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꿈의 의미
미렌과 이올라오스는 더는 길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드레스가 찢어진 채로 가게에 들어갈 수도 없던 터라, 미렌과 이올라오스는 그녀가 타고 온 마차로 향했다.
마차에 오르기 전 이올라오스가 마부에게 목적지를 전달했다. 그 모습을 힐끗 바라보던 미렌이 먼저 마차에 올랐다.
마차 안이 꽤 넓은 덕분에 마주보고 이야기할 자리가 났다. 곧 길가가 정리되고 마차가 출발함과 동시에 이올라오스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현재 황위를 내려놓고자 하십니다.”
“황위를, 내려놓으시다니요. 아직 폐하껜 후계자가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 덕분에 문제가 많습니다.”
이올라오스는 1년 전, 라이언과 따로 자리를 가졌던 그 날을 떠올렸다.
‘이올라오스.’
‘폐하, 하명하십시오.’
‘네가 트리온 백작 위를 거부했다더군.’
뜬금없는 이야기에 이올라오스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의 말대로 이올라오스는 몇 달 전, 아버지의 백작 위를 물려주겠다는 제안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유야 간단했다. 백작 위를 물려받게 되면 더 이상 황성 기사단장직을 수행할 수도, 라이언의 호위 역을 이어갈 수도 없었다.
아버지인 트리온 백작의 연세가 제법 고령이긴 하나, 아직 급한 정도는 아니었다. 때문에 이올라오스는 백작 위를 물려받는 것을 조금 더 뒤로 미루었다.
‘백작 위를 이어라.’
‘……하오나 폐하, 그랬다간.’
‘또한 기사단장 직에서 물러나도록.’
‘폐하!’
그리 말하는 황제는 자신의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대신 달빛이 들어오는 집무실의 너른 창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할 뿐이었다.
‘1년 뒤. 나는 황위에서 물러난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그러니 너 또한 내게, 그리고 황성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읊조리는 라이언의 뒷모습이 어딘지 씁쓸해 보였다. 자신과 이 황성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그는, 꼭 이올라오스라도 이곳을 벗어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폐하께는 아직 후계도 없으시잖습니까, 그게 대체 무슨……!’
지금이라도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겠다는 것일까.
후계가 없는 이상 황제는 죽기 전까지 황위에서 물러날 수 없다.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라이언은, 베르디움 공작가와의 혈전 때 미렌을 놓아준 뒤로 여자를 찾은 적이 없었다. 아니, 미렌 에드가가 아니고선 어떤 여자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 이올라오스의 생각을 꿰뚫기라도 하듯 라이언이 담담하게 말했다.
‘꼭두각시가 되겠다는 말이다.’
‘……!’
꼭두각시. 혹은 허수아비라고 부를까.
기나긴 제국의 역사상 그런 황제가 없지 않았다. 다만 그 어떤 황제도 자신이 직접 꼭두각시의 위치로 들어간 이는 없었다.
능력이 없어 황실의 종친, 혹은 귀족에게 패배한 황제들이 걷는 길이었다.
라이언은 그 길을 제 발로 들어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곳, 황성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 두 번 다시 나오지 않겠다. 네게 약속하지.’
웃음기조차 없었다. 라이언은 제 등 뒤에서 무릎 꿇은 이올라오스를 두고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이올라오스는 그제야 어째서 그가 기사단장직을 관두고 트리온 백작 위를 물려받으라 명한 건지 이해가 갔다.
제국에서 황가를 제외하고 가장 유력한 권력가였던 두 공작 가가 현재는 힘을 쓰지 못했다.
에드가 가문은 선대 공작이 죽은 뒤부터 점차 위세를 잃어 가고 있었고, 베르디움 공작 가는 반역으로 인해 가문이 몰락했다.
그곳을 제외하면 현재 가장 권력의 중심에 있는 가문은 트리온 백작 가뿐이었다. 트리온 백작 가는 언제나 황가를 지키기 위해 존재했기에 부러 후작 위에 오르지 않았을 뿐, 그 명예는 여타 공?후작 가에 뒤지지 않았다.
‘때가 되면 알아서 내 혼인을 성사시켜도 상관없다. 황자는 필요할 테니. 다만 서로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된 여성이었으면 좋겠군.’
거기다 덧붙여 온 말은, 꼭두각시를 하다못해 황가의 종마가 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라이언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자신의 혼인에 대해 저토록 방관적인 태도를 취한 적이 없었다. 미렌 에드가를 만난 뒤로는, 언제나.
듣다 못한 이올라오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 이번 한 번만 제 무례를 용서하소서.’
‘…….’
‘라이언.’
이올라오스가 처음으로 제 이름을 부르자 라이언 또한 그제야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선 이올라오스가 생전 처음 보는 얼굴로 마주하고 있었다.
같은 위치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라이언도, 이올라오스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대체 왜.’
‘무엇을 말하는 건가, 이올라오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이올라오스는 그를 두고 친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라이언은 오로지 하나뿐인 주군이었으며, 어디까지나 모셔야할 황제 폐하였다.
그러나 도저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렌 우드를 놓아준 이후부터 감정이라곤 조금도 남김없이 사라진 저 사내를,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이올라오스.’
‘말해 봐.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느냔 말이야.’
‘내게도 꿈을 꿀 기회를 줘.’
