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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133화 (완결) (133/133)

133화(完)

기다림의 끝

마차에서 내린 미렌과 이올라오스는 함께 황성의 내성을 향해 들어갔다. 미렌 에드가가 지내었던 황후의 침실은 내성에서도 가장 안쪽에 존재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마리아로 인해 목숨을 잃은 뒤, 미렌이 황성에 들어올 일이라곤 없었다. 돌아오고 싶던 것도 아니었다.

이곳은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부끄러운 공간이었으며…… 또한 가장 나약한 과거가 담긴 곳이기도 했다.

고개를 돌리면 지금이라도 다 죽어가는 시한부 황후, 미렌 에드가가 정원을 거닐고 있을 것만 같았다.

“오랜만이시겠군요.”

“예. 다시 오게 될 거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곳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대로 황후의 침실까지 가는 외부 정원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계절에 맞춰 심어 둔 아름다운 꽃들이 만개해 곳곳을 수놓았다.

“……이곳이 이렇게나 아름다웠던가요.”

주변을 둘러보던 미렌이 문득 말했다. 그녀의 말에 이올라오스도 만개한 꽃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계절에 맞춘 꽃들이 피어나는 게 아름답다고 눈여겨보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돌아온 이곳은 미렌의 기억 속보다도 훨씬, 훨씬 더 아름다웠다.

“외부 정원은 전에 미렌 님을 모셨던 시종들이 아직 관리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 시종들이…….”

“그 중에선 고초를 당했던 시녀들도 있습니다. 비록 모진 고초를 당했으나…… 그들은 황후 전하를 미워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들의 상전은 죽었으며, 상관인 마리아 또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런데도 시종들은 아직도 이곳에 남아 정원을 관리하고 있다니.

“어째서요?”

“어째서라니요?”

“왜…… 다들 떠나지 않고 남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미렌과 함께 했던 시종들이라면 아마 황성을 떠나서도 좋은 대우를 받으며 일할 수 있을 것이다. 미렌은 제 시종들이 떠나지 않았다는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자 이올라오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그야, 모두가 황후 전하를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대체, 왜……. 언제나 쓰러지기 바빴던 저를 말입니까?”

“전하께서는 아직도 모르시는군요.”

이올라오스는 아직도 축제의 축사를 위해 첨탑을 오르던 황후의 뒷모습을 기억한다.

‘내가 살고 싶게 만들어 준 사람을 위해 사는 게 어째서 나를 할퀴는 일입니까?’

죽을 날을 받아 놓고서도 그토록 단단해 보였던 그 뒷모습을. 처음으로 아름다움이란 저런 것이구나, 라고 알게 했던 그 자태를.

한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이올라오스는 그때 처음 알았다. 미렌 에드가는 한낱 힘없는 시한부 황후가 아니었다.

모두의 기억에 아로새겨지기 충분한, 그런 사람이었다.

“모두가 전하를 잊지 않았습니다. 아니, 잊지 못했어요. 심지어는 전하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저조차도.”

그녀를 두고 이제와 ‘전하’라 부르는 것은 이올라오스 나름의 안배였다. 다시 ‘전하’로 살아 달라는 게 아니라 그녀의 기억 속 시한부 황후 ‘미렌’이 더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하물며 폐하께선, 잊을 수 있을 리가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 순간 외부 정원의 끝에 다다랐다. 안과 밖을 이어주는 이 문을 열고나면 그때부터가 ‘황후의 정원’이었다.

문 앞에서 이올라오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화려한 음각이 새겨진 문에 손바닥을 가져다댄 채 미렌을 바라봤다.

“제가 모셔다드리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이제부터는 혼자서 가는 거군요.”

“예, 폐하께서 이 이상은 그 누구의 출입도 허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미렌 또한 허락을 받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올라오스는 처음으로 폐하의 명을 어기기로 결심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앞에 선 미렌에게 대단한 기대를 거는 것은 아니었다.

지난 2년 간, 라이언은 몇 번이고 그녀를 부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연중 큰 연회가 열리면 때때로 로렌트와 함께 선 미렌에게 시선을 주기는 했으나, 그뿐이었다. 그녀와 가까워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만일 그녀가 들어갔음에도 무엇도 바뀌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다. 그저 이것이 이올라오스가 자신의 주군이자 친우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물론입니다, 이올라오스 경.”

미렌의 짧은 눈인사를 끝으로 이올라오스가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그녀가 이올라오스를 지나쳐 문가에 제 손을 가져다댔다.

끼익…….

문은 가볍게 미는 손짓에도 부드럽게 열렸다. 이올라오스는 곁에 서서 미렌이 들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침내, 쿵.

그녀를 삼킨 문이 다시 닫히자 주위는 아무 일도 없던 듯 잠잠해졌다. 이올라오스는 가만히 그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러다 문득 홀로 중얼거렸다.

“복숭아가…… 날 때로군.”

