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127화 (127/133)

127화

바람과 소원의 차이

느릿한 발걸음으로 걸어가던 미렌은 어느 이름 없는 마을의 초입에 다다랐다. 아니, 그건 사실 마을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프레니티의 바로 옆 영지인 데저트까지 가는 길 사이에 놓인 그곳은, 헤겔이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킨 장소였다.

그곳엔 미렌의 동생인 그렌이 있었다.

스스스.

나무들이 바람결에 힘없이 흔들렸다. 미렌은 동생이 있는 곳으로 돌아감에도 어쩐지 그 걸음걸음이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저 멀리, 그렌의 모습이 보였다.

“누나!”

버려진 나뭇가지를 밟고 달려온 그렌은 이번에도 누나의 허리를 껴안았다. 다만 예전과 달리 미렌이 휘청거릴 정도로 힘을 싣지는 않은 터였다.

미렌은 그런 동생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흔적이 잔뜩 보이는 이곳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비록 이름조차 없는 마을이나 곳곳에서 사람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프레니티 영지에서 들려오던 누군가의 곡소리와는 달랐다.

“누나, 괜찮아?”

“……그럼, 괜찮지.”

“근데 헤겔 형은?”

품에 안긴 그렌이 고개를 휙휙 돌려 가며 헤겔을 찾았다.

위대한 남쪽의 마법사는 마을 사람들을 이곳에 데려다준 뒤, 미렌을 도우러 가겠다 말했었다. 또한 그렌에게 약속했다.

미렌을 데리고 무사히 돌아오겠노라고.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헤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렌이 미렌의 허리춤을 꼭 움켜쥐었다.

그때였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와 미렌에게 다가왔다.

“미렌, 무사했구나……!”

그렌의 물음에 대답할 새도 없이 미렌이 나서 이웃 어른의 인사를 받았다. 자신이 없는 동안 그렌을 돌봐 준 고마운 분들이었다.

“그렌을 돌봐 주셔서 감사했어요, 아주머니.”

“다행이다. 그렌이 네 걱정을 얼마나 했는지 몰라. 으응?”

잡화점 아주머니의 말에 미렌이 동생을 내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렌은 걱정을 한 게 부끄럽다는 듯 그녀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데 마법사님은?”

“……아.”

이번에도 물어 온 헤겔의 행방에 미렌은 턱,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프레니티를 도와준 위대한 마법사를 찾고 있었다. 전쟁으로 황폐해지고 버려진 마을 사람들을 직접 구해 준 이는 그 마법사밖에 없었다.

소식을 듣고 뒤늦게 달려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이와 부인을 데리고 서둘러 나온 사내가 고개를 휙휙 돌리며 헤겔을 찾았다.

“마법사님이 오셨다고?!”

“여보, 그게 아니라 미렌이 돌아왔다니까요?”

그 아이와 부인은 미렌도 아는 자들이었다.

딱 한 명, 아이의 열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아이를 안고 직접 의원을 찾아갔던 헤겔.

포로로 잡혀갔다던, 그 아이의 아버지 또한 이곳에 있었다. 그는 아직 몸이 성하지 않은지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미렌에게 달려왔다.

“마, 마법사님은 어디 계십니까?”

“…….”

“포로로 끌려갔던 절 이곳까지 마법으로 보내 주셨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보답을…….”

미렌의 고개가 아래로 숙여졌다.

투두둑.

그녀의 발치에 놓인 흙바닥이 점점이 젖어 갔다. 미렌은 입을 꾹 다문 채 소리 없이 울었다.

미렌이 울기 시작하자 헤겔이 구해 냈던 여자아이가 따라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울음소리에 당황한 부인이 서둘러 아이를 들어 달래었다.

그래도 울음소리는 그쳐지지 않았다. 미렌은 그 소리에 기대어 눈물을 토해 냈다.

미렌이 울기 시작한 순간 주변에 있던 모두가 헤겔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말았다. 잡화점 아주머니는 그런 미렌을 위로하려다 쓸쓸히 손을 거두었다.

대신 그녀를 안아 준 건 그렌이었다. 어느새 훌쩍 커 버린 동생은 미렌의 품에 안겨 말없이 함께 울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모인 이곳에선 모두가 무거운 마음으로 묵념에 잠겼다. 싸늘한 바람이 그들의 귓가를 훑고 지나갔다.

헤겔 카르너. 그가 남기고 간 것들이 이렇게도 많았다.

***

“누나, 우리는 어디로 가?”

미렌이 돌아오고 전쟁이 끝났음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씩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전쟁으로 많이 망가졌을 프레니티에 돌아간다 말했고, 또 어느 가족은 모두 함께 다른 영지로 이사를 간다고 말해 왔다.

그들은 꼭 오로지 헤겔과 미렌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던 듯, 모두가 이별을 고해 왔다. 임시로 모여 사는 건 여기까지였다.

사람들이 떠날 채비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그렌이 불안해진 것도 그래서였다. 아이는 미렌의 옷깃을 붙잡고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도 프레니티로 가?”

“……아니.”

프레니티 영주 성은 정리가 끝났지만 마을까지 모두 복구가 된 것은 아니었다. 아마 그곳을 복구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 터였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묘를 위해 곧 방문하긴 하겠지만, 그곳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었다. 미렌은 그렌의 뺨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수도로 갈 거야.”

“수도? 정말?!”

“그럼. 그렌, 수도에 가 보고 싶었어?”

“응! 다들 크면 수도로 갈 거라고 했단 말이야. 헤겔 형도, 가끔…….”

