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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131화 (131/133)

131화

이상

2년 후.

“오늘 오후엔 어느 가문이라고요, 사일런?”

“미렌 님, 단추가!”

“아.”

바쁘게 움직이던 미렌은 사일런의 한 마디에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사일런이 재빨리 다가와 미렌의 목 바로 아래에 있는 단추를 꼭꼭 여며 주었다.

날이 더워서 딱 하나, 가장 위의 단추만 풀어 둔 것이었다. 사일런은 그래선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어 왔다.

“공작 위 계승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부디 조심, 또 조심하십시오.”

“……공작 위에 오르는 게 이렇게 귀찮은 일인 줄 알았으면, 로렌트에게 양보할 걸 그랬어요.”

미렌이 사일런 몰래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공작 위에 올라 에드가 공작가를 이끌기로 결정된 지는 제법 오래되었다. 물론 그 과정 속에서 꽤 많은 사건이 있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무사히 진행될 수 있었다.

다만 미렌은 공식적으로 에드가 공작 위를 물려받기 전부터 이미 공작가의 일들을 대부분 처리했다.

의외였던 점은, 미렌이 가문을 이끌고 영지를 다스리는 일에 꽤 재능이 있다는 점이었다.

“농담도 짓궂으십니다. 2년 전, 다프네 님의 유지를 들으시고선 공작이 되겠다고 하시던 걸 이 노신이 똑똑히 들었습니다.”

“그때는 그랬죠. 그런데 벌써 2년이나 지났잖아요. 슬슬 마음이 해이해질 때라고요.”

사실 미렌은 처음엔 공작 위에 올라 달라는 사일런의 부탁을 거절했다.

이유야 많았다. 먼저 미렌은 그때 아직 평민 ‘미렌 우드’였으므로 애로사항이 적지 않았다. 더군다나 만약 오른다 해도 가문의 장로들이 인정해 줄지가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일런은 그 모든 문제를 이렇게 일축했다.

‘미렌 님, 다프네 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제게 남긴 마지막 말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말해 줘요, 사일런.’

‘미렌 님께서 만일 건강해지신다면, 선대 공작 각하의 뒤를 잇게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요? 어째서요?’

‘다프네 님의 어릴 적 꿈이 영지를 다스리는 것이었답니다. 비록 남들처럼 뛰어다니진 못하셨으나…… 누구보다 여장부셨지요.’

병마는 사람의 마음마저 약하게 만든다. 인생의 절반을 시한부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았던 미렌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인 다프네는 마음만큼은 누구보다도 건강했다. 끝까지 뱃속에 품은 미렌을 포기하지 않고 아스타로트의 마법마저 해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미렌은 사일런이 전해 준 어머니의 유지를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다프네의 가까운 친척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에드가 공작가에 들어간 다음 차근히 공작 위를 준비했다.

무엇보다 로렌트와 사일런의 전폭적인 지지가 가장 컸다. 로렌트는 미렌이 누구인지도 잘 모르면서 자신이 공작 위에 오르지만 않으면 좋다며 가문의 장로들에게 그녀를 치켜세워 줬다.

“자, 다 되었습니다. 모쪼록 주름이 흉해지지 않게 주의해 주십시오.”

미렌이 입은 드레스는 일반적인 영애들의 것과는 달리 간소하고 노출이 없었다. 사람들을 만나서 사업적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탓에 무엇보다 편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일런의 부탁에 밉지 않게 눈을 흘긴 미렌은 마차에 올랐다. 사일런이 마차의 문을 닫아 주며 나직이 말했다.

“오늘 오후엔 트리온 백작가의 방문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미렌 님.”

마차의 창문 너머 보이던 사일런의 모습이 점차 멀어졌다.

언제나 그랬듯 창문 밖으로 손을 꺼내 인사를 하던 미렌이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겨우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미렌은 머릿속으로 오늘 일정 정리를 마치자 문득 곧 그렌의 생일이 다가오는 것을 깨달았다.

돌아가는 길에 장난감을 사서 가면…… 역시 자긴 아기가 아니라고 싫어하려나.

그래도 여전히 미렌의 눈에는 아기로만 보였다. 공작가에 온 뒤부터 그렌은 도련님으로 모셔졌는데, 어색했는지 그때마다 그녀의 뒤에 숨는 게 너무도 귀여웠기 때문이다.

물론 2년이 지난 지금은 그렌도 제법 잘 적응해 가고 있었다. 그런 김에 이번 생일은 제법 성대하게 치러 주고 싶은 게 미렌의 마음이었다.

그렇게 미렌이 그렌과 공작성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쿵!

무언가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심하게 흔들렸다. 중심을 잡지 못한 미렌이 겨우 마차의 창을 잡아챘다.

바깥에선 말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차의 흔들림이 겨우 잦아들자 미렌은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봤다.

“무슨 일이에요?”

“이런, 미렌 님! 괜찮으십니까?”

앞서가던 마부가 미렌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그는 곤란한 눈으로 제 앞과 뒤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조그맣게 대답했다.

“그게…… 앞에서 마차와 말이 부딪치는 사고가 난 모양입니다.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말들이 놀랐습니다.”

“저런……. 다른 사람들은 괜찮습니까?”

“우리 마차는 괜찮습니다만, 앞에 난 사고에선 말에 타고 있던 사람이 낙마를 한 것 같더군요.”

