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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121화 (121/133)

121화

붉은 태양

“폐하, 상대의 기세가 예상보다 거셉니다! 뒤로 물러서십시오!”

촤악!

이올라오스의 검이 한 번씩 휘둘러질 때마다 그의 얼굴로 피가 튀었다. 그러나 그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은 채 황제를 호위했다.

지금 현재, 프레니티 영주성.

베르디움 공작의 총공세로 인해 전황은 비등했다. 베르디움 공작이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우듯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나오는 이유는 당연히, 황제인 라이언 때문이었다.

황제인 라이언만 이곳에서 잡아낸다면 제국의 역사는 다시 써질 터였다. 베르디움 공작에겐 이것이 마지막 기회였다.

“황제―! 황제를 잡아라!”

저 멀리 떨어진 베르디움 공작의 목소리가 라이언의 귓가에도 똑똑히 들렸다. 눈을 붉힌 그가 먹잇감을 찾은 사냥개처럼 라이언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신에게 다가온 어느 기사의 목을 베어 낸 라이언이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봤다.

그 순간,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

라이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목이 찢어질 정도로 소리를 지르던 베르디움 공작 또한 입을 닫았다.

그렇게 얼마나 눈빛이 오갔을까. 먼저 주춤, 물러선 것은 베르디움 공작이었다.

라이언과 눈이 마주친 그때부터 베르디움 공작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변했다.

그의 눈빛이…… 살고자 하고 있었다. 죽음만을 바라던 예전과는 달랐다.

미렌 에드가 황후가 죽은 뒤 황제는 삶을 지속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처럼 굴었다.

그러니 베르디움 공작이 감히 직접 황제의 뒤를 치려 든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테룬 공국을 이용해 타격을 입히려는 속셈이었지만, 그가 약해진 모습을 목격한 순간부터 계획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전쟁이 일어나고도 황제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미 산 사람이 아닌 전 황후의 시체나 붙잡고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이처럼 굴었다.

그래서…….

지금이 바로, 기회라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이올라오스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너희들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폐하를 지켜라! 알겠는가?!”

황제의 개라 불리던 사내.

라이언의 주위로 로이아 테넷을 비롯해 가장 유능한 기사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황제는 그것을 두고 나무라지 않았다.

단지, 그 틈에 섞여 베르디움 공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황제가 웃었다.

황제를 잡으라고 명령을 내리던 베르디움 공작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웃음과 더불어 전황이 기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황제는 제 주변으로 모여든 기사들을 이용해 온갖 곳을 들쑤셔 놨다.

베르디움의 기사들이 방어적인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무차별하게 그곳을 찔러 들어갔다. 그 행동력과 결단력이 너무도 빨라 도저히 손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겨우 비등했던 전황이 무너져 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결국 보다 못한 베르디움 공작이 명령을 내렸다.

“마법, 마법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거라! 마법으로 황제를 노리라고!”

“예? 하지만 각하, 그랬다간 우리 쪽 기사들이…….”

사악!

대답을 하던 기사의 목이 날아갔다. 베르디움 공작이 참지 못하고 베어 버린 탓이었다.

그는 피가 뚝뚝 흐르는 검을 아래로 내리며 뒤를 돌아봤다. 후방에서 전투를 지원하던 마법사들이 그곳에 있었다.

“들었겠지. 어서 마법을 쏘아 내라.”

열 명 남짓한 마법사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제 눈앞에서 목이 잘린 기사를 본 마법사들은 결국 베르디움 공작의 기사들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마법을 시전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 라이언을 향한 집중 포격 마법이 떨어져 내렸다.

베르디움 공작은 그 모습을 핏발 선 눈으로 똑똑히 바라봤다. 황제는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한 듯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파앗.

저 멀리 강렬한 빛줄기에 베르디움 공작의 눈이 돌아갔다. 그곳에선 웬 로브를 쓴 사내로부터 엄청난 빛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황제의 주변으로 새하얀 보호막이 둘러졌다. 포격 마법은 오로지 베르디움 공작의 기사들에게만 지옥에서 온 불덩이처럼 떨어져 내렸다.

“으아악!”

“살려 줘……, 살려 줘!”

베르디움 공작의 앞을 지켜 주던 기사들이 하나둘씩 죽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을 위협하던 마법이 사라지자 황제는 다시 이쪽을 바라봤다.

베르디움과 다시금 눈이 마주친 순간.

그가 공작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

“제길, 제기랄!”

말을 탄 베르디움 공작이 이미 달리고 있는 말을 자꾸만 재촉했다. 그의 뒤에선 겨우 살아남은 몇 명의 마법사들이 함께 달아나고 있었다.

황제와의 전쟁은 대패했다.

승기가 기울어진 순간 베르디움 공작은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건 후방에 있던 머리 좋은 마법사 몇 명도 마찬가지였다.