그 순간 라이언이 웃었다. 울음보다도 못한 웃음이었다.
신이 내린 성군. 가장 고귀한 태양. 황제라는 자리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내…….
그 모든 수식어를 달고 태어났던 라이언은 저토록 순수하게 웃었다. 순진한 아이처럼, 혹은 순박한 일개 평민처럼.
그의 뺨 위로 차갑게 식은 눈물 한 방울이 툭 흘러 내렸다.
‘나도 숨 좀 쉬게 해 줘…….’
***
“차라리 더는 못 하겠다고, 억지로 떼를 쓰셨다면 저 또한 받아들이지 못했을 겁니다.”
“…….”
“그런데 폐하께서 뭐라고 말씀하신 줄 아십니까? 꿈이 있다더군요. 복숭아나 키우며 조용히 살고 싶노라고.”
이올라오스가 참담한 얼굴로 눈을 내리 감았다. 미렌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봐야만 했다.
“그런 분을, 그 꿈을…… 감히 제가 어떻게 막겠습니까?”
‘나도 그저 복숭아나 키우며 살고 싶다는 생각 말인가?’
‘아직…… 제 대답은 유효합니다. 저는 복숭아나 키우며 살고 싶습니다.’
언젠가 나누었던 대화들. 스쳐 지나간 기억들.
미렌은 비로소 라이언의 꿈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았다.
새장 속에 갇혀 있다고 생각한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그건 한 평생을 황위와 황성에 갇혀 살아왔던 라이언 또한 마찬가지였다.
또한 그에게 꿈이라는 허황된 희망을 심어 준 것은, 다름 아닌 미렌이었다.
평생 동안 새장에 갇힌 채 그곳이 새장인 줄도 모르고 살았던 그에게…… 미렌이란 꿈이었으며, 희망이었고, 소원이었다.
“그 후로 1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폐하께선 차근히 물러날 준비를 하셨어요. 다음 권력자가 누가 되든 무난히 이어갈 수 있도록.”
“그렇다면 왜, 이제야 그걸 제게 말씀해 주시는 겁니까?”
근 2년 간 미렌은 에드가 공작 위를 물려받기 위해, 그리고 공석이었던 에드가 공작의 자리를 대신 하기 위해 바쁘게 살았다.
황성의 소식에 귀를 닫고 산 것은 사실이나 그녀가 이 정도로 몰랐단 것은 이 모든 일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눈을 내리깐 이올라오스가 덤덤하게 말했다.
“제가 싫증이 났습니다.”
“……싫증이요?”
“이대로 가면 저는 이 제국에서 가장 높은 권력을 쥔 사내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싫어졌습니다.”
문득 눈을 든 이올라오스가 빙그레 웃었다. 그는 두 눈을 곱게 접어 미렌을 향해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줬다.
누구보다 이올라오스다운 모습이었다.
“그래서 친우인 미렌 님께 상담을 받으러 온 겁니다. 그 옛날, 프레니티에서 고민을 털어놨을 때처럼.”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너무 다르잖습니까. 저는, 이제…… 공작이 될 몸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건 미렌 님께서 무언가를 포기하라고 드리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요? 제가 뭘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올라오스는 잠시 대답을 미뤘다. 몇 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친구의 친구는 모두 친구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니 미렌 님께서도, 이번 한 번만 제 친구에게 도움을 줄 수 없겠습니까?”
“이올라오스 경의 친구라…… 하면.”
“미렌 님을 제외하고 딱 한 명 더 있습니다. 저는 평생 우리가 친구인 줄 몰랐건만, 이제야 알았지 뭡니까.”
미렌은 결국 난감한 얼굴로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이올라오스가 말하는 ‘친구’라는 게 누구인지쯤은 이미 알아챈 뒤였다.
그는 부탁하고 있었다.
“미렌 님을 만나고서도 제 친우가 바뀌지 않는다면…… 그때는 받아들이겠습니다.”
트리온 백작 위를 물려받는 것도, 더 이상 기사단장이라는 호위역이 아닌 권력의 한 가운데 서는 것도.
결연한 얼굴로 말해 오는 이올라오스를 향해 미렌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딱 한 번. 고작 한 번 만나는 것에 불과했다.
이 만남이 그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게 될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 또한 라이언을 그저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미렌 님.”
“제가 언제쯤 가면 될까요?”
“이런, 제가 말씀 안 드렸습니까? 이 마차의 목적지는 황성입니다.”
“이올라오스 경……!”
미렌이 당황스러운 눈으로 이올라오스를 부른 순간, 바깥에서 도착했다는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이 우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췄다.
그러나 이올라오스는 먼저 마차에서 내릴 생각이라곤 조금도 없어 보였다. 대신 마차의 문을 열어 주며 미렌에게 인사했다.
“아, 미렌 님. 참고로…….”
“……예?”
“제 친우는 이미 모든 걸 정리하고 황성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제…… 한 달 쯤 되었군요.”
“가장 깊은 곳이요?”
이올라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성의 가장 깊은 곳? 미렌 또한 이곳에서 오랫동안 살았지만 그런 곳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곳을 두고 혹자는 이렇게 부른답니다. 귀신이 살던 곳…… 이라고.”
황실의 귀신.
복숭아나 키우며 살고 싶다던 꿈.
그것들이 가리키는 곳은 하나밖에 없었다.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