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5)화 (5/146)

5. 갤러웨이 성의 붙박이 유령

“꽃을 사야겠어.”

프시케가 조금 망설이며 말했다. 손가방 안에 들어 있는 동전의 개수와 총금액을 머릿속에서 전부 따져 본 뒤였다.

“꽃을요?”

“응, 손님이 오실 텐데 성 분위기가 너무 칙칙하잖아.”

“손님은 무슨 손님이에요, 아가씨. 순 벼락맞을 도둑놈, 날강도 같은 것들이 어디서 우리 아가씨를…….”

옆에서 툴툴거리던 클라리사가 프시케의 엄한 표정을 보고는 잠시 주춤했다. 프시케는 너그러운 주인이었으나 무례는 용서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지 마. 내가 선택한 거니까.”

“그게 어디 아가씨 선택인가요. 억지로,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인 거지요. 스코틀린에도 아가씨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힘 좋고 잘난 사내들이 줄을 섰어요. 그런데 웬 아랫지방 출신에 약해 빠진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랑 결혼하라는 건지!”

“클라리사.”

“아가씨가 대체 뭐가 부족해서 잉그린트로 시집을 가냐고요. 돌아가신 마님을 닮아서 예쁘지, 돌아가신 나리를 닮아서 똑똑하지, 성도 있지, 영지도 가지고 계시지…….”

프시케는 클라리사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영지’라는 말이 가시처럼 가슴을 콕콕 찔렀기 때문이다.

여성인 그녀는 작위를 물려받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자신과 결혼할 남자가 백작위와 갤러웨이 영지를 승계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이 영지가 상상 이상으로 꽤나 골칫거리 땅이라는 사실이었다.

갤러웨이는 기름지기는커녕 먼지바람이 이는 황무지 같은 영지였다. 농업이나 목축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환경에다, 토탄을 캐다 파는 것 외에는 번듯한 수입이 없을 정도로 가난한 땅.

그랬기에 프시케의 아버지는 끊임없이 투자의 유혹에 빠졌다. 그리고 잉그린트의 간악한 주식회사들은 스코틀린의 어리숙한 촌뜨기 백작을 꼬드겨 돈을 빼먹었다.

영지의 대부분을 담보로 한 마지막 투자는 늘 그랬듯 처절한 실패로 끝났다. 그 실패는 꼭 월터 스튜어트 백작의 잘못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망한 것은 잉그린트 국채를 국영기업의 주식으로 전환하도록 정부가 유도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그는 전환한 주식으로 열 배가 넘는 수익을 냈다. 그래서 스튜어트 백작은 더 많은 돈을 집어넣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주식 가격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주식에 돈을 때려 넣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했고, 의회의 진상 조사 결과 이 사건은 잉그린트 정부가 관여한, 대대적인 정부 주도 사기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해는 메울 수 없었다.

이 투자로 역시 돈을 잃었던 잉그린트의 저명한 과학자, 아이작 경은 이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탄식했더랬다.

1)

“천체의 운행은 예측할 수 있지만 인간의 광기는 예측하기 어렵다.”

그랬다. 프시케의 아버지는 광기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래서 사기 사건의 피해자가 되었다. 그리고 프시케는, 그 광기가 낳은 투자와 투자가 낳은 실패와 실패가 낳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가장 큰 피해자가 되었다.

이제 스튜어트 가문에 남은 것은 낡아 빠진 갤러웨이 성과 뺏기고 남은 토지 일부 정도였다. 그걸 알기에 손쉽게 백작위를 얻을 수 있는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자신과 결혼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잉그린트 놈 말고, 우리 잘난 스코틀린 남자로 찾아봐요. 아가씨는 예쁘니까 다들 결혼하겠다고 몰려올 거라고요. 아예 이 기회에 데뷔탕트 무도회를 열까요?”

프시케는 골치가 아팠다. 클라리사의 말은 대부분 진실이었지만, 하나만큼은 틀렸다. 스코틀린에 자신과 결혼할 남자들이 줄을 섰다는 것 말이다.

그녀는 얼마 전 아버지의 친구였던 월레스 백작에게 기별을 넣었다. 잉그린트 왕궁에서 보낸 전령이 성을 다녀간 직후의 일이었다.

평소였다면 아쉬운 소리 따위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프시케에게는 이것저것 사정을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프시케가 월레스 백작에게 부탁했던 것은 하나였다. 잉그린트 귀족과의 결혼을 피하기 위해 빠른 시일 안에 성혼할 수 있도록 혼처를 알아봐 달라는 거였다. 스코틀린 남자라면 그 누구라도 좋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녀는 스코틀린을, 갤러웨이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제 인생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

집안이 망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난한 고아인 프시케에게 아무도 청혼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녀는 평생 이곳에 뿌리박혀 독신으로 살 작정이었다. 자신이 갤러웨이 성의 붙박이 유령이라는 놀림감이 되는 것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월레스 백작으로부터 온 답신의 내용은 부정적이었다. 여왕의 존엄한 명을 감히 거역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기쁜 마음으로 잉그린트 대귀족 가문과의 결혼을 받아들이라는, 무책임한 조언도 함께 적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스코틀린 귀족 중에서 여왕의 말을 대놓고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프시케 스튜어트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월레스 백작의 편지를 받고서야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잉그린트 귀족 가문과의 혼사는 자신의 거부가 받아들여질 문제가 아니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우리 왕도 아니고 잉그린트 왕 말을 왜 들어야 하냐고요. 그냥 거절하셨으면 되었을 텐데.”