베르디움 공작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전선에 있던 공작 측의 기사들이 무너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주군을 잃은 그들은 목숨을 바쳐 투항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현재 공작의 뒤에는 황제 측의 기사들이 따라붙은 채였다. 뒤를 힐끗 바라본 베르디움 공작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각하, 이대로 가다간 분명히 붙잡히고 맙니다. 이 앞은 테룬 공국의 국경이지 않습니까!”

“그럼 다른 방법이라도 있단 말이냐?!”

그곳에 가 봤자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작은 말머리를 돌리지 못했다. 당장 제 뒤에서 황제의 개인 이올라오스가 필사적으로 따라붙고 있기 때문이다.

테룬 공국의 국경은 안 그래도 거슬리던 에드가 황후의 계략으로 인해 막히고 말았다. 그 황후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잠깐, 에드가 황후……?

테룬 공국의 국경에 대해 생각하던 베르디움 공작의 두 눈이 커졌다. 그가 옆에서 함께 달리고 있던 마법사에게 물었다.

“황후는? 황후는 어떻게 되었지?”

“예? 에드가 황후라면 이미 죽었…….”

“그 소리는 집어치우고! 자신이 황후라 주장하던 그 건방진 계집은 어떻게 되었냔 말이다!”

공작의 물음에 마법사의 두 눈이 커졌다. 그가 주저하면서도 대답했다.

“동굴에서 끝까지 나오지 않기에 불이 모두 꺼진 후 들어가 보니, 여자는 마법으로 사라진 뒤였습니다.”

“마법?”

“예.”

그 동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추가적인 보고가 남았지만 공작의 눈치를 살피던 마법사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마법사의 보고를 듣고 이를 딱딱 씹던 공작이 번뜩 고개를 돌렸다.

“그 여자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있겠나?”

“아마도, 황제가 데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동굴에 남아 있던 마법의 흔적은 프레니티 영주 성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를 데려와야겠다.”

나직이 말한 베르디움 공작이 제 뒤를 힐끗 돌아봤다. 이올라오스의 신형은 아직까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올라오스 정도의 기사라면 이 정도 거리를 좁히는 건 순식간이었다. 말의 속도를 늦춘 베르디움 공작이 마법사에게 턱짓했다.

“나는 이대로 테룬의 국경까지 간다.”

“그러나 거긴 이미 막혔지 않습니까……!”

“그러니 네가 그 계집을 데려오거라.”

베르디움 공작이 마법사의 어깨를 짚었다. 그의 손아귀가 꾹 힘을 줘 어깨를 누르기 시작했다.

“네가 그 여자를 거기까지만 데리고 온다면, 우리는 국경을 넘을 수 있다.”

마법사의 턱이 달달 떨렸다. 그러나 베르디움 공작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한 채 한 글자씩 짓씹듯 내뱉었다.

“황제는 전쟁을 마무리하느라 아직 영주 성에 돌아가지 못했을 터. 네가 해내야 한다. 알겠느냐?”

꿀꺽.

베르디움 공작의 눈빛을 받은 마법사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감고 무언가를 읊조리던 마법사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혼자 남은 베르디움 공작은 유난히 쾌청한 하늘을 바라봤다. 빌어먹을 태양이 유난히도 번쩍이고 있었다.

눈이 멀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공작은 그 태양을 또렷이 바라봤다. 그가 태양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그리 소중했다면, 내게 보이지 말았어야지.”

아니면 애초부터 없애든가.

베르디움 공작의 머릿속으로 죽어 간 제 아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 그녀는 제 손으로 죽여 버렸다.

아니, 그것을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제 앞을 가리는 건 모두 베어 내라고 배웠다. 그러니 공작은 제 아내마저 죽여 버렸을 뿐이다.

어차피 사랑할 거라면…… 죽어도 상관없지 않겠는가?

베르디움 공작이 히죽 웃은 순간, 그의 옆으로 공간이 무너졌다. 조금 전 떠났던 마법사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의 품에는…….

축 늘어진 미렌 우드, 아니, 새로운 황후가 안겨 있었다.

마법사가 그녀의 몸을 베르디움 공작에게 건네었다. 공작은 그것이 아주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듯 조심히 안아 들었다.

“감시는?”

“서쪽 마탑의 주인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녀는 치료 마법이 주력이기에,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잘되었군.”

베르디움 공작은 늘어진 미렌을 말 앞에 앉힌 채 다시금 출발했다. 굳게 닫힌 테룬의 국경을 향하여.

그는 제 앞에 앉은 여인의 귓가에 조용히 속살거렸다.

“네 남편은 네가 죽어도 널 사랑할 거란다.”

그러니, 이곳에서 죽어 줘야겠어.

꿈만 꾸면 시한부 황후에 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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