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별과 별 사이
“폐하, 프레니티 영주 성의 정리가 모두 끝났습니다.”
영주의 침실로 보이는 드넓은 공간에서 침대에 누운 이가 한 명 있었다.
사내는 그 옆에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누운 이의 얼굴만 멀거니 바라봤다. 또 다른 사내가 방 안에 들어와 보고를 올릴 때도 그러했다.
“이올라오스.”
“예, 폐하.”
“미렌이…… 자신을 직접 황후라 밝혔었다고.”
이미 슬슬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볕이 잘 드는 창문가로부터 햇빛이 흘러들어 왔다.
그 덕에 미렌의 뺨이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라이언의 뒤에 시립한 이올라오스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감히 훔쳐봤다.
“그렇습니다, 폐하. 전하께선 직접 베르디움 공작의 시선을 끌고 종횡무진 하셨습니다.”
기실, 프레니티 영주 성의 정리는 며칠 전에 이미 끝이 났다. 이미 프레니티에는 새로운 영주가 부임할 것이기에 정리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황제는 여전히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미렌 우드, 그녀가 아직도 일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퓨커스가 매일같이 미렌의 몸을 치유하고 있지만 눈에 띄는 차도가 없었다.
그 탓에 황제는 차마 그녀를 황성으로 데려가지도, 그렇다고 자신 혼자 돌아가지도 못했다. 미렌 우드는 공식적으로 ‘평민’이었으니 호사가들의 눈에 띄었다간 별 소문이 다 날 터였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제게 자신은 여전히 ‘미렌 우드’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눈을 내리깐 이올라오스는 덤덤하게 사실을 보고했다. 미렌 우드는 분명 자신을 황후라고 밝히기도 하였으나, 또한 미렌 우드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올라오스의 말에 황제가 침대 위 시트를 꾹 움켜쥐었다.
이올라오스도 기민한 눈치로 그것을 알았다. 다만 제 말을 번복하지는 않았다.
제 한마디로 하여금 황제가 고통스러워할 것을 알았다. 그녀가 미렌 우드로 살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알 때마다 그는 아마 괴로울 것이다.
그녀를 놓아주는 방법 따위, 그는 배워 본 적이 없을 테니까.
“미렌 우드의 부모가…… 전쟁 중에 목숨을 잃었다고.”
“예, 폐하.”
“그녀를 돕던 헤겔 카르너의 시신조차 찾을 수 없고.”
“그렇습니다.”
툭.
시트 자락을 움켜쥐던 라이언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침대 위를 기어 미렌의 손을 겨우 붙잡았다.
이윽고 그가 미렌의 손등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젖은 숨이 흘러나왔다.
눈을 뜨고 나면, 미렌 또한 라이언을 원망할 터다.
그는 자신의 이런 질 낮은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매번 숨겨 대기 바빴다.
미렌에게만큼은, 제 아내에게만큼은 언제나 눈부신 성군이자 다정한 남편으로 남기를 바랐다. 모두가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니까.
그게 미렌을 속이는 행위라는 것을 앎에도 그러했다. 한번 저지른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가리고자 몇 번이고 반복됐다.
“폐하께서는, 전하가 밉지도 않으십니까? 건강한 삶이 있음에도 알리지 않으셨습니다. 감히 폐하를…… 기만하신 겁니다.”
“기만?”
라이언은 이올라오스의 한마디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손등에서 이마를 떼어 낸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올라오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먼저 미렌을 속였다.”
“그건……! 상황이, 정치적인 상황이 그러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모든 걸 아셨다간 폐하를 두려워하셨을 겁니다.”
“미렌 우드의 부모는 테룬 공국의 출신이었다지. 그녀에게 테룬 공국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던 건 나였어.”
미렌이 자꾸만 헤겔 카르너를 찾아 댄 것도 이제야 이해가 갔다. 이러니까, 자신이 먼저 그녀를 속여 대니까 미렌도 저를 믿지 못한 것이다.
헤겔 카르너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당신이 제 어떤 모습이든 사랑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어 비밀이 생겨났다고. 전하께서도 같은 이유에서 숨긴다는 생각은 못 해 보셨냐는 말입니다.’
아아.
그때의 자신이 그 똑똑한 마법사의 눈에는 얼마나 멍청해 보였겠는가.