아주 잠깐 열렸던 문틈.

그 사이로 다디단 향기가 흠뻑 퍼져 왔다. 그 향기가 이올라오스의 코끝마저 건드렸다.

***

쿵……!

들어간 미렌의 뒤로 문이 닫히며 이올라오스와 그녀의 사이가 단절됐다. 그 옛날 ‘황후의 정원’이라고 불리었던 곳의 입구에 선 미렌이 멍하니 안쪽을 바라봤다.

외부 정원까지는 분명 그녀의 기억과 큰 차이 없이 여전히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자태를 풍겼었다. 그런데 이곳, 황후의 정원이자 내부 정원은…….

미렌이 기억하던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정원에서 침실까지 걸어가는 동안 비를 막아 주던 흰 가림막도, 라이언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했던 정원도, 그와 함께 지내었던 침실도…….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탁 트인 전경만이 미렌을 맞이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진 이곳에는, 그녀도 익히 아는 나무만이 줄지어 심어져 있을 뿐이었다.

복숭아나무.

분홍빛 물결이 미렌의 주위를 감쌌다. 바람에 흩날린 꽃잎 몇 장이 그녀의 뺨을 간질이기도 했다.

빽빽하게 심어진 복숭아나무 중에선 꽃이 아니라 이미 이른 열매를 맺은 것들도 있었다. 제 아버지가 직접 밭을 일구고 농사를 지을 때처럼.

미렌의 기억대로라면, 이곳에 심어진 복숭아나무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도 과실수라 다른 나무의 양분을 뺏을까 봐 정원사들이 반대하던 것을 라이언이 억지를 부려 겨우 심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이곳에는 복숭아나무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온 세상이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꼭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고작 문 하나를 넘었을 뿐인데 그녀의 세상이 변했다.

“아…….”

그녀의 입가가 바르르 떨렸다. 미렌은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가려 버렸다.

막지 않았다간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울음이든, 웃음이든.

스스스…….

바람이 나뭇가지를 뒤흔들고 가는 소리가 미렌의 귓가를 울렸다. 그녀는 그 나뭇가지 사이로 이질적인 소리를 듣고 말았다.

삭둑.

삭둑…….

조용한 이곳에서 일정한 가위질 소리만이 울려댔다. 미렌은 저도 모르게 그 소리를 따라 복사꽃 잎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너른 등이었다.

사다리에 올라 앉아, 평민이나 입을 법한 옷을 입고, 땀에 젖은 채 움직이고 있는 그는 미렌이 알고 있는 사람과 너무도 달랐다.

그는 오로지 나무에 집중한 듯 미렌이 지척에 다가올 때까지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마침내 미렌이 나무의 바로 아래까지 온 다음에야 알아챈 듯 그의 가위질이 멈추었다.

그러나 가위질이 멈춘 것은 아주 잠시였다. 라이언은 평연한 태도로 다시 나무를 매만지며 느릿하게 물어왔다.

“이올라오스인가.”

얼마 만에 듣는 목소리던가.

그가 자신을 두고 수도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미렌은 그의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써왔다.

라이언과 자신은 악연이니 이쯤 해야 한다고.

더 이상 가까워져 봤자 서로에게 독이 될 뿐이라고…….

그렇게 자신에게 되뇌었다. 그의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근 2년 간 그토록 바쁘게 움직였던 것이기도 했다.

“멋대로 들어오지 말라 했을 텐데.”

라이언은 이곳에 들어올 사람이라곤 이올라오스밖에 없다고 단정한 듯싶었다.

모든 것을 내려 둔 채 황성의 가장 깊은 곳에 처박힌 황제를 찾아 줄 이라곤, 없는 것처럼.

미렌의 눈가가 젖어들었다.

그에게 복숭아에 대해 알려 준 것은 자신이다. 복숭아나무가 4월에 꽃이 피어 7월에 수확한다는 것도 자신이 알려 주었다.

저 메마른 사내에게 다디단 사랑을 알려 준 것도…… 자신이었다.

“우리, 다시 사랑할까요.”

예고조차 없이 그녀의 목소리가 이 아름다운 정원을 가로 질렀다. 그와 동시에 라이언의 손이 우뚝 멈춰 섰다.

“이번에는 당신이 황제가 아니고.”

온 얼굴이 젖어들어 그의 뒷모습이 흐려졌다. 그러나 소리로 알 수 있었다. 그는 들고 있던 가위를 바닥으로 툭 떨어트리고 말았다.

사다리가 엉망으로 무너지는 소리 또한 들려왔다. 그럼에도 미렌은 젖은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나도, 더는 황후가 아니고.”

그렇게 다시 사랑할까요…….

미렌의 시야가 엉망으로 흐려진 순간, 새까맣게 암전되었다. 달려온 라이언이 그녀를 제 품안 가득 안아냈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흔들렸다.

고작 이 사내로 인해서.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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