클라리사는 잉그린트의 여왕이 스코틀린을 통치한다는 현실을 속 편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마 적지 않은 수의 스코틀린인들이 그럴 것이다.

스코틀린 사람들은 잉그린트 여왕이 임명한 총독 앞에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불복종과 반항심의 불길을 태웠다.

“내가 거절하고 나면 그다음은?”

“그거야 뭐, 어떻게든 되겠지요.”

“거절했다면 군대를 보냈을 거야.”

“네에? 군대요? 결혼하지 않는다고 군대를 보낸단 말이에요?

“왕명인걸. 당연한 일이지.”

“그럼 우리는 다 죽는 건가요?”

“그럴 수도 있고.”

프시케는 씁쓸하게 웃었다.

잉그린트의 왕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스코틀린을 지배해 왔다. 때로는 우는 아이에게 사탕을 건네듯 달래기도 했고, 때로는 눈을 치켜뜨는 아이의 뺨을 후려치듯 무력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 사탕에 익숙해진 사람들과 뺨 맞는 것이 두려워진 사람들은 잉그린트의 왕권에 순종하기 시작했다. 소수의 독립군을 제외하고는.

프시케가 결혼을 거부한다면 잉그린트의 군대가 즉각 갤러웨이 영지로 몰려와 뺨을 때릴 것이다. 프시케 본인뿐 아니라 영지민 전체를 몰살시킬 수도 있었다. 왕명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반역이든 뭐든 어떤 누명을 씌워서라도 그리할 것이다. 그것이 잔인한 잉그린트의 방식이었다.

“가다가 엉겅퀴나 있으면 뜯어서 장식해요. 잘못 밟아서 아프다고 고함이라도 지르면 비웃어 주기라도 하게. 그 위로 넘어져서 엉덩이에 가시가 박히면 더 좋고요.”

“바이킹들처럼 말이야?”

“잉그린트 놈들이 바이킹 놈들보다 더 나쁜 놈들이니까요. 옛날 옛적에 여길 쳐들어왔다가 엉겅퀴에 궁둥이를 찔려서 도망갔던 바이킹 놈들처럼 만들어 버리자구요.”

클라리사의 말에 프시케는 어쩔 수 없이 웃어 버렸다. 클라리사는 속도 없이 웃는 그녀를 못마땅하게 보다가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무슨 꽃을 사시게요?”

“글쎄, 캐번디시 가문의 꽃은 장미라던데 이 날씨에는 구할 수가 없으니 대신 수레국화를 살까?”

수레국화는 프시케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었다. 척박한 고원 아무 데서나 쑥쑥 피어나는 강인한 꽃. 그러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푸른 색깔을 띠는 꽃.

수백 년 전 잉그린트와 스코틀린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스코틀린의 왕비는 어린 왕자들을 데리고 성에서 도망쳐 수레국화가 가득 핀 들판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꽃을 꺾어 화관을 만들어 아이들의 머리에 씌워 주며 불안을 다독였다.

그 아이들 중 하나가 자라 왕이 되어 지루하게 끌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쟁이 끝나자 왕은 어린 날을 추억하며 수레국화를 스코틀린의 국화로 선포했다. 그 이후부터 그 꽃은 스코틀린 저항 정신의 상징이 되었다.

프시케가 수레국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더 있었다. 아니, 사실 좋아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건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수레국화의 빛깔이 촉발하는 어느 기억 때문이었다. 불안과 공포와 안도와 갈망이 세차게 소용돌이치는 것 같던 또렷한 눈동자. 그건 오래전 그녀가 만났던 이름 모를 남자아이의 것이었다.

“그래요, 아가씨.”

새파란 수레국화 한 다발을 품에 안고 꽃집을 나서는 프시케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려웠던 안살림에 꽃을 사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이었다. 손님 핑계를 대었지만 꽃을 주문할 수 있어 가장 기쁜 사람은 프시케 본인이었다.

“정말 예쁘다, 그렇지?”

프시케는 천천히 걸으며 뒤따라오는 클라리사를 돌아보았다. 그 바람에 정면에 서 있던 남자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와 그대로 부딪쳤다.

느슨하게 들고 있던 꽃다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프시케는 비틀거리다 그 위로 넘어져 버렸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짓눌린 수레국화에서 떨어져 나간 파란 꽃잎 몇 장이 팔랑거리다 위로 떠올랐다. 그 광경을 망연히 보고 있던 프시케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주저앉은 채 제 앞에 기둥처럼 선 남자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남자는 별말 없이 허리를 굽혔다. 프시케의 눈앞에 사슴 가죽을 재단해 만든 흰 장갑을 낀 손이 내밀어졌다.

“잡아요.”

프시케는 얼떨떨한 기분이었지만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서늘한 감촉의 가죽장갑이 매끄럽게 손바닥에 밀착했다.

몸을 일으킨 프시케가 손을 빼려 하자 남자는 오히려 단단히 그녀의 손을 잡아 왔다. 그리고 당황한 그녀의 손을 제 쪽으로 살짝 당긴 후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프시케 스튜어트 영애.”

남자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손등을 간질였다. 프시케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살짝 떨고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갤러웨이 성 근교에 있는 호수의 물빛을 닮은, 아니, 수레국화가 빽빽하게 핀 들판을 닮은 청량하고 깨끗한 푸른색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프시케가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깜박였다.

그 모습을 보자 남자가 작게 웃었다. 잔잔한 호수에 인 부드러운 파문 같은, 바람을 타고 물결처럼 밀려드는 수레국화 꽃밭 같은 웃음이었다.

1) 아이작 뉴턴이 사우스시 버블 사건을 두고 한 말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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