다. 그러고는 이내 얼굴을 붉혔다.
잉그린트의 전대 왕이 스코틀린에서 만든 위스키에 과도한 세금을 매기기 시작한 것이 수십 년 전이었다. 세금이 부담스러워진 스코틀린 사람들은 잉그린트 정부의 눈을 피해 몰래 술을 제조했다. 프시케도 마찬가지였다.
밀주는 아버지가 남긴 엄청난 빚을 탕감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프시케는 깊은 산 속에 증류소를 만들어 놓고 믿을 만한 사람들을 불러 달빛이 뜨는 한밤중에 몰래 위스키를 만들었다.
얼마 나오지 않는 농산물이나, 흔해 빠진 토탄을 팔아서 내는 수익에 비하면 밀주는 굉장한 액수의 돈을 벌어들였다. 그것이 부채를 갚고 갤러웨이 성을 근근이 지탱하는 원천이었다.
잉그린트 귀족가의 자제인 두 사람이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위스키를 식탁에 올린 것이 화근이었다. 프시케는 황급히 사무엘을 살폈다. 다행히도 그는 식사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꾸했다. 그러나 에우로스는 프시케의 검은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금방 눈치챘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많이 마셔 보았다고.”
그는 술잔을 들어 올리며 짓궂게 웃었다.
프시케는 깊은 호박색 액체가 잔 안에서 출렁이는 모양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다시 에우로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푸른 눈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자 왠지 마음이 놓였다. 근거는 없었지만 그가 이 일을 고발한다거나 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은 확실했다.
에우로스가 냅킨을 들어 가지런하게 접기 시작했다. 식사를 끝내고 싶다는 의사표시였다.
“식사는 이쯤 하지. 스튜어트 영애, 우리는 잠시 산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프시케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우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사무엘에게 양해를 구한 후 그를 따라 만찬장을 빠져나갔다.
“바람이 차군요.”
단순한 실내복 차림인 프시케의 어깨 위에 에우로스의 프록코트가 얹혔다. 코트의 매끄러운 안감은 그의 체온으로 데워져 따뜻했다.
“예정보다 조금 빨리 도착한 것, 사과드립니다. 많이 당황하지 않으셨습니까?”
프시케가 고개를 저었다.
“보시다시피 작은 성이라, 갖춘 것이 없어 제가 더 죄송하지요. 대접이 미흡해서 미안합니다.”
“대접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 허례허식 따위야말로 가장 불필요한 것이니까요.”
“그래도…….”
“정말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에우로스는 프시케의 보폭에 맞추어 천천히 걷다가 충동적으로 말했다.
“오는 길에 제가 일부러 마부를 독촉했답니다.”
“…….”
“확인할 것이 있었거든요.”
에우로스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마주 보고 섰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잉그린트의 경계를 벗어나 스코틀린 땅으로 마차가 들어서는 순간, 알 수 없는 조바심이 일었다.
10년 넘게 잊고 살았던 땅과 대기의 냄새가 그를 자극하고 부추겼다. 사무엘의 불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부에게 속도를 올리라고 지시했던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무엇을…….”
“글쎄요, 동생의 아내 되실 분이 무척 궁금했던 것으로 해 두겠습니다.”
프시케는 저도 모르게 한쪽 뺨을 매만졌다. 아까부터 이 남자의 태도가 내내 자신의 신경을 긁었다. 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올처럼, 사소하게 거슬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간지러운 것도 같았다.
“혹시 저를 아시나요?”
프시케는 눈빛에 의문을 가득 담아 보내며 물었다.
그러자 에우로스가 웃었다. 그 웃음은 아득했다. 익숙함과 생소함이 공존하는 웃음이었다.
“그럴 리가요.”
“네?”
“공작가의 사생아 따위가 스코틀린 왕가의 혈통인 프시케 스튜어트 아가씨를 어찌 알겠습니까.”
당혹한 프시케의 검은 눈동자가 은하수를 품은 듯 일렁거렸다. 에우로스는 시시각각 변하는 그녀의 얼굴을 한참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처음에는 동생 대신 이곳에 오는 게 내키지 않았지요.”
“그러셨군요.”
“하지만 지금 보니 잘한 일인 것 같습니다.”
에우로스의 말에 프시케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녀에게 에우로스는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헤아릴 수 없는 캄캄한 밤과 같았다. 그를 가늠해 보려 프시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순간 구름에 가려져 있던 보름달이 모습을 드러내며 희고 밝은 빛을 내뿜었다. 그러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달빛을 빌려 훔쳐본 그 밤은 기적처럼 투명했다. 에우로스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