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폐하의 검
“사일런, 아니, 이곳의 집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에드가 공작 성에 도착한 미렌은 먼저 사일런을 찾았다. 사촌인 로렌트를 찾을 수도 있었지만, 일단 편지를 보낸 것은 그였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에 나온 이는 사일런이 아니라 어느 시종이었다. 그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옷을 입은 미렌과 그렌을 발견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집사님을요? 어떤 경위로 찾아오신 겁니까?”
“그러니까 편지를 받고…….”
“편지? 죄송합니다만 집사님은 개인적인 일로 공작 성에 찾아오라는 편지를 보내거나 하지 않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쌀쌀맞게 대답한 시종은 그대로 문을 닫으려 들었다. 그걸 겨우 막은 건 미렌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짐 가방에서 편지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편지 봉투 바깥에는 사일런의 것임이 확실한 인장마저 찍혀 있었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미렌과 편지를 훑어보던 시종은 겨우 그것을 받아 봉투를 열었다. 대충 내용을 확인하던 그가 대뜸 말했다.
“이게 집사님의 것인지 어떻게 확신합니까?”
“그런……. 인장이 찍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당신이 집사님의 인장을 멋대로 따라 했을지 어떻게 아냐는 겁니다.”
다짜고짜 의심부터 하는 태도에 발끈한 미렌이 겨우 화를 참을 때였다. 그의 뒤로 사일런이 나타났다.
“이게 무슨 짓인가, 에이든?”
“지…… 집사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내 손님이 방문했다더군. 자네, 설마 이제껏 이렇게 무례하게 손님을 맞이했던 건가?”
기가 죽어 손을 꼼지락거리는 에이든을 두고 사일런이 콧수염을 움찔거렸다. 사일런을 오래 봐 온 미렌은 그의 화가 끝까지 다다랐음을 이미 깨달은 터였다.
결국 미렌이 먼저 사일런에게 눈짓했다. 어차피 저 에이든이라 불린 시종은 미렌 남매의 행색이 누가 봐도 평민 같으니 무시한 것일 테니까.
“……에이든, 자네는 처음부터 다시 시종으로서의 예의를 배워야겠군. 방으로 돌아가 있게.”
교육을 처음부터 다시 받으라는 말에 에이든은 지레 겁을 먹은 듯했지만, 그것이 나름대로 선처임을 알기에 순순히 돌아갔다.
에이든을 보낸 뒤 미렌을 향해 돌아선 사일런이 누구보다 우아한 태도로 인사를 올렸다. 유구한 전통이 있는 가문의 집사다운 태도였다.
“잘 돌아오셨습니다, 아가씨.”
“사일런, 아가씨라니요.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하지만 이제 다시 아가씨가 아니십니까?”
사일런이 콧수염을 잘게 떨며 웃어 왔다. 미렌 에드가가 아닌 미렌 우드로서 만나게 됐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일런의 농담 같은 말에 미렌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녀가 에드가 황후가 되기 위해 라이언과 결혼을 할 때도 남몰래 눈물을 흘린 이였다.
“누나아, 누구예요?”
옆에서 조용히 서 있던 그렌이 미렌의 옷자락을 살짝 쥐고 흔들었다. 거대하다 못해 화려한 공작 성으로 올 때부터 기가 죽은 것 같더니,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사일런을 보고는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린 동생이었다.
미렌이 먼저 그렌에게 사일런을 소개시켜 주려 했을 때였다. 사일런은 문득 그렌의 앞에 무릎을 굽히더니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이분이 도련님이시군요?”
“저를 아세요?”
“미렌 님에게 들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저는 사일런, 앞으로 두 분을 모실 사람입니다.”
그렌은 아직 누군가 자신을 ‘모신다’는 행위가 낯선지 울먹이며 제 누나를 올려다봤다. 미렌이 낮게 웃으며 그런 동생을 달래었다.
사일런에게 제대로 된 상황을 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건만, 그는 아무래도 미렌의 상황을 모두 파악해 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소싯적에 가장 유능한 집사로 이름을 날렸던 사일런다웠다.
“사일런, 일단 안으로 들어갈까요? 먼저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아서요.”
“좋습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도련님.”
사일런은 일부러 아직 어린 그렌에게 특유의 푸근한 눈짓을 보냈다. 그가 어린아이들을 다룰 때면 하는 행동이었다.
사일런은 가장 먼저 미렌의 짐 가방을 대신 들고 트레이에 올렸다. 그다음, 길을 안내하며 조곤조곤 현재 상황을 전해 왔다.
“로렌트 님께선 현재 자세한 상황까지는 잘 모르십니다. 다만, 아마 무리 없이 아가씨께 모든 재산을 양도하실 겁니다.”
“로렌트는 아직도 욕심이 전혀 없던가요?”
“그럼요. 오히려 더 자유로워지겠다고 웃으셨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로렌트를 봐 온 미렌은 사일런의 말에 빠르게 납득했다. 아버지가 로렌트를 임시 상속자로 정하신 이유도 그래서였을 터다.
“그 이후부터는 모두 아가씨의 뜻을 따를 예정입니다. 미렌 에드가로 돌아오셔도, 지금처럼 이대로 사셔도 괜찮습니다.”
“만일 그로 인해 ‘에드가’ 가문이 무너진다 하더라도요?”
“다프네 님이 젊었을 때 제게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결혼을 하면 내 성을 버려야 한다니, 안타깝지 않나요?’ 하고요.”