그런 주제에 자신은 알량한 질투심에 눈이 멀어 애꿎은 미렌만 원망했다. 먼저 속인 것은 저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였다.
“미렌 우드가 내게 그러더군.”
“…….”
“복숭아나 키우며 살고 싶다고.”
황성이 얼마나 진창이었는지, 라이언은 그만 까맣게 잊고 살았다.
너무 오랫동안 그곳에 갇혀 지냈던 그는 황성이 누군가에겐 지옥과도 같을 수 있단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 시종, 기사들이 몇 명이고 죽어 나갔던 곳이다.
자신은 이제 아무렇지 않았다. 누군가 그의 목숨을 노리는 것은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해서, 미렌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어찌도 그리 멍청했는지.
복숭아나 키우며 살아온 미렌 우드에겐 그 황성이 얼마나 지옥 같았을까. 하물며 건강하지도 못한 몸으로 사는 것은 또 얼마나…….
죽고 싶었을까.
이올라오스로부터 눈을 떼어 낸 라이언은 다시금 미렌의 눈 감은 얼굴만 바라봤다. 생기 있는 그녀의 얼굴이 그의 눈엔 그렇게도 아름다워 보였다.
그 얼굴을 앞에 두고 라이언은 숨죽여 울었다.
딱딱하게 굳은 라이언의 면면에서는 오로지 깊은 눈물만이 흘러내렸다. 얼굴이 구겨지는 일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이윽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에서 시립하고 있던 이올라오스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말없이 고개를 숙여 왔다.
라이언이 낮게 읊조렸다.
“황성으로…… 돌아간다.”
그 한마디만을 남긴 채 라이언은 침실을 떠났다. 누워 있는 미렌 우드를 다시 뒤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미처 따라가지 못한 이올라오스만이 홀로 침실에 남아 잠든 그녀를 조금 더 바라봤다. 이윽고, 이올라오스조차 침실을 떠나갔다.
저무는 황혼 너머로 침실의 커튼이 느리게 흩날렸다.
***
미렌은 사실 자신의 어머니, 다프네 에드가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미렌 우드의 어머니와 아버지, 하다못해 미렌 에드가의 아버지인 발리오딘마저도 얼굴을 기억하건만 그 한 분만은 얼굴을 잘 몰랐다.
어머니인 다프네 에드가는 미렌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죽었고, 시간이 흘러 사진과 초상화로 본 게 전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꿈이란 것을 알았다.
‘엄마?’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었지만 그녀의 머리 색과 눈동자는 미렌 에드가와 꼭 닮아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따스하게 웃는 여인의 모습에 미렌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미렌.’
‘정말 엄마예요?’
미렌이 그렇게 묻자 다프네는 쓸쓸한 얼굴로 그저 고개만 저었다. 그녀는 분명 엄마가 아니라고 하는데, 미렌은 이상하게 자꾸만 확신이 들었다.
‘아닌데, 엄마가 맞는데…….’
초상화로만 보았던 어머니의 얼굴은 말랐지만 몹시도 아름다우셨다. 그러나 이곳에서 직접 얼굴을 보고 그린 초상화마저도 그 미모를 제대로 표현해 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미렌이 서운한 얼굴로 중얼거릴 때였다. 다프네는 다가와 그녀를 안아 주며 속삭였다.
‘엄마가……미안해.’
‘엄마, 맞죠? 세상에서 제일 예뻤던 우리 엄마잖아요.’
‘그저 내 아이라는 생각에 너를 포기하지 못했단다. 그때 내가 널 보내 주었다면…… 너는 더 좋은 부모의 아이로 태어났을 텐데.’
가령, 미렌 우드의 부모님처럼.
사랑에 굶주려 지냈던 미렌 에드가 대신 미렌 우드는 충분한 애정으로 키워졌다. 그녀가 두 몸에도 흔들림 없이 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아마 그 두 분 덕분이 크리라.
하지만 미렌은 자신의 어머니인 다프네가 밉지 않았다.
다프네 에드가 또한 미렌 에드가와 마찬가지로 평생을 건강하지 못하게 살았다. 시한부라는 소리까지 듣진 않았으나,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해 달리는 것조차 힘들었다고 들었다.
그런 몸으로 미렌을 잉태하고 낳았다.
