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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125화 (125/133)

125화

사자의 바람

미렌.

그녀와 가장 처음 만났던 날.

‘안녕, 라이언.’

황위를 위해 살아온 라이언은 제 어머니를 제외하고 자신을 그렇게 부른 이를 처음 보았다. 모두가 황자라며 그를 모셨기 때문이다.

선황 폐하셨던 아버지는 어린 라이언에게 멀게만 느껴졌고, 연로한 어머니는 해가 지날수록 몸과 마음이 약해져 갔다.

그때 만난 이가 미렌이었다.

‘미렌, 내가 누군지 알아?’

‘아니. 당연히 모르지. 말해 준 적이 없잖아.’

어린 라이언은 아주 잠시 자신이 황자라고 밝힐까 고민했다. 그러지 않은 것은, 모종삽으로 바닥이나 푹푹 찌르던 미렌이 중얼거린 까닭이었다.

‘그런 건 별로 안 중요해.’

‘……왜?’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누구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대. 그냥 그 사람이 좋으면 좋은 거래.’

‘그냥?’

‘응, 그냥.’

그 말이 라이언에게는 꼭 황자든 뭐든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럴수록 라이언은 미렌에 대한 호기심이 커져 갔다.

미렌과 함께 쪼그려 앉아 있던 그가 한 걸음 더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다만 미렌은 잘 파지지도 않는 땅만 파느라 신경도 쓰지 않은 채였다.

‘그냥 좋다…….’

‘우리 엄마도 아빠가 그냥 좋았대.’

그냥.

라이언은 홀로 한 번 더 그 단어를 중얼거렸다. 이유는 몰라도 그냥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좋았다.

그래서였다.

미렌을 그냥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라이언은 그날 이후로 ‘미렌’이라는 여자아이를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암투로 어머니가 돌아가시며 선황 폐하 또한 급사를 하셨고, 모든 상황이 어린 라이언에게는 불리하게 돌아갔다.

황성 밖을 멋대로 나돌아 다닐 정도로 밝았던 아이가 점차 웃음을 잃어버리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저하, 에드가 공작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부디 언동 하나도 조심, 또 조심하소서.’

‘황자 저하, 앞으로는 황성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하셔야 합니다.’

해가 지날수록 황성의 모든 것은 라이언의 온몸을 조여 왔다.

제 음식을 맛본 시종 중 한 명이 달에 한 번은 죽어 나갔으며, 잠을 잘 때도 창문을 뚫고 들어온 첩자가 해마다 스물이 넘어갔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아니, 그렇게 버텼다.

시간이 흐를수록 라이언은 제 주변 사람이 죽는 일에 대해 무감각해졌다. 침실로 들어온 첩자는 직접 검을 들어 베어 죽이기도 했다.

그의 나이 고작 열셋이었다.

라이언은 열셋의 나이에 웃음을 완전히 잃었다. 그가 폐하라고 불리기 시작했던 때이기도 했다.

황제가 된 뒤 라이언은 제국을 좀먹고 자신을 위협하던 세력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의 라이언을 모시던 대신들은 하나같이 그를 두려워하기 바빴다.

어느 날 라이언은 자신을 지키는 이올라오스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올라오스.’

‘폐하, 부르셨습니까?’

‘내가 그리 두려운가?’

그 물음에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이올라오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봤다. 한없이 어리고 작았던 황제는 그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황좌에 앉아 있었다.

만인지상의 자리.

누구보다 고귀한 황위.

그곳에 앉은 어린 황제를 두고 이올라오스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폐하, 황위란……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

‘모두가 칭송하고 떠받들지만 때때로 힘든 시기가 찾아오면 사람들은 원망할 곳을 필요로 합니다. 황위란, 그런 자리입니다.’

‘아아. 원망……. 그러한가.’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그저 모두는 힘들기에 당신을 원망할 뿐이다.

충직한 기사 이올라오스는 그렇게 대답했다. 좋은 대답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라이언이 다시 물어 왔다.

‘나를, 두려워하지 않을 이는 없을까.’

모순적인 질문이었다.

그의 손길 한 번에 사람이 죽어 나갔다. 그것은 비단 라이언의 문제가 아니라 이 제국이 처한 정치적 상황이 그러했다.

또한, 황제가 아직 어린 지금은 차라리 모두가 그를 두려워하는 게 나았다. 황제를 무시하며 허수아비처럼 여기는 것보다는.

그러나 이올라오스는 그렇게 대답하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며 얼핏 바라본 황제의 얼굴이 너무도 외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이올라오스가 침묵하자 라이언과 그 사이로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그것을 깨트린 건 황제였다.

‘결혼을…… 해야겠다.’

‘예? 누구와 말입니까?’

‘에드가 공작에게 딸이 하나 있었지. 그녀와 결혼을 할 것이다.’

‘폐하! 에드가 공작은……!’

이올라오스의 반대에도 라이언은 더 들어 주지 않았다. 성큼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황좌를 떠나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올라오스 또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가 뒤따라가며 다시금 물었다.

‘어째서 미렌 에드가입니까? 여자가 필요한 것이라면…….’

‘그냥.’

‘예……?’

‘그냥, 좋아서.’

