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130화 (130/133)

130화

말 없는 대화

미렌이 공작 성에 들어간 지 벌써 몇 주가 흘렀다.

모든 절차는 제법 순조롭게 진행됐다. 미렌과 그렌은 로렌트의 도움으로 에드가 가문에 무사히 입적 신청을 마친 터였다.

물론 그 뒤에는 사일런의 엄청난 일 처리가 뒷받침되어 있었지만.

며칠 전에는 미렌이 로렌트와 직접 만나는 일도 있었다. 세상을 한껏 유랑하다 돌아온 로렌트는 여전히 화려하고 한량 같은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아, 그쪽이 새로운 후계자?’

‘처음…… 뵙겠습니다. 미렌 우드입니다.’

‘인사는 무슨. 아무튼 고마워. 난 미렌이 죽어서 설마 진짜 내가 공작이 될까 봐 마음 졸였거든.’

로렌트는 아무렇지 않게 미렌 에드가의 죽음을 말하다 문득 두 이름이 같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웃어 왔다. 그 여유롭고 남에게 무신경한 모습마저도 너무 로렌트다웠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해?’

‘열심히 하겠습니다.’

‘난 열심히 하는 거 딱 질색이야. 뭐든 적당히만 해, 적당히만.’

어깨를 으쓱인 로렌트는 살랑거리는 걸음으로 공작 성을 빠져나갔다. 어느 백작 가문의 영애와 정원에 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누구보다 무용한 것을 사랑하는 로렌트는, 그렇게 미렌에게 모든 것을 양도했다.

그것과 별개로 미렌은 차근차근 생각해 오던 모든 일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가장 먼저 해낸 건 역시 전쟁으로 인해 죽은 이들의 영결식이었다.

그 행사엔 다른 누구도 아닌 미렌의 부모님 또한 있었다. 헤겔을 포함한 전쟁 용사들의 이름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오늘, 미렌은 준비한 영결식을 위해 검은 옷을 차려입고 성당으로 가는 중이었다.

“누나, 우리 어디 가?”

“음……. 사람들을 애도하러.”

“애도? 애도가 뭔데?”

“죽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거야.”

마차에 함께 탑승한 그렌도 마찬가지로 검은 정장을 차려입었다. 그녀는 아직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 잘 모를 동생을 위해 그저 위로라고만 말했다.

그러나 그렌은 생각보다도 더 침착한 얼굴로 미렌에게 말했다.

“엄마랑 아빠처럼?”

“……그렌.”

“지금 가는 곳에 엄마랑 아빠도 있는 거지?”

눈앞에서 전쟁을 겪은 그렌은 생각보다도 더 어른이 되어 버렸다. 울지도 않고 엄마와 아빠를 찾는 동생의 모습에 마음이 아파 미렌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코끝이 저려 오는 기분에 겨우 치장한 모습이 엉망이 될 것 같았다. 미렌은 서둘러 그렌을 제 품으로 안았다.

“누나가 부족해서 미안해. 엄마랑 아빠를 지켜 내지 못해서…….”

그렌은 잘게 떨려 오는 제 누나의 팔을 꼭 맞잡았다. 그러고서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아이 특유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나는 내가 지킬 거야.”

“누나가 그렌을 지키는 게 아니라?”

“응. 아빠가 그랬어. 나중에 크면 꼭 누나를 지켜 줄 수 있는 멋진 사람이 되라고. 그리고 헤겔 형아도!”

그렌은 씩씩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아직 제대로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고도 슬프지 않은 척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아이는 이제 벌써 제 누나와 슬픔을 나눌 정도로 커 있었다.

제 동생이 너무도 빠르게 커 버린 것 같아서, 미렌은 마음이 저려 왔다.

“미렌 님, 그렌 님! 도착했습니다.”

말이 우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췄다. 미렌은 서둘러 표정을 정리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 밖은 얇은 빗줄기가 내리고 있었다.

하늘이 죽어 간 자들을 애도하는 자리란 것을 알기라도 한 듯 대낮임에도 사위가 어두웠다. 먹구름이 잔뜩 낀 탓이다.

영결식엔 우드네 말고도 가족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선 미렌도 아는 프레니티의 사람들도 띄엄띄엄 보였다.

그보다도 많은 건 전쟁 중에 목숨을 잃은 병사와 기사의 가족들이었다. 저 멀리서 제복을 입은 이올라오스와 로이아가 미렌을 발견하곤 동시에 이쪽으로 다가왔다.

“우드 님, 잘 지내셨습니까?”

정말 오랜만에 얼굴을 본 로이아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딱딱한 태도로 고개를 숙여 왔다. 곁에 선 이올라오스도 미렌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 주었다.

“소식은 들었습니다. 에드가 공작가에 들어가셨다고요.”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직 서류 처리가 미처 끝나지 않아 ‘미렌 우드’이나, 곧 ‘미렌 우드 에드가’로 이름이 바뀔 예정입니다.”

우드가 미들 네임이 되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미렌을 ‘에드가’라고 부를 터였다. 미렌은 혹시 싶어 그들에게 미리 말했다.

“그래도 로이아 경은 저를 ‘우드 님’으로 불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참고하겠습니다.”

로이아가 참고하겠다고만 말한 건 만약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날 경우 그녀를 ‘우드 님’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이 로이아다워서 미렌이 픽 웃었다.