약한 몸에도 정신만큼은 누구보다 단단하고 강해서…… 미렌을 포기하지 않았다, 제 어머니는.
‘아니요, 엄마.’
‘미렌?’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를 껴안은 미렌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자신도 두 분을 사랑하였으니, 그것으로 되었다고.
그러자 다프네가 가냘픈 얼굴로 살풋 웃어 주었다.
‘엄마는 미렌이 행복했으면 좋겠단다.’
‘지금도 행복한걸요.’
‘네가 미렌 에드가로 살지 않아도, 우리는 행복할 거란다.’
‘우리요?’
거기까지 말한 다프네가 문득 미렌으로부터 몸을 떼어 냈다. 다프네는 고개를 돌려 저 멀리를 바라봤다.
그 시선의 끝에는 미렌도 아는 사내의 쓸쓸한 뒷모습이 있었다. 미렌에겐 언제나 뒷모습만을 보여 주었던 이였다.
자신의 아버지. 발리오딘 에드가.
‘그러니까 미렌.’
미렌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 순간 어머니가 멀어져 가고 있었다.
아무리 쫓아가도 거리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다프네는 그런 미렌을 두고 가며 속삭였다.
‘늘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어머니는 어느 순간 아버지의 곁에 계셨다. 아버지는 끝끝내 미렌에겐 얼굴을 보여 주지 않고 떠나갔다.
미렌은 두 분을 따라 끝없는 길을 달려갔다. 그리고 조금씩…….
정신이 아득히 멀어졌다.
…….
…….
“읏……!”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난 미렌이 밀려오는 흉통에 제 가슴팍을 짚었다.
고통으로 인해 현실이 조금 더 빠르게 와 닿았다. 주변을 둘러봤을 땐 이미 어둠이 짙게 내려온 뒤였다.
침대에서 내려선 그녀는 제 몸 상태도 잊고 라이언을 찾아 달렸다.
마지막 기억의 끝, 그곳에선 라이언이 자신을 따라 절벽을 뛰어내리고 있었다. 자신이 살았다는 건 그 또한 무사하다는 의미겠지만, 그래도.
걱정스러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고요한 영주 성의 복도로 나갔을 때였다. 그곳에서 미렌은 오퓨커스와 마주쳤다.
“……전하?”
눈을 크게 뜬 오퓨커스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서둘러 다가왔다. 오퓨커스가 미렌의 몸을 진찰하려 들자 미렌이 먼저 물었다.
“폐하께선, 괜찮으십니까?”
“일주일 만에 겨우 일어나셔선, 겨우 찾는 분이 폐하십니까? 다시 침대로 돌아가세요, 어서!”
오퓨커스가 미렌의 어깨를 감싸고 침실로 돌아갔다. 미렌은 아무도 없는 영주 성 복도를 힐끗거리면서도 순순히 그녀를 따랐다.
미렌이 다시금 침대에 앉자 오퓨커스는 마침 가져온 약을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러며 단호하게 말했다.
“폐하께선 황성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황성, 말입니까……?”
나를 두고서.
언뜻 스쳐 지나간 생각이었으나 뒷말은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이제 라이언이 그녀를 데리고 황성으로 가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괜한 오해는 마시고요. 이제 두 분이 서로를 오해해서 엇갈리는 건, 그만 보고 싶거든요?”
오퓨커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미렌을 진찰하기 시작한 뒤로 황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던 그녀로서는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그분은 전하……, 아니, 우드 님이 평민으로 살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으세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속이셨잖아요, 본인이 미렌 우드라고.”
오퓨커스는 담담하게 정곡을 찔렀다. 그러나 그 또한 그저 사실을 말하기 위했을 뿐이지, 오해를 키우고 싶어서는 아니었던 듯 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사과하세요. 그리고 오해를 푸시고요.”
“……어째서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겁니까?”
“첫 번째는 두 분이 이제 서로 오해하는 걸 그만 보고 싶어서고, 두 번째는.”
오퓨커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두 분을 살리기 위해 죽어 버린 제 친우, 헤겔 카르너가 그러길 바랐을 테니까요.”
죽어 버린, 헤겔 카르너.
그 두 마디가 미렌에겐 별과 별 사이처럼 머나먼 단어로 느껴졌다.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았다. 헤겔 카르너가 죽어 버렸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