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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124화 (124/133)

124화

깊은 잠에 들 시간

달아나는 미렌의 곁으로 나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마법이 발휘되지 않는 범위가 얼마인지 모르기에 미렌은 그저 국경을 따라 달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멀어졌다간 공작의 마법사가 마법으로 추격해 올지도 몰랐다.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의 시간을 벌 뿐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아 다리는 자꾸만 넘어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뒤돌아봤다간 공작과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 돌아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곧 미렌의 눈앞에 절망스러운 전경이 펼쳐졌다.

울창한 나무숲을 지나 거대한 강이 나온 것이다.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이 드넓은 강은 바다로 이어졌다.

더 도망칠 곳이라곤 없었다.

그녀가 뒤돌아 공작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선 말을 타고 쫓아오던 공작이 칼을 빼든 채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길로 달렸기에 말을 탄 공작을 피해 도망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망망대해와 같은 강을 넘어갈 방법이 그녀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속도를 늦춘 공작이 미렌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다리라도 잘라야 도망치지 않을 셈인가 보군.”

“……나를 데리고 도망치면, 폐하께서 당신을 놓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야 당연하지 않나.”

타악…….

말에서 내린 공작이 미렌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주변으로 이미 전에 보았던 마법사도 단검을 빼든 채 다가오고 있었다.

“황제는 널 사랑하고 있으니까.”

“…….”

“그 사랑이, 그의 목을 조일 거란다.”

황제의 사랑은, 그저 독밖에 되지 못했다.

그는 미렌을 사랑하기 위해서 제 어미를 죽인 원수를 놓아주어야만 했다.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대신들의 모든 반대를 뒤집어써야만 했다.

지금도 그렇다.

이 광경을 라이언이 목격하고 만다면, 그는 아마 검을 내버릴 것이다. 고작 미렌이 그의 손에 잡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그런 사내였다.

오로지 맹목적으로 사랑할 줄밖에 모르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의 사랑이 그 자신의 목을 조인다면, 그건 사랑이라고 불러선 안 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 독이었다.

“차라리 죽겠습니다.”

“뭐……?”

투두둑.

미렌은 제 뒤로 한 걸음 내뻗었다. 그러자 그녀의 발치를 타고 주변에 있던 흙과 돌 부스러기들이 강으로 떨어져 내렸다.

공작의 눈이 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가 서둘러 미렌을 향해 다가왔다.

이대로 그녀가 죽었다간 계획이 무너졌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공작을 황제가 용서할 리가 없었다.

“베르디움 공작.”

그녀는 마지막 한 걸음을 뒤로 더 뻗었다. 절벽을 타고 내려가기 전, 미렌은 공작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부디 지옥에 떨어지길.”

다가온 그는 미렌의 옷깃조차 잡지 못하고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빠르게 절벽 아래로 추락하며 얼이 빠진 공작의 얼굴을 끝까지 바라봤다.

그 순간이었다.

“미렌?!”

누군가의 사자후가 이 공간을 뒤흔들었다. 떨어지는 미렌의 시야로 공작이 아닌 다른 이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라이언.

그가 자신을 찾아 이곳까지 달려왔다.

이상한 사람.

정말…… 이상한 사람.

그 죽어 가는 황후가 무엇이 좋다고, 이렇게 나를 찾아 여기까지 달려왔나.

당신이 나를 찾아 달려오지 않았다면 공작 또한 도망칠 방법도 찾지 못했을 텐데.

당신은 그걸 알면서도…… 이곳까지 나를 위해 달려왔을까.

나는 당신을 속였다.

당신의 오점으로 남고 싶지 않아서, 나 또한 당신에게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래서 당신을 속였다.

‘아마 나는 이렇게 되리란 걸 알았어도 그 사람을 좋아하고 말았을 테지.’

그런데 당신은 이 비겁한 아내마저 사랑했어.

지금도 그렇다. 이젠 내가 당신을 속였다는 걸 알았을 텐데도 저토록 간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어두워졌다. 깊은 강 속으로 침잠하듯, 미렌의 의식 또한 점차 멀어져 갔다.

이번에도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당신을 사랑하노라고…….

***

알페카의 마법으로 라이언은 곧장 이올라오스와 합류했다. 이올라오스는 이미 공작의 뒤를 쫓아 달리고 있던 터였다.

