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친구 같은 거 없어요
이올라오스는 이미 공작 성 안으로 들어와 응접실에 있었다. 사일런의 안내로 미렌이 응접실에 갔을 때는 제복을 한껏 차려입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제복을 차려입었다는 건, 황성에서 바로 이곳으로 왔다는 의미기도 했다.
“오랜만입니다, 미렌…… 우드 님.”
이올라오스는 미렌을 부르기 앞서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를 ‘전하’라 불러야 할지, 아니면 공작 성에 있으니 ‘에드가’라 불러야 할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미렌도 그런 이올라오스의 기색을 알아차렸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잘 지내셨습니까? 무사히 수도로 올라오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제 소식이 벌써 경에게까지 닿았습니까?”
이올라오스의 말에 미렌은 문득 ‘그가 보고 들은 건 모두 황제에게 들어간다.’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자 속내를 알기라도 했는지 그가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부러 찾아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 어머니께서 우드 님에게 관심이 많으신 터라.”
“아아, 백작 부인께서는 잘 지내시고요?”
“물론입니다.”
이올라오스의 간결한 대답을 끝으로 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오갔다. 그사이를 틈타 사일런이 트레이에 차를 올려 돌아왔다.
둘 사이에 놓인 테이블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찻잔이 놓였다. 그것을 끝으로 사일런이 나가며 문이 탁, 닫히자 이올라오스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어 왔다.
“전하께선…… 돌아오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찻잔을 들고 그 끝을 둥글게 만지던 미렌은 이올라오스의 호칭이 ‘우드 님’에서 ‘전하’로 바뀌었다는 것을 예민하게 알아챘다.
다만 조금 전에도 그랬듯 그러한 부름에 대해 나무라지 않았다. 대신 눈을 내리깐 채 다른 말을 꺼내 들었다.
“돌아가다니요. 제가 어디로 돌아간단 말입니까?”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폐하께선 어째서 한낱 평민에 불과한 미렌 우드를 기다리신답니까?”
무어라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던 이올라오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미렌이 이토록 차갑게 말해 오는 이유가, 더는 ‘시한부 황후 미렌 에드가’로서 살고 싶지 않다는 말과도 같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미렌 에드가로선 살지 않으실 겁니까?”
“틀렸어요, 이올라오스 경.”
타각.
찻잔을 내려 둔 미렌은 제 앞에 앉은 이올라오스의 얼굴을 꼿꼿하게 직시했다.
“미렌 에드가로서가 아닙니다. 폐하의 오점, 시한부 황후로서 살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던 그와의 악연들은 뒤로하고서라도, 미렌은 이번 전쟁을 기점으로 깨달았다. 자신은 그와 함께하면 그림자가 되고 말리란 사실을.
만일 라이언이 ‘미렌’을 무시했더라면 전쟁은 그토록 어렵게 굴러가지 않았을 것이다. 황제인 그가 절벽에 뛰어드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미렌은 더 이상 그를 난폭한 주군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라이언은 라이언대로, 자신은 자신대로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게 옳았다.
“아시겠습니까?”
“……이해했습니다.”
어쩌면 이올라오스도 바라던 일일 터다. 그는 시한부 황후인 미렌 에드가를 그토록 싫어했으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미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시는, 같은 용무로 우드 님을 찾아오지 않겠습니다.”
“양해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대신 친구로서는 찾아오겠습니다.”
순간 이올라오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미렌이 눈만 깜빡거렸다.
눈이 마주친 이올라오스는 예의 다정한 웃음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입가에 유려한 호선이 그려졌다.
“미렌 님께서 ‘우드’와 ‘에드가’의 삶 모두를 선택하셨다면 우리는 여전히 친구지 않습니까?”
“……전부터 궁금했는데, 경에겐 대체 친구라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저와는 좀 다른 것 같아서요.”
미렌에게도 친구는 있었다. 물론 모두 성인이 되고 제 삶을 사느라 멀어지긴 했지만 한때 함께 산을 뛰놀던 친구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올라오스가 말하는 ‘친구’라는 단어를 듣고 있자면 어딘지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멀어 보였다.