저도 모르게 헤겔의 이야기를 꺼내던 그렌이 슬쩍 누나의 눈치를 살폈다. 미렌은 다 안다는 듯 짧게 웃어 주기만 했다.

수도로 돌아가는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미렌은 미리 제 앞으로 와 있던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발신인은 사일런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꼭 한번 공작 성에 방문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 적힌 편지였다. 그것을 챙긴 미렌은 일단 수도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누나.”

“응?”

“나는 마법사가 될 거야! 그것도 엄청 대단한 마법사!”

헤겔의 이름이 나온 뒤부터 미렌의 분위기가 축 처지는 것 같자 그렌이 부러 밝게 말했다. 아이는 어느새 미렌의 감정마저 배려할 정도로 커 있었다.

그런 그렌을 꼭 껴안아 준 미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 미렌을 톡톡 건드려 온 것은.

“누가…… 리키?”

“헤헤, 미렌 님. 잘 지내셨어요?”

놀랍게도 그곳엔 리키가 있었다. 눈이 퉁퉁 붓다 못해 얼굴이 엉망이 되어 버린 리키가.

행색도 그다지 좋다 말할 수준이 아니었다. 리키는 아무래도 전반적인 정리가 끝난 뒤 급하게 미렌을 찾아온 듯 머리칼에는 나뭇잎 하나마저도 붙어 있었다.

미렌이 그런 리키의 머리로부터 나뭇잎을 떼어 주었다. 리키는 그 다정한 손길에 한 번 더 울컥한 듯했지만, 꾹 눈물을 참아 냈다.

“리키 씨는…… 아니, 우리 둘 다 그렇게 잘 지내진 못한 모양이네요.”

미렌의 한마디에 리키는 결국 와앙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처럼 팔뚝을 들어 몇 번이고 얼굴을 닦아 내던 리키가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탑, 으흑, 탑주님이요……. 탑주님이 너무 보고 싶어요…….”

아이처럼 솔직하게 우는 리키를 보고 미렌의 마음 또한 저려 왔다. 그런 리키를 달래 주려 손을 뻗던 미렌은 씁쓸한 얼굴로 그 손을 거두었다.

대신 그렌이 달려가 리키를 안아 줬다.

“헤겔 형은 돌아올 거예요!”

“흐으……. 정말……?”

“마법사잖아요! 마법처럼 돌아올 거예요! 내가 마법사가 되면 꼭 마법을 가르쳐 준다고 했단 말이에요!”

그렌은 죽음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이미 울고 있는 리키를 따라 뚝뚝 눈물을 흘렸다. 리키는 또 그런 그렌이 고마워 얼싸안고 울었다.

한참을 울던 리키가 눈물을 거둔 것은 시간이 제법 흐른 뒤였다. 눈이 퉁퉁 부은 리키가 콧물을 훌쩍이며 말했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탑주님이 미렌 님을 도와주라고 했었어요.”

“저를요?”

“자기는 아마도 바빠서 못 올 거래요. 치, 사실은 하나도 안 바쁘면서.”

리키가 투덜거렸다. 아마도 헤겔은 전쟁이 끝나고 나면 미렌이 떠날 줄 안 모양이었다.

그녀는 늘 헤겔의 마음을 거절해 왔으니까, 언젠가는 황제에게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똑똑한 헤겔이라면 아마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그 사내는, 매번 이런 식으로 미렌을 사랑했다.

누구보다 똑똑하고…… 현명한 방식으로.

“우리는 에드가 공작 성으로 찾아갈 예정입니다.”

“에드가 공작 성이요? 훌쩍, 이동 마법은 제 전문이잖아요. 미렌 님 개인 마차가 되어 드리죠!”

리키는 어두웠던 것도 언제였냐는 듯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 리키와 그렌은 친한 친구처럼 손을 꼭 맞잡은 채였다. 그리고 그렌의 반대편 손은 미렌의 옷자락에 닿아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리키가 가볍게 박수를 쳤다. 입술 사이로 무어라 마법을 위한 영창을 한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렌과 미렌이 두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수도 한복판이었다.

“에드가 공작 성은 좌표가 따로 없어서 일단 가장 가까운 곳으로 이동했어요. 어때요? 저 실력 좋죠!”

“멀미도 안 나고…… 정말 실력 좋으신데요.”

“응, 형아 대단하다!”

연이은 칭찬에 리키의 어깨가 한껏 올라갔다. 물론 눈이 잔뜩 부어 우스운 꼴이긴 했지만 리키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그렌의 양손을 마주 잡고 방방 뛰었다.

“미렌 님, 그럼 또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불러 주세요. 언제든지요!”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어요. 이번 도움만으로도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니요, 탑주님이 원하던 일인걸요! 그렇게 하게 해 주세요.”

씩 웃으며 말을 마친 리키는 뒤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렌이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떴을 땐 그의 신형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그렌도 그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바라봤다.

“누나, 저런 게 마법사야?”

“응. 정말 멋있지?”

“나도 마법사 될래!”

웃으며 그렌의 머리를 매만져 준 미렌은 동생의 손을 잡고 에드가 공작 성을 향해 갔다. 리키가 향해 간 방향과는 정반대였다.

리키는 언제든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자신을 부르라 말했지만, 다시는 그럴 일이 없었다.

불쌍한 리키.

한때 그런 별명을 가졌던 사내는, 이날을 기점으로…… 제국에서 소식조차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모두가 그를 ‘사라진 리키’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의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