미렌이 사라졌다는 걸 안 순간부터 라이언은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때때로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말에 타고 공작의 흔적을 쫓아 달릴 때도 미렌이 죽어 가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을 뒤흔들어 놨다.

그럴 때마다 정신을 누군가 아주 조금씩 갉아먹는 것처럼 미쳐 가고 있었다. 라이언은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이미 피로 물든 말의 고삐를 더욱 힘주어 잡아 쥐었다.

“폐하! 말이 달려간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기사 한 명의 외침에 라이언이 곧장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곳엔 나무 사이사이를 비집고 달려가느라 엉망으로 헤집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라이언은 아무 말 없이 말을 채찍질해 방향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이 방향대로라면, 앞에는 바다와 이어진 큰 강이 흐르고 있었다. 다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아마도 베르디움 공작은 국경을 열어 달라 요구하기 위해 미렌을 납치했을 터였다. 그런데 강을 향해 달리다니?

그 이야기는 결국 미렌이 도망쳤다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라이언의 이가 악물렸다.

“이올라오스, 속도를 높여야겠다!”

“예, 폐하!”

성난 주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라이언의 말이 커다랗게 울부짖었다. 그와 그의 기사들이 숲속을 헤집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곧 저 멀리 나무 사이로 푸른 강의 모습이 보여 왔다. 숲속을 빠져나오기 직전, 라이언의 시야로 보인 것은…….

“차라리 죽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히듯 들려왔다. 오로지 그 소리밖에, 그 모습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미렌이 한 발짝 뒤를 향해 내뻗은 순간, 라이언의 심장 또한 덜컹 떨어져 내렸다. 그녀의 발밑으로 투두둑 떨어지는 흙더미들이 그의 심장 조각 같았다.

당장 멈추라고.

그만두라고.

그렇게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갑갑한 목은 그것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어서 미렌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부디 지옥에 떨어지길.”

그녀의 마지막 한 걸음마저 허공을 향해 뻗어졌다. 그와 동시에 라이언이 미렌을 향해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뒤늦게 이올라오스가 베르디움 공작을 잡아 제압하는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절벽으로 달려가 떨어지는 미렌을 바라봤다.

저 멀리…… 미렌이 추락하고 있었다.

라이언은 추락하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미렌은 오로지 라이언만을 직시하고 있었다.

입가가 덜덜 떨렸다. 라이언은 살면서 처음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떨어지던 미렌이 입가를 움직였다. 그녀의 입 모양이 라이언의 두 눈에도 보였다.

사랑한다, 고.

그 순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당장 그녀를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라이언은 그대로 강을 향해 뛰어들었다. 이올라오스가 미처 잡을 새조차 없었다.

아주 당연한 것처럼.

꼭 정해진 것처럼.

라이언은 미렌을 따라갔다. 자신보다 먼저 추락한 미렌이 푸르른 강 속에 잡아먹히는 모습을 라이언은 똑똑히 지켜봤다.

이대로 또다시 당신을 보낼 수는 없다.

이미 싸늘하게 죽어 버린 당신의 시체를 껴안고 우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하다.

‘내가, 잘 자라고 해서 그런가?’

‘…….’

‘아니면, 감히 당신이 건강해진 뒤를 상상해서 그러해?’

죽어 버린 미렌의 몸은 아무리 귀를 가져다 대도 박동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켜 주던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순간부터 그는 점점 자신이 미쳐 가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이대로 가다간 어차피 미쳐 죽어 버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삶을 모두 포기한 사람처럼 굴었다.

전쟁에서 패하든, 제국이 무너지든……. 그런 건 라이언에게 아무 감흥도 일으키지 못했다.

오로지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지켜 왔던 황위다. 몸이 약한 미렌이 건강해지기 위해선 절대자의 위치가 필요했으니까.

대의? 도리?

그런 것은 하등 필요 없다. 자신은 아주 단순하고 멍청해서 그런 깊은 뜻까지 알지 못했다.

그냥…….

그냥, 미렌을 사랑했다.

“미렌.”

너무도 푸르러서 검게 보이는 강으로 추락하고 있음에도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라이언은 그 강을 향해 한가득 팔을 벌렸다.

“이번엔 내가 당신의 꿈속으로 찾아갈게.”

그의 마지막 한마디를 끝으로 강 위에는 크고 깊은 진동이 저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미렌과 라이언이 빠진 강은, 곧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잠잠해졌다.

깊은 잠에 들 시간이었다.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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