미렌이 그 점을 짚자 이올라오스는 잠시 미간을 모으고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마침내 대답했다.
“서로 고민도 털어놓을 수 있고, 가끔 보고 싶기도 하고, 평생을 함께하는 게…… 친구 아닙니까?”
그건 배우자 아닌가요? 라고 물으려던 미렌이 입을 꾹 다물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이올라오스의 생각을 바꿔 줘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이올라오스 경.”
“말씀하십시오.”
“혹시…… 이제껏 친구가 단 한 번도 없으셨습니까?”
아주 어렸을 적부터 황제와 지냈다기에 라이언과는 친우일 줄 알았다. 그러나 이올라오스는 이미 그 사실을 부정한 적이 있었다.
그러면 그는 내도록 검술만 수련하고 황제를 호위하도록 커 왔으니 어쩌면…… 친구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그리고 이올라오스는 확신하듯 단호하게 말했다.
“없습니다.”
“단 한 명도요?”
“아니요, 없습니다.”
“검을 같이 수련했다든가…….”
“없다니까요.”
아, 네.
미렌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자신은 친구 같은 거 없다고 저토록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은 또 처음 보았다.
“제 친구는 우드 님이 유일합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
“……아니요, 제가 앞으로 친구 많이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습니다. 한 명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이올라오스는 이번에도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대답했다. 그가 오로지 친구가 하나뿐인 상태로 남는 건 오히려 미렌이 거절하고 싶었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올라오스 경? 대체 무엇을요?”
“평생 저와 친구하시기로 한 것, 아니었습니까?”
대체 언제?
미렌의 생각이 밖으로 튀어나오기도 전에 이올라오스가 대답을 가로챘다.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이올라오스는 아무래도 ‘친구’의 개념을 단단히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더한 문제는, 그가 그 개념을 고칠 생각이 없다는 점이었다.
***
동쪽 마탑에 가는 건 이올라오스의 늦은 방문으로 인해 다음 날로 미뤄졌다.
공작 성의 마차를 타고 동쪽 마탑으로 찾아온 미렌이 간결한 걸음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동쪽 마탑은 탑 외관에 가시덩굴이 칭칭 감긴, 마탑 중에서도 가장 쓸데없이 을씨년스럽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어느 마탑보다도 개인 활동 위주인 곳이라 더욱 그러했다.
다행히 마침 동쪽 마탑으로 들어가는 마법사 한 명이 있었다. 서둘러 그에게 다가간 미렌이 멜리크를 찾았다.
“저, 멜리크 씨를 찾아왔습니다. 지금 만나 뵐 수 있을까요?”
“걔 실험 중일 텐데.”
걔……? 동쪽 마탑은 원래 수평적인 구조로 서로를 대하나?
마탑주를 부르는 호칭이라기엔 심히 가벼운 단어에 미렌이 잠시 망설였을 때였다. 마법사는 흔쾌히 미렌을 멜리크에게 안내해 주겠노라 말했다.
“근데 너무 기대는 하지 마요. 실험 중엔 개도 안 건드리는 게 우리 마탑 규칙이거든.”
“아, 네…….”
“특히 멜리크는 좀 심해.”
동쪽 마탑의 조그만 쪽문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발밑이 조금 흔들리는가 싶더니, 미렌의 앞에는 기다란 문들이 나열된 복도가 나타났다.
“참고로 여긴 꼭대기니까, 함부로 뛰어내리진 말고.”
“저희 방금 입구로 걸어 들어왔지 않나요?”
“응? 아아. 우리 마탑은 입구에 마법이 걸려 있어요. 만약 허락도 없이 들어오면 지하 감옥이랑 연결되고.”
마법사의 안내는 가장 안쪽에 놓인 문까지였다. 문을 가볍게 두드린 마법사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자신은 훅 사라져 버렸다.
곧 문이 끼익, 하고 열리더니 발이나 겨우 들어갈 만큼 좁은 틈이 생겨났다. 깜깜한 안쪽에서 낮고 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아, 전 미렌 우드입니다. 예전에 에드가 공작 성에 마법을 걸어 준 사람을 찾고 있는데요.”
