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4)화 (4/146)

4. 그곳으로

말을 탄 호위병들을 거느린 몇 대의 마차가 덜컹거리며 고원 위를 내달렸다. 길도 제대로 나지 않은 스코틀린 땅은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자욱했다. 멀리 있는 호수가 피워 올린 것이었다. 바람이 세게 일 때마다 시들어 빠진 초목들이 죽기 직전의 새 날개처럼 바닥에 낮게 붙어 잎을 퍼덕거렸다.

“얼마나 더 가야 하나?”

에우로스가 중얼거렸다. 동시에 맨 앞에서 달리던 마차의 창문이 벌컥 열렸다. 차고 습한 공기가 마차 안으로 훅 들이쳤다.

“해가 지기 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깨까지 오는 갈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뒤로 묶은 남자가 얼굴을 찡그리며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물기와 뒤섞인 비릿한 흙 내음과 매캐한 토탄 냄새가 번져 들어온 탓이었다.

“자네는 유독 이 냄새를 싫어하더군.”

반대편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에우로스가 픽 웃었다. 뿌연 시야 내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각기 다른 농도로 퍼져 있는 흰 연기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안개가 숨기고 있는 것은 가을의 이른 추위에 얕게 얼어붙은 황폐한 땅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대체 왜 이런 명령을 내리셨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사무엘이 눈매를 더 구기며 투덜거렸다.

“사무엘.”

“잉그린트에 아들 가진 귀족이 데본셔 공작가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럼 자네가 결혼하지 그래.”

“…….”

홀로 씩씩대던 사무엘이 에우로스의 싸늘한 눈길을 받고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사무엘은 데본셔 공작가의 가신인 스태포드 남작 가문의 삼남 출신이었다. 그리고 에우로스의 오랜 친구이자 동업자이기도 했다.

에우로스는 이번에 아버지에게서 경영권을 넘겨받은 회사를 그와 함께 본격적으로 이끌어 볼 계획이었다. 그런 이유로 사무엘은 에우로스를 따라 갤러웨이 성까지 내키지 않는 동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무엘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자 에우로스는 새파란 눈동자에 품었던 냉기를 이내 사그라트렸다. 어느새 갈무리한 표정이 다시 담백한 무감을 품어 안개보다 더 뽀얀 얼굴을 도자기 인형처럼 보이게끔 만들었다.

황금색 결 좋은 머리카락과 혈관마저 비쳐 보일 것 같은 흰 피부, 푸른 눈동자와 붉고 야트막한 입술까지, 에우로스는 그 어떤 귀족보다도 더 귀족적인 미형의 표본과 같은 사내였다.

그런 그가 여왕의 억지스러운 명을 받잡고 일주일도 넘는 시간 동안 이 덜그렁거리는 마차를 탄 채 이동하고 있었다. 길이 잘 닦인 데본셔 영지나 리던 시내만을 다녀 보았을 에우로스가 생각보다 이 고된 여행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사실이 사무엘로서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당장 사무엘만 해도 초반 며칠은 멀미로 꽤 고생을 했었다.

“양국의 대통합을 위한 결단이라고 하지 않으셨나.”

“모든 귀족들을 다 그러모아서 결혼시키는 것도 아니고, 고작 두 가문의 결합이 무슨 의미가 있어.”

물론 에우로스도 사무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이 결혼은 데본셔가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였다. 데본셔의 아들이 다른 명문가의 여식과 맺어져 세력을 불리고, 그 세력을 바탕으로 왕가에 척을 지는 것을 미리 방지하려는 여왕의 의도인 것이다.

“전대 스튜어트 백작부인이 꽤 아름다웠다고 하던데.”

에우로스의 말에 사무엘이 반색하며 대답했다.

“그분은 전설적인 존재지. 브라이튼 섬에서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대륙에서도 미모로 유명했으니까. 노르망 대공도 직접 배를 몰고 청혼하러 왔다고 들었어. 뭐, 그 딸도 적당히 예쁘긴 하군. 물론 초상화는 다 믿을 게 못 된다는 건 자네도 잘 알겠지만.”