낙마라는 말에 놀란 미렌이 마차에서 내렸다. 어차피 이렇게 사고가 난 이상, 앞 마차들의 정리가 끝나기 전까지 꼼짝도 할 수 없을 터였다.

바깥은 엉망이었다.

뒤따라오던 마차의 마부들은 각자 말들을 진정시키느라 바빴고, 앞 마차는 꽤 크게 사고가 난 듯 여기저기 부서진 흔적이 존재했다.

그보다 심각한 건 낙마했다는 사람의 부상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미렌은 우연히 그 대열에 끼어 떨어진 사람을 목격했다.

“의원, 의원을 불러 주세요!”

상태가 제법 심각했다. 황궁 기사단 소속인 듯 제복을 입은 사내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응급 처치를 할 줄 모르는지 허둥대기 바빴다. 결국 지켜보다 못한 미렌이 사람들 틈바구니로 나섰다.

“제가 잠시 보겠습니다.”

“의원이세요?”

“아니요, 의원은 아니지만…… 응급 처치를 할 줄 압니다.”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 주자 미렌은 우선 남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호흡이 불안하지만 분명 의식은 있었다.

가장 먼저 머리에서 흐르고 있는 피를 지혈해야 했다.

지체하지 않고 미렌은 주변에 있던 날붙이로 제 드레스 자락을 찢었다. 지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서 의원에게 데려가야 합니다. 이건 그저 응급 처치에 불과해요.”

“기, 기다려 주십시오……!”

다행히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미렌을 도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의원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의외로 다친 사내였다.

“갈…… 수 없습니다. 폐하께, 먼저…….”

폐하.

미렌은 고작 그 한 단어에 어깨를 움찔거렸다.

수도에 살며 에드가 공작 위를 잇기로 한 이상, 그 이름을 아예 듣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몇 번이고 들어도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미렌은 제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는 것과는 별개로 사내의 응급 처치를 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단호한 기색이었다.

“처치를 받고 가셔도 늦지 않습니다. 의원에게 먼저 가세요.”

“전, 저는 황성 기사단 소속입니다. 단장님이 급히 내리신 명령이란 말입니다……!”

“그럼 사고가 나지 않게 하셨어야죠. 이러다 죽을 수도 있단 말입니다!”

듣다 못한 미렌이 벌컥 화를 냈다. 꼴을 보아하니 자신이 곧 죽는다 해도 기필코 황성에 갈 것 같아 따끔하게 해 준 말이었다.

그 순간 주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누군가 이 사고 현장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우드 님, 이런 곳에서 다 뵙는군요.”

남자의 목을 단단히 받쳐 주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미렌이 그 목소리에 얼굴을 들었다. 그곳엔 이올라오스가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그와 동시에 지금 이 상황에서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이기도 했다.

“이올라오스 경!”

“저희 쪽 단원이 사고가 났다는 말을 듣고 왔습니다.”

“다행입니다. 이 분이 치료도 받지 않고 고집을 부리고 있어서요.”

다가온 이올라오스가 미렌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쓰러진 기사에게 귀를 가져다 대고 무어라 말을 듣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뭐? 대체 어째서.”

“머리칼이…….”

순간 이올라오스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잠시 동안 말이 없던 그는 그만하면 되었다는 듯 제 단원에게 쉬라며 어깨를 토닥였다.

곧 이올라오스 말고도 황성 기사단 소속이 다가와 사내를 데려갔다. 미렌도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문득 이올라오스가 미렌의 다리 쪽을 눈짓하더니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예? 무엇이, 아. 이런…….”

이올라오스의 눈길을 따라 눈을 내리던 미렌은 자신의 치마가 붕대를 대신하느라 엉망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는 예정되어 있던 일정을 진행할 수 없었다.

사일런이 봤다간 기함할 테지. 미렌이 짧게 한숨을 내쉴 때였다.

“괜찮으시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경께서요? 괜찮습니다.”

“저희 단원이 낸 사고니 배상도 필요할 테고, 마침 드릴 말씀도 있었으니까요.”

“드릴 말씀이요?”

“혹 전해 듣지 못하셨습니까? 오늘 오후, 에드가 공작가에 제가 방문할 예정이었습니다만…….”

사일런이 분명 지나가듯 트리온 백작가가 방문해 온단 말을 전하기는 했다. 다만 그게 정말 ‘이올라오스 트리온’을 뜻하는 것인 줄은 몰랐다.

개인적인 친분을 위한 방문은 보통 가문의 이름이 아닌 본인의 이름을 대고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가 트리온 백작가의 이름을 댔다는 건, 가문 대 가문으로서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듣기는 했지만 이올라오스 경께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경의 부친이신 백작께서 방문하실 거라고 생각 했는걸요.”

“부친께선 곧 일선에서 물러나실 예정이라, 제가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곧 이올라오스 경께서 백작 위를 이어받으신다고요?”

“그렇습니다. 기사단장 직에서도 곧 물러날 예정입니다.”

눈을 내리깐 이올라오스가 작게 긍정해 왔다. 미렌은 그 말에 문득 저도 모르게 그럼 폐하는 황성에 홀로 남게 되는 거냐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찾아 왔습니다. 황성에서의 업무를 정리하기 위해서요.”

“그래서라니요?”

“폐하께서…… 황위를 내려놓으시길 원하십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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