“……짜증 나게.”
다짜고짜 ‘짜증 난다’는 말부터 들은 미렌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나 멜리크는 말과는 달리 문을 조금 더 열어 주며 그녀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내주었다.
“네 아빠가 그때 돈만 덜 줬어도 안 열어 줬어.”
투덜투덜.
멜리크가 열어 준 문으로 한 걸음 들어선 미렌은 안쪽이 생각보다도 더 어둡단 것을 알았다. 멜리크는 이곳에서 겨우 촛불 몇 개만 켜 둔 채 지내고 있었다.
그녀가 어색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문득 멜리크가 촛불을 들고 얼굴을 훅 내밀어 왔다.
“왜 왔는데?”
그가 제 턱 바로 아래에 촛불을 둔 덕분에 미렌에게도 멜리크의 얼굴이 제법 자세히 보였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본 그의 얼굴이 생각보다 더…….
어렸다.
그러니까, 그렌 나이나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전에 제 아버지의 서재에 마법을 걸어 준 분이 멜리크 님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마법을 풀 수 있을까 해서요.”
“아아, 그거? ‘플루토’의 마법을 본뜬 거였지?”
살아 있는 생명체는 지날 수 없는 마법, 플루토. 고대 마법이기도 한 그것을 멜리크는 너무나도 쉽게 본떴다고 말했다.
“가능할까요?”
“응. 근데 좀 복잡해.”
“복잡하다면……?”
“일단 고대 마법이긴 해서 황실의 물건이 하나 필요해. 그 마법을 걸 당시에도 네 아빠가 필요한 물건을 준비해 줘서 할 수 있던 거거든.”
황성……?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미렌이 잠시 놀랐다.
그러고 보면 서재에 마법이 걸린 건 미렌도 몰랐던 일이니, 그녀가 라이언과 결혼을 하고 난 뒤였다. 아버지는 어쩌면 그때부터 유서를 준비하신 걸지도 몰랐다.
“무슨 물건인가요?”
“황족의 머리카락. 그때는 아마 미렌 에드가의 머리카락이었을걸.”
미렌 에드가, 정확히 말해 미렌 에드가 워로덴은 황제와의 결혼 이후로 황족이 되었다. 다만 혈연은 이어지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미렌 에드가의 머리카락도 된다고.
“피가 섞였든, 안 섞였든 황족이기만 하면 돼. 근데…… 지금은 황족이 황제밖에 없지 않나? 너무 먼 친척은 힘든데.”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없어. 아님 네가 황제랑 결혼이라도 하든가. 킬킬.”
멜리크는 그게 무슨 재미난 농담이라도 되는 양 웃었다. 역시 어딘가 불쾌한 사내였다.
“그것도 아니면…… 돈 더 낼래?”
“돈이요? 만약에 낸다면, 어떻게 해 주시는 겁니까?”
“뭐. 의뢰하면 황제의 머리카락 하나쯤은 베어 올 사람이 있지 않겠어?”
그 순간 미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라이언이 첩자로 인해 평생을 괴롭게 보냈다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런데 멜리크는 죽이러 가는 게 아니니 괜찮다며 웃어 댔다. 심기가 상한 미렌이 이를 꽉 깨물었다.
“폐하의 머리카락만 있으면 당신이 아니라도 괜찮겠죠. 이번 의뢰는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흥, 그러든가. 재수 없긴.”
미렌은 그쪽도 재수 없긴 마찬가지라며 쏘아붙이려다 관뒀다. 멜리크의 얼굴이 너무나 동안인 탓에 어린아이를 괴롭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밖을 향해 걸어가자 멜리크는 문득 중얼거렸다.
“근데 왜 화를 내고 그래? 결혼하라는 농담엔 화내 놓고 황제 하나 괴롭힌다니까 파르르 떠네.”
하여튼, 인간들 마음은 알 수가 없어.
오늘도 열심히 중얼거린 멜리크는 기쁜 마음으로 다시 실험에 들어갔다. 흘러내린 그의 로브 후드 안쪽으로 조그만 뿔이 언뜻 보인 것 같기도 했다.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