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새벽에 뜨는 달
미렌은 오랫동안 꿈을 꾸었다.
아니, 사실 그녀는 이곳이 꿈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꿈’이라는 매개체로 두 몸을 오갔던 미렌은 꿈을 꾼다는 행위 자체가 낯설었다.
그래서 미렌에겐 지금 눈앞에 있는 모든 것도 현실처럼 느껴졌다.
가령, 제 앞에 선 헤겔처럼.
‘헤겔 씨?’
바람이 분다. 그러자 헤겔이 웃었다. 그의 희고 긴 머리가 뒤로 휘날렸다.
웃기만 할 뿐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든 미렌은 한 걸음 더 다가갔다.
‘헤겔 씨, 전쟁은요? 무사히 돌아오신 겁니까?’
이번에도 헤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자꾸만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대답해 주지 않는 그가 미워 미렌이 흘겨보았을 때였다. 헤겔이 그제야 미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토끼.’
급박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토끼라 부르는 헤겔이 우스워서 그녀는 그만 웃고 말았다. 이 상황이 이상하단 생각은 여전히 들지 않았다.
그러자 헤겔이 성큼 다가왔다.
그녀의 바로 앞에 선 그가 미렌을 향해 제 허리를 숙였다. 헤겔이 나직이 말했다.
‘키가 많이 컸네.’
‘키요? 제 키가 어때서……. 어?’
헤겔의 말에 미렌이 제 손을 들어 살펴봤다. 그곳엔 익숙하면서도 낯선 손이 있었다.
하얗고, 뼈가 도드라진, 험한 일이라곤 해 본 적 없는 이의 손.
미렌 에드가의 손.
그러니까…… 이미 죽어 버린 자의 손.
‘아닌데, 미렌 에드가는, 이미 죽었는데.’
미렌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미렌 에드가는 자신의 시녀인 마리아로 인해 죽었다.
그래서 자신 또한 미렌 우드로서 살아야 하지 않았던가.
안개처럼 가려졌던 기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그 순간 헤겔이 미렌의 이마에 제 이마를 콩, 가져다 댔다.
분명 소리가 제법 컸던 것 같건만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네 기억이 맞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미렌 에드가는 죽었어.’
이제는 받아들여야지.
헤겔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의 말이 옳다.
미렌 에드가는 죽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건 자신이었다.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때였다.
‘미렌.’
‘네?’
‘한 번만 안아 보자.’
미렌이 미처 대답할 새도 없었다. 그는 어느새 그녀의 허리를 잡고 제 품속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미렌은 이상하게도 제 눈높이가 낮아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헤겔의 품에 완전히 안겼을 때는 그의 어깨 너머가 겨우 보였다.
키가 작아졌다.
그의 품에 안긴 채 미렌이 손을 들어 다시 바라봤다. 건강하고, 생기 있으며, 약초를 캐던 누군가의 손.
자신은 이제 미렌 우드가 되어 있었다.
‘네가 누구든 상관없어.’
‘……정말요?’
‘너는 미렌이잖아.’
그는 미렌 우드라서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라이언은 그녀가 오로지 미렌 에드가인 줄로만 안 채 자신과 결혼했다.
그 사이에서 혼란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순간, 헤겔은 미렌에게 주지시키듯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누구든, 미렌으로 살아.’
‘헤겔 씨.’
‘나는 먼저 달에 간다.’
‘달이요?’
미렌을 놓아 버린 헤겔이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가 그를 따라가려 하자 헤겔이 고개를 저었다.
‘그곳에서 널 기다릴게.’
‘나를……?’
‘그래, 너.’
미렌.
헤겔의 마지막 한마디와 동시에 이곳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미렌의 정신 또한 수면 위로 올라갔다.
꿈에서 깨어날 때였다.
***
“헤겔……!”
“뭐야, 일어난 건가?”
미렌이 정신을 차리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국경이었다.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 헤겔과 함께 숨기 위해 찾아왔던 국경의 앞.
어지러운 머리를 가다듬고 일어서려던 미렌은 그대로 넘어졌다. 고개를 돌리자 제 손과 발이 묶여 있는 게 보였다.
완전히 결박당한 채였다.
“몸도 성치 않은데 가만히 있지 그래.”
“……당신, 누구야?”
“뭐야.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가 무어라 말하려 할 때였다. 그의 등 뒤에서 긴 그림자가 지더니 누군가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다시 보는군.”
“베르디움 공작……!”
“이제야 기억이 났다. 너, 그때 로이아 테넷과 함께 내 집무실을 뒤졌던 그 계집인가?”
미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작은 상관없다는 듯 제 할 말을 잇기 바빴다.
“그때부터였나. 황제가 슬슬 눈치채기 시작한 게?”
“……폐하께선 애초부터 널 믿지 않았어. 고작 살인 사건 하나로 그럴 리가 없지.”
“그래? 이거 아쉽군. 에드가 공작을 죽인 뒤부터 잘 연기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게 무슨, 윽!”