사무엘은 에우로스의 옆자리에 놓인 비루한 초상화를 힐끗거렸다. 본디 초상화란 단점은 외면하고 장점만을 극대화하므로 신뢰도가 0에 수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시케 스튜어트를 직접 보기 전까지는 그녀의 미모에 대해 낙관하기 어려웠다.

전대 스튜어트 백작부인, 릴리아나 스튜어트는 현 잉그린트 여왕의 질투를 한 몸에 받던 존재였다. 앤 여왕이 공주였던 시절, 그녀는 호방하고 남자답게 생긴 노르망 대공의 초상화를 침실에 걸어 두고 매일같이 바라보며 비밀스러운 짝사랑의 열병을 앓았다.

그러나 노르망 대공은 잉그린트의 공주가 아닌 스코틀린의 보잘것없는 귀족 영애 릴리아나에게 한눈에 반해 청혼했다. 그리고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릴리아나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릴리아나가 사랑한 남자가 바로 월터 스튜어트, 프시케의 아버지였다. 결혼 후에도 그들은 끔찍이 서로를 사랑했다. 몸이 약했던 릴리아나는 오랜 시간 아이를 갖지 못했고, 결혼한 지 10년이 훌쩍 넘어서야 귀한 딸 하나를 낳았다.

하지만 딸이 어렸을 때 릴리아나는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 사건 이후로 월터 스튜어트는 실의에 빠져 그릇된 결정을 반복했고, 그의 가문은 차츰 쇠락했다.

여왕이 스튜어트 가문을 선택한 데는 아마 이러한 이유도 있을 것이라 에우로스는 짐작했다. 분명 연적의 딸에 대한 저열한 호기심이 작용했을 테다.

당연히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에우로스가 소유한 황금화살 클럽이 사교의 장이자 소문을 취급하는 정보의 보고였기에 파악한 뒷얘기였다.

“이제 이 언덕만 넘어가면 도착이야.”

상념에 빠진 에우로스를 향해 사무엘이 말했다. 지긋지긋하다는 말투였다.

에우로스는 사무엘이 닫았던 창문을 다시 열었다. 사무엘이 손수건으로 코를 막으며 잔뜩 울상을 지었으나 상관하지 않았다.

어느새 안개가 걷혔다. 바위로 이루어진 언덕은 듬성듬성 올라온 잡풀을 제외하고 아무런 생물도 살고 있지 않은 것처럼 고요하고 황량했다.

하루 종일 어두침침하게 하늘을 가렸던 회색 구름이 달리는 마차 위를 빠르게 지나쳐 사라졌다. 구름이 지나간 자리에 오후의 해쓱한 햇빛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멀리 시커먼 성채가 그 빛을 받고 삐죽삐죽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 여행의 종착지, 프시케 스튜어트 유령이 살고 있는 갤러웨이 성이었다.

* * *

마차가 성 내에 진입하자 사람들이 부랴부랴 뛰쳐나왔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 앞치마에 젖은 손을 비벼 대고, 아무렇게나 걷어붙였던 소매를 정리하는 하녀들을 보며 사무엘은 혀를 끌끌 찼다.

“엉망이군.”

“우리가 예정했던 일자보다 조금 빨리 도착했으니 놀랄 만하지.”

에우로스는 창문을 살짝 열고 바깥을 살폈다. 그의 표정은 사무엘과 달리 느긋했다.

“차라리 잘됐어, 에우로스. 이르게 도착했으니 빨리 그 여자를 데리고 리던으로 돌아갈 수 있겠네.”

“일단 나가지. 호위와 마부들도 어서 쉬게 해 주려면.”