황제는 수수께끼 같은 말만 남긴 채 그곳을 떠나갔다.

그날 이후. 제국에선 황가와 에드가 공작가의 성혼이라는, 누구도 예상 못 할 결혼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냥.

그냥, 좋아서.

라이언은 미렌이 그냥 좋았다.

***

푸른 강 속은 밖에서 보이던 것과 달리 내부가 어둡다 못해 새까맸다. 그곳에서 라이언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미렌을 찾아 헤맸다.

이대로 더 깊이 들어갔다간 자신도 헤엄쳐 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그런 이성적인 생각까진 하지 못했다.

그저 미렌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꿋꿋이 숨을 참은 라이언이 고개를 돌려 강 속을 헤매었다.

그 순간 그의 두 눈으로 누군가의 긴 머리가 하늘거리는 게 보였다. 라이언은 그때부터 깊이, 더 깊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겨우 미렌에게 다가간 라이언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물속에서 안아 든 미렌의 몸이 한없이 가냘프면서도, 또 자신이 알던 제 아내의 몸과는 달리 건강하단 사실에 깊은 안도감이 들었다. 라이언은 그대로 저 멀리 수면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미렌이 건강해지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불쌍한 제 아내가 평생을 침대에 누워 지내다 간 걸까 봐, 몇 번이나 악몽에서 헤매다 깨어났던가.

라이언은 미렌을 놓치지 않도록 몇 번이고 단단히 다잡았다.

헤겔 카르너에게 빌었던 소원대로, 그녀는 행복하게…… 누구보다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야 했다. 그게 라이언이 바라는 유일한 소원이었다.

첨벙…….

수면 위를 빠져나온 라이언이 주변을 둘러보자 저 멀리 절벽 위에 선 이올라오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곳에서 무릎 꿇은 그가 절박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곁에는 뒤늦게 따라온 오퓨커스와 알페카, 멜리크 또한 보였다. 그들이 빠져나온 라이언과 미렌을 발견한 순간 마법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라이언은 곧 눈을 내려 제 품에서 정신을 잃은 미렌을 바라봤다.

“미렌.”

이윽고 라이언과 미렌의 몸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탑주들의 마법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미렌이 제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금 더 힘을 주어 껴안았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미안해.”

이번에도 당신을 놓아주지 못해서.

아마 그녀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을 터다. 라이언이 미렌을 위해 목숨을 바쳐 가며 살려 내는 모습은, 그녀가 가장 바라지 않은 광경이었을 테니까.

그래서 라이언은 이번에도 제 마음을 고백하는 대신 미안하단 한마디만 하고 말았다.

왜 자신을 살려 냈냐고, 그렇게 원망해 오면, 그는 아마 또다시 그저 그런 사과밖에 전하지 못할 것이다.

라이언이 눈을 한번 깜빡였다 떴을 땐 어느새 다시 절벽 위였다. 오퓨커스가 기다렸다는 듯 라이언에게 다가와 품속의 미렌을 진찰하기 시작했다.

“폐하, 전하를 잠시 내려 둘 수 있으십니까?”

안 그래도 상태가 좋지 않았던 미렌이 물까지 먹자 오퓨커스가 초조하게 물어 왔다. 황제 또한 그녀를 걱정하느라 불안하고 초조한 상태일 것을 알지만, 상황이 위급했다.

그러나 라이언은 생각보다도 더 순순히 물러났다. 바닥에 그녀를 내려 둔 라이언은 가만히 미렌의 얼굴만 바라봤다.

시립한 이올라오스가 다가와 라이언의 상태를 걱정했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했다. 라이언은 오로지 미렌밖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깨어날 수 있을까.”

“예, 폐하. 전하의 마법이 분명 뒤집혀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이제는 바로잡혀 있습니다. 아마 온전히 치료만 받으신다면 곧 깨어나실 겁니다.”

“그래…… 다행이군.”

미렌이 깨어날 수 있다는 말에 라이언은 살풋 웃었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의 눈치를 살피던 오퓨커스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평소의 건강 상태가 좋아 다행이었습니다. 아마 그렇지 않았더라면…….”

“미렌 에드가의 몸이었다면, 버티지 못했겠지.”

라이언이 씁쓸하게 읊조렸다. 죽어 가던 미렌 에드가와 달리 건강하디 건강한 미렌 우드.

이제야 시한부 황후라 불렸던 그녀가 삶에 여한이 없는 것처럼 굴던 이유를 알았다.

아마도 미렌은, 보다 건강하고 행복했던 미렌 우드의 삶이 조금 더 중요했던 것이리라.

라이언은 바닥에 누운 미렌의 옆에 조심히 앉았다. 그리고 큰 손으로 미렌의 이마와 눈가를 덮어 주며 속삭였다.

“이제 나는 되었어.”

그는 제 자신에게 약속했다.

만약 눈을 뜬 미렌이 그저 자신은 평민으로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다고, 놓아 달라고 말한다면…….

그때는 당신을 놓아주겠노라고.

당신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래.

“미렌, 나는 이걸로 만족할게.”

라이언의 온 뺨이 젖어 들어갔다. 이제는…… 놓아주어야 할 때였다.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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