제 아버지의 이야기에 미렌이 놀라 반응했을 때였다. 공작은 그대로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그 바람에 목이 조이기 시작한 건 당연했다. 미렌이 컥컥대자 베르디움 공작의 입가로 선연한 미소가 드러났다.
“에드가 공작은 내가 죽였다. 그 늙은 여우가 권력을 쥐고 있는 걸 계속 보기가 힘들었거든.”
“아버지는, 폐하께서…….”
“아아. 황제는 그렇게 알고 있나?”
공작은 파랗게 질려 가는 미렌의 목을 아주 조금의 숨만 통하도록 놓아주었다. 그러나 아직 그의 손에 붙잡혀 있는 건 똑같았다.
“그 숨통을 끊은 건 나다.”
히죽거리며 웃는 그 얼굴이 그토록 소름 돋을 수가 없었다.
“에드가 공작이 죽은 그날, 황제는 공작 성으로 갔었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더군. ‘딸을 살리고 싶다면 자결하라’고.”
“폐하께서, 대체 왜……?”
“에드가 공작은 권력을 위해서 황제의 어머니를 죽였지. 그리고 마침내 황제가 그 증거를 찾아내었어. 반역자의 가문은 모두 멸살하는 게 제국법이란 걸, 너도 알지 않나?”
그래서 황제는 명령했다. 딸이라도 살리고 싶다면, 제 손으로 자결하라고.
에드가 공작의 죄를 공식적으로 밝히기 전, 황제는 공작 성으로 직접 찾아왔다.
응접실에서 황제를 마주한 공작은 그의 이야기를 듣다 대뜸 물었다.
‘……내 딸을 사랑하십니까?’
‘그게, 중요한가?’
‘당신의 어머니를 죽인 자의 자식입니다.’
라이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에 쿵 소리가 나도록 무릎을 꿇었다.
황제는 무릎 꿇은 에드가 공작을 무감한 눈으로 바라봤다. 어머니를 죽였다, 라는 말에도 조금의 동요조차 없었다.
‘살려 주십시오. 나를 살려 달라는 게 아닙니다. 내 딸만이라도 살려 주십시오.’
그 아이는 아무 죄도 없다고, 공작은 그렇게 덧붙이려 했다. 그러나 그 말이 나오기도 전에 황제가 말했다.
‘나의 아내다.’
‘…….’
‘너는 네 딸을 지키기 위해 나와 결혼시키지 않았던가?’
‘폐하.’
‘나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황제가 되었다.’
행복했던 유년 시절의 마지막 흔적.
라이언은 미렌을 두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 사랑할 수밖에 없노라고.
그 애처로운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면, 모든 것을 바치기 위해 무릎을 꿇고 싶노라고.
“우습지도 않은 순정이지. 황제에게 그런 순정이 가당키나 하던가?”
“그래서, 죽였습니까? 내 아버지를?”
“그래. 귀족파를 이끌던 수장인 주제에 딸을 살려 주겠다는 황제의 한마디에 홀려선, 황제가 돌아간 뒤 에드가 공작이 그러더군. 죽기 전 제 딸의 얼굴이나마 보고 싶다고.”
공작이 미렌의 목을 탁, 놓아 버렸다. 온몸의 힘이 빠져 있던 그녀는 그대로 땅바닥을 험하게 구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죽였다.”
“크윽, 으…….”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다 발버둥 치기에 내 손으로 직접 베어 죽였지.”
스르릉.
공작의 허리춤에 달려 있던 검이 허공으로 빠져나왔다. 그는 그것을 미렌의 목에 비스듬하게 가져다 댔다.
“말하는 걸 보아하니, 정말 황후가 맞나 보군.”
“그걸…… 이제야, 알았나……?”
“아아. 혹시 싶어 확인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만약 네가 황후가 아니라면 복잡해지니까.”
공작의 한마디에 미렌의 두 눈이 커졌다. 설마 싶어 그녀가 공작을 향해 물었다.
“폐하께서…… 아신 건가?”
“그래. 지금쯤 널 찾아 이곳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겠군.”
“차라리 날 죽여!”
“그럴 순 없지. 네가 있어야 나도 국경을 넘어가지 않겠느냐?”
주저앉은 미렌이 흙바닥을 짚은 채 뒤로 물러섰다. 어떻게든 도망쳐야 했다.
라이언의 발목을 잡기 전에 어떻게든……!
그 순간 그녀의 손가락 끝으로 무언가 닿아 왔다. 미렌이 멍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자 그곳엔 처음 보았던 마법사가 지키고 있었다.
공작은 다 잡은 사냥감을 몰듯 검을 흔들며 미렌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목숨을 걸고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그때였다.
미렌은 그대로 흙을 움켜쥐고 공작의 눈을 향해 흩뿌렸다. 그와 동시에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마법사가 움직이는 게 지나가듯 보였다.
그러나 헤겔이 미렌에게 말해 준 적이 있었다. 이곳 국경에서 마법사는 힘을 쓰지 못한다고.
힘이 풀려 다리가 꺾이는 한이 있더라도 도망쳐야 했다.
더 이상, 그의 그림자로 살고 싶지 않았다.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