잘 다듬어진 정원 길은 사일런이 끄는 트레이마저도 덜컹거리지 않았다. 그 모든 곳에는 사일런의 집요하고도 섬세한 손길이 닿아 있었다.
누구보다 유능한 집사는 자신이 이 모든 걸 가져도 될지 고민하는 미렌을 두고 이렇게 달래었다.
“다소 다른 예시일 순 있겠으나, 저는 미렌 님께서 어느 한쪽이라도 허투루 버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다프네 님의 유지기도 할 테니까요.”
“정말…… 사일런은 못 이기겠어요.”
“‘우드’라니. 저는 제 새로운 주인님의 성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답니다.”
사일런이 웃는 사이 어느새 그들은 공작 성의 현관 앞에 도착했다. 안에서 열어 준 문으로 들어가자 연락을 받고 시립해 있던 모든 시종들이 허리를 굽혀 인사해 왔다.
“어서 오십시오.”
그렌은 낯선 풍경에 누나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미렌은 오랜만에 받아 보는 황송한 대접에 어색하게 웃었다.
그 중심에는 사일런이 있었다.
***
“그럼 부탁할게요.”
“물론입니다, 미렌 님. 부디 이 노신이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해 주십시오.”
공작성의 집무실, 그 중심에 있는 걸상 앞에 앉은 미렌을 두고 사일런이 인자하게 웃었다. 언제나 에드가 공작이 자리를 지켰던 그곳에 이제는 미렌이 있었다.
그녀는 공작 위를 물려받은 이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에 생각보다도 더 잘 어울렸다. 어머니인 다프네의 인자하고 따뜻한 품성도 닮았겠지만, 아버지인 발리오딘의 현명하고 빠른 결단력도 닮은 터였다.
“일이 너무 많으면 제게 투정 부려도 좋답니다.”
“이런, 제가 나이는 많지만 아직 한창입니다.”
성성하게 세어 버린 사일런의 백발은 여전히 깔끔하게 넘겨져 있었다. 미렌은 그런 제 집사를 멀거니 바라보며 픽 웃었다.
그를 혹사시키고 싶지는 않았지만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먼저 사일런이 준비한 대로 미렌과 그렌은 에드가 공작가의 양자로 입적할 예정이었다.
거기다 동시에 전쟁으로 희생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위한 장례도 준비할 예정이었다. 미렌은 오늘 하루 내내 빠르게 서류를 정리해 냈다.
그 모든 일의 기초적인 서류가 정리되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낯선 환경에 놓인 그렌이 저녁도 안 먹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미렌은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아가씨, 그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루 종일 일 처리를 하느라 내내 사일런과 대화를 나누었던 미렌이 새삼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사일런은 어딘지 고민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돌아가신 공작 각하의 서재…… 말입니다.”
“서재요?”
현재 미렌이 있는 집무실의 바로 옆이 서재였다. 공작 성의 중요한 서류들이 모두 보관되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아가씨께서도 아시다시피, 서재에는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그렇죠. 마나가 있는 생명체, 즉 살아 있는 건 건드릴 수 없잖아요?”
그래서 미렌은 전에 헤겔과 왔을 때 속으로 ‘사람 차별 서재’라고 부르기도 했다. 물론 그게 ‘마나가 있는 생명체’를 가려내는 마법인 줄은 뒤늦게 알았지만.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가씨께서 어렸을 때 ‘아르테미스’를 복용한 적이 있다는 것은 오로지 공작 각하께서만 알고 계신 사실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사일런은 미렌 에드가가 사실 이미 아르테미스를 복용한 적이 있다는 것을 그녀가 죽고서야 알았다. 그것도 미렌 우드를 만나고 나서.
만약 사일런이나 다른 시종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미렌도 자신이 아르테미스를 복용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먹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지 못한 것은 모두 제 아버지가 그 사실을 숨겨서였다.
그런데 사일런은 지금 와서 그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그 말은 결국, 선대 공작께선 서재의 이용을 아가씨에게만 허락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
“아가씨가 아르테미스를 복용하셨다는 건 공작 각하께서만 알고 계셨고, 그 마법을 명령한 것도 각하셨으니까요.”
미렌이 작게 입을 벌렸다. 그러고 보면, 그렇다.
아버지는 ‘미렌이 아니면 공작 성의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다’는 유지를 남기기도 했다. 바꿔 말하자면 미렌에게 그 서재를 확인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저는 이제 미렌 에드가도 아니고, 아르테미스를 복용한 적도 없는 몸입니다. 제가 그 서재를 건드릴 수는 없어요.”
“아가씨, 제가 그 마법을 건 자를 알고 있습니다. 마법의 시전자를 찾아오면 아마 서재에 대한 실마리도 찾을 수 있으실 겁니다.”
“시전자요?”
“다프네 님에게 아스타로트의 마법을 걸어 준 자기도 했으며…… 현재는 동쪽 마탑의 주인인 ‘멜리크’라고 불리는 자입니다.”
익숙한 이름에 미렌이 눈을 크게 떴다. 멜리크. 어쩌면 그가 아버지의 의중에 대한 마지막 열쇠를 쥐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당장 동쪽 마탑으로 향하려고 했을 때였다.
똑똑.
“집사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사일런이 눈짓으로 미렌에게 양해를 구했다. 밖으로 나간 그가 시종과 나눈 대화는 미렌에게도 들렸다.
“손님? 로렌트 님이신가?”
“아니요……. 기사님이셨습니다. 이올라오스 트리온 경이라고.”
황제의 검, 이올라오스 트리온이 미렌을 찾아왔다.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