문득 가만히 미렌의 모습을 살펴보던 이올라오스가 물었다.

“그럼, 공식적으로 공작이 되시는 겁니까?”

“글쎄요. 입적을 하는 건 맞지만 아직 거기까진 정해진 바가 없습니다. 풀어야 할 숙제도 남아 있고요.”

아버지의 서재에 걸린 마법은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었다. 황족의 머리카락이 필요하다는 건 결국 황제의 것을 찾아와야 한다는 말이나 같았는데, 그녀가 황제를 만날 일이 요원했기 때문이다.

사일런은 미렌에게 원한다면 시간이 흐르고 공작 위를 이어받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였지만…….

미렌은 아직 거기까지 욕심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서재 마법을 풀고 나서 그의 진실한 속뜻을 알게 된다면 몰라도.

“어쨌든, 귀한 자리를 열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 혼자 주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작은 보탬이 되었을 뿐이죠.”

영결식을 무사히 진행하기 위해 미렌은 에드가 공작 성의 이름으로 귀족들에게 모금을 진행했다. ‘에드가 공작가’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모금은 순조로웠다.

다만 특이했던 건, 가장 많은 지원을 한 게 황실이라는 점이었다.

전사자들의 경우 제국에서 직접 일일이 장례를 치러 주니 이러한 영결식에 황실이 참여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막대한 모금을 자원한 것이다.

미렌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성당 측으로부터 곧 영결식의 본식이 시작된다는 말이 전해져 왔다.

어째서 황실이 이런 개인적인 영결식에 기부를 한 건지는, 미렌이 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유가 예상이 갈 것도 같았으나…….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영결식의 시작과 함께 미렌과 더불어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올라오스와 로이아는 기사들이 모인 곳에 함께하기 위해 잠시 멀어졌다.

“…….”

영결식은 가장 먼저 묵념으로 시작됐다.

모든 이들이 고개를 숙이고 전쟁으로 죽어 간 생명들을 위로했다. 미렌과 로이아, 그리고 이올라오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묵념이 끝나자 대주교의 기도가 이어졌다.

“오늘 우리는 저물어 간 모든 영혼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모였습니다.”

모두가 눈을 내리깐 채 대주교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 때였다.

뒤에서 느릿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들지 않은 미렌은 어림짐작으로 누군가 늦게 도착했거니, 하고 생각했다.

터벅, 터벅.

걸음걸이는 일정하고도 차분했다. 많은 사람이 모인 덕분인지 뒤늦게 들어온 이의 움직임은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미렌은 들어온 이가 제 바로 뒤에 선 것을 느꼈다.

“당신의 용기와, 사랑과, 우리에게 안겨 준 희망에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모두가 대주교의 말에 귀를 기울인 덕분에 뒤에 선 이의 인기척이 유달리 크게 느껴졌다. 미렌은 직감적으로 제 뒤에 선 이의 키가 무척이나 크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어째서 그가 생각난 건지는 미렌도 알지 못했다. 조금 전 대주교의 기도가 시작되기 전까지 황실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어서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제 뒤에 선 이가 라이언이라고 생각하는 건, 무척이나 우스운 일이었다.

그는 황제이지 않은가.

그가 이런 사적인 자리에 올 이유 따위…… 조금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이날을 기억할 것입니다.”

기나긴 대주교의 기도가 끝이 났다. 그와 동시에 엄중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람들도 그제야 겨우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유족들의 고통 섞인 울음소리가 곳곳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건 그렌도 마찬가지였다. 의젓하게 자리를 지키고 서 있던 그렌마저도 참지 못하고 울었다.

제 볼을 씹어가며 눈물을 참던 미렌도 끝끝내 눈물 한 방울을 흘리고 말았다. 그녀가 오롯이 감내해야 할 슬픔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뒤에서 문득 손수건이 전해져 왔다.

고작 손수건 하나로 심장이 쿵 떨어져 내렸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손수건 때문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것을 쥔 사내의 투박하고 커다란 손이…… 미렌에게도 너무나 익숙하였으므로.

그녀는 아무 무늬도 없는 흰 손수건을 떨리는 손길로 받아 들었다. 상대는 미렌이 손수건을 받아 들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을 거둬 갔다.

그 뒤로도 영결식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미렌은 차마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영결식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성당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뒤에 있던 이도 마찬가지였다.

“누나?”

내도록 자신의 뒤를 지키고 있던 인기척이 사라지자 미렌은 그제야 뒤를 돌아봤다.

저 멀리, 그녀도 아는 익숙한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검고 깊은 페도라를 쓰고 있었다.

인파에 뒤섞여 나가는 그에게 지나가는 몇 명은 힐끗 눈길을 주기도 했다. 미렌은 그런 사내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내뻗었다.

“누나, 어디 가?”

“……!”

제 치맛자락을 잡아 오는 손길에 미렌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그렌이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렌에게 무어라 말할 새는 없었다. 미렌은 서둘러 잠시 놓쳤던 사내의 뒷모습을 보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커다랗고 어두운 사내의 뒷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미렌은 멍하니 사내가 나갔을 성당의 문만 바라봤다.

그와는 오늘,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고작해야 손수건을 받았을 따름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자꾸만 라이언과 기나긴 대화를 나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때때로 대화는 말보다도 그 관계에서 흘러간다. 미렌은 그것을 이제야 알았다.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의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