에우로스는 셔츠와 재킷의 칼라를 반듯하게 정리하고 구두가 깨끗한지 점검했다. 몇 시간 동안 마차에만 있었던 탓에 바지가 조금 구겨진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붉은 입술의 양 끝을 살며시 끌어 올리자 얼굴 위로 자연스러운 미소가 내려앉았다. 완벽하게 싱그러운 웃음을 머금은 채 그는 사무엘을 따라 마차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잡초가 마구잡이로 올라온 돌바닥에 내려선 에우로스를 향해 비뚤비뚤 서 있던 하인과 하녀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제각각 다른 모양새로 인사하는 사람들을 보며 사무엘은 헛웃음을 흘렸다.

마치 길에서 헐벗고 구르던 오합지졸들을 데려다가 옷을 입혀 세워 놓은 것 같은 꼴이었다. 데본셔 공작저의 숙련된 사용인들을 떠올리자 그 대비는 더욱 극명했다.

“성의 주인은 어디 계시지?”

사무엘이 가장 가까이에 서 있는 어린 하녀에게 물었다.

“송구하오나 프시케 아가씨는 외출 중이라 지금 성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녀는 강한 스코틀린 사투리를 쓰며 대답했다.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억센 억양 때문에 꼭 외국어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럼 스튜어트 영애는 언제 성으로 돌아오시는지 알고 있나?”

“오늘 저녁에…….”

사무엘의 계속된 질문에 하녀는 곧 울 기세였다. 보다 못한 에우로스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가씨께서 어디로 출타하셨지?”

어린 하녀는 제 앞으로 드리운 그림자를 더듬어 비척비척 고개를 올리다가 그만 입을 꼭 다물었다. 눈앞의 청년이 너무 잘생긴 탓이었다.

매일 산적 같은 하인 놈들만 보다가 왕자님 같은 사람이 나타나 다정한 말투로 묻자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남자는 마치 얼굴에 꿀을 바른 듯 매끈하고 달콤하게 웃고 있었다.

“오늘 마을에서 장이 열립니다. 그곳에 가셨…….”

“귀족 아가씨가 직접 장엘 가셨단 말이야?”

사무엘이 깜짝 놀라 불쑥 끼어들었다. 에우로스는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말 두 필만 좀 빌렸으면 하는데.”

그 말을 들은 하녀가 에우로스를 향해 고개를 꾸벅하고는 마구간 쪽으로 달려갔다. 다른 사람들도 저들끼리 속닥거리다가 눈치를 보고는 자리를 떴다.

“에우로스, 말은 갑자기 왜?”

앞에 서 있는 말 두 필 중 하나가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된 사무엘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마구간지기가 데려온 말들은 야생마 수준으로 덩치가 큰 데다 신경질적으로 투레질을 하는 것이 성깔이 여간 사나워 보이지 않았다.

“장터에 나가 봐야지. 누구를 기다리는 건 성미에 맞지 않으니.”

에우로스가 등자에 발을 올리더니 순식간에 말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 하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시장은 어느 쪽에 있지?”

“성문을 나가서 길을 따라 쭉 내려가면 금방입니다. 말을 타고 가시니 5분도 걸리지 않을 거랍니다.”

하녀의 열성적인 대답에 에우로스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제가 탄 말의 갈기를 몇 번 쓰다듬어 준 다음 약하게 옆구리를 걷어찼다. 그가 탄 거대한 흑마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우로스, 도착하고 숨도 돌리기 전에 시장에 가겠다니, 제정신이야!”

사무엘은 피곤에 전 눈을 비비며 항의했다. 그러나 에우로스를 태운 말이 조금씩 멀어지자 그도 허겁지겁 말에 올랐다.

에우로스가 더 순해 보이는 말을 먼저 차지했으므로, 자연스레 사무엘은 거세게 발을 구르고 있던 말을 타야 했다. 겁먹은 그가 배를 조심스레 건드리자 말이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에우로스!”

사무엘이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튕겨 나갔다. 그러자 에우로스도 피식 웃으며 곧 